할머니의 연봉

2019.03.23 10:23

정남숙 조회 수:4

할머니의 연봉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정남숙

 

 

 

                                                             

  나는 지금까지 내가 일을 하고 보수를 받아본 적이 한 번도 없다10년 전, “선생님, 이제 아이들 한 번 가르쳐 보시죠.” 귀향하여 농장을 가꾸며 틈틈이 서원(書院)에 들러 한자사범과 훈장과정을 준비하고 있는 나에게 훈장 선생님의 권하는 말이었다. “아직은” 하며 가르칠 실력이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는 나에게, 충분하다며 노인복지관에 한 번 가보라 했다. 노인복지관에서 일자리를 마련해 준다는 부연설명까지 해주었다. 나는 속으로 ‘내가 왜 복지관엘 가?’ 하며 귓등으로 흘려버리고 말았다.

  동네에서 자주 마주치는 이웃할머니가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할머니와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이분은 정치, 경제, 시사, 교육까지 다방면으로 모르는 게 없다. 어떻게 그런 걸 다 아느냐고 묻는 나에게, 노인복지관에 다니다 보니, 이런 상식적인 것은 기본이라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래요?” 하며 응대를 해주니 더욱 신이 나서, 만날 때마다 새로운 뉴스를 전해 주었다. 별로 도움이 되는 일도 아니며, 전문가 수준도 아니니 귀담아 듣지 않아도 되지만, 그와 헤어지고 나면 괜히 얌전한 할머니를 부끄러움도 모르고, 주책을 떠는 떠들이로 만든 주범이 노인복지관인 것 같아 복지관 탓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뒤에도 노인복지관에 관심도 없었고, 갈 일이 없었다. 그러나 지난 해, 재능나눔 자원봉사 일자리로 노인복지관을 찾았다. 며칠 뒤, 다시 만난 복지관직원은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며 추후 일정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단 한 번 나를 봤을 뿐인데 나를 기억하고 내 이름까지 불러주다니, 그 동안 부정적으로 바라보던 노인복지관에 대한 나의 감정은 눈 녹듯 녹아내리고, 내 마음은 반가움에 신뢰감까지 덤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노인복지관을 나서다 뒤돌아보니, 아무 의미 없이 일자리만 원해 들어갔던 복지관 건물이, 처음부터 나를 기다리며 나를 위해 준비된 것 같았다.

  나에게는 손자손녀가 세 명이나 있다. 그 중 하나밖에 없는 손자가 출국을 한다. 한 달 방학이 순식간에 지나간 것 같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유학길에 올라 미국에서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손자다. 학비며 생활비 등을 마련하느라 제 부모의 등이 휠 테지만, 나는 할머니로서 의무감으로 적은 용돈만 꺼내주며 잔소리만 들어놓았었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손자에게 내 연봉에서 두둑이 현금을 찾아 “할머니도 연봉을 받는다.” 고 의시대며 자랑을 했다. 옆에 있던 제 어미가 ‘할머니 일 년 수고하신 보수’라며 한 수 더 뜬다. 허투루 쓰지 말고 할머니가 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며, 할머니 수고와 사랑을 잊지 말라고 덧붙였다.

  내가 받는 연봉은, 1일 세 시간, 1, 열흘 30시간, 1년 중 9개월 동안만 일할 수 있는 노인 일자리에서 받는 보수다. 매월 십일조를 떼고, 남은 금액을 차곡차곡 모아 쌓이는 재미가 쏠쏠하다. 손자손녀에게 할머니의 사랑으로 인심을 쓸 수 있게 해 준 게 나의 귀한 연봉이다. 비록 손자에게 전()에 주던 용돈보다 비록 액수는 적을지라도, 내 수고의 대가를 받아 전해주는 보람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뿌듯함을 느끼게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막내 손녀와 성적이 올라 좋아하는 큰소녀에게도 축하할 수 있어 더욱 행복하다.

  과거 노인들은, 젊었을 때 고생을 많이 했으니,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쉬라는 말을 듣고 싶어했다. 그러나 요즘 노인들은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일을 하고 싶어한다. 늙으면 '입은 닫고, 주머니는 열라'는 말이 있다. 품위 있는 노년의 삶을 위해 일하는 즐거움을 즐길 수 있는 일자리와 주머니를 채울 수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연봉이 필요하다. 노인 일자리에 참여하여 내 수고와 내 이름으로 받은 보수는, 액수와 관계없이 내가 아직은 건재하다는 의미가 아닌가? '나의 연봉'은 아주 의미가 있는 소중한  나의 소득이다,

                                                                    (2019.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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