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 앞바다

2019.03.24 10:26

이종희 조회 수:6

시인 이규보를 황홀경에 빠뜨린 부안 앞바다

 

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이 종 희

 

 

 

  불그레한 노을이 물드는 부안 앞바다의 낙조를 보고 황홀경에 빠지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수평선을 향해 서서히 물들어가며, 그 빛을 받아 출렁이는 바닷물은 노래 속의 멜로디를 연상케해 나도 모르게 흥얼거려진다.

  저녁노을에서 잠시 깎아지른 바닷가로 눈을 돌리면 밀려오던 바닷물이 부딪쳐 부서지는 모습이 파노라마가 되어 꽉 막혔던 가슴을 뚫어주어 상쾌해진다. 오랜만에 나들이를 한 아내의 눈치를 보니 흐뭇해하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하루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거뭇한 배가 멀리서 황금빛 노을과 어울려 휴대폰을 꺼내 서너 폭을 담았다. 이런 아름다움과 생동감을 못 잊어 부안을 가끔 찾곤 한다.

  그 뿐이랴. 부안 앞바다에서 건져 올린 돔, 우럭 등의 활어와 살짝 데친 주꾸미 한 점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는 맛이라니. , 곰소 염전에서 생산한 천일염에 담근 젓갈은 공기밥 한 그릇을 게눈 감추듯 하게 한다. 오동통한 속살을 끓인 바지락죽 또한 간단한 요기로 안성맞춤으로 관광객들이 줄을 잇는다. 이래서 고려시대 이규보는 63세에 부녕현에서 벌목의 작목사로 잠시 관직에 있을 때 여러 편의 시를 창작했나 보다.

  그가 곰소항에서 바다를 바라보니 파란 물결과 푸른 산들이 들락날락하고 붉은 저녁노을로 바다가 붉으락푸르락, 마치 만첩병풍萬疊屛風을 두른듯이 아름다웠다고 했다. 이때 시를 읊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 했는데, 부안의 주사포구를 지나다가 휘영청 밝은 달이 해변의 모래사장을 비추어 밤바다가 황홀할 만큼 아름다워 시를 한 수 읊었다고 한다. 이 시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과 조선시대 선조의 명으로 조선전기 문신들이 시문을 모아 편찬한 『동문선』 권14에 실린 ‘부녕포구扶寧浦口’이며, 부녕은 지금의 부안이다.

 

  水聲中暮復朝  흐르는 물소리 중에 저녁은 다시 아침이 되고

  海村籬落苦蕭條  해촌마을은 참으로 쓸쓸하다.

  湖淸巧印當心月  호수는 맑기에 호수 복판에 당하여 달이 교묘히 찍혀 있고,

  浦闊貪呑入口潮  포구는 넓기에 어귀로 들어오는 조수를 탐내어 삼킨다.

  古石浪舂平作礪  물결이 찧어 옛날의 돌은 평평한 숫돌이 되고

  壞船苔沒臥成橋  이끼가 들어차 무너진 배는 누워 다리가 되었다.

  江山萬景吟難狀  강산의 모든 경치 시로 읊어 형상하기 어려우니,

  須倩丹靑畵筆描  모름지기 화가에게 붓으로 그려 달라 부탁해야지.

 

  고요한 바닷가마을의 쓸쓸한 정경에도 맑은 바다에 달이 찍혔으니 아름다웠고, 넓은 포구가 조수를 탐내어 삼킨다고 표현했다. 돌은 물결로 숫돌을 만들고 무너진 배도 예쁘게 보였으며, 포구의 모든 경치를 시로 읊어 형상하기 어려우니 화가에 그려달라고 싶다고 못내 아쉬움을 감추지 못할 정도였다.

  경기도 여주 출생인 이규보가 우리고장 부안을 이렇게 아름답게 시로 읊었으니 거짓이겠는가. 지금은 갯벌이 밀려와 썰물이 되면 바닥이 드러나 바닷물이 멀리 보이지만, 이 시를 읊을 때만 해도 원시적인 모습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부안을 찾을 때마다 곰소항 부근의 염전에서 소금을 긁어모으는 풍경, 곰소항 어시장에서 펄펄뛰는 활어를 떠 소주 한 모금에 회 한 점을 넣고 씹는 맛이라니, 그 맛이 그리워 이곳을 찾는다.

 

  이십여 년 전, 지인의 초청으로 왕포 앞바다에서 망둥어 낚시를 한 적이 있었다. 바지락을 하나 까서 낚시에 끼워 바다에 던지니 금방 찌가 사라지는 것이다. 낚싯대를 들어 올리니 손바닥 길이만한 망둥어가 걸려 올라오는 게 아닌가. 옆에 있던 지인의 말이 망둥어는 제 살을 미끼로 끼워도 잘 문다고 일러주었다. 그로부터 두어 마리를 더 잡으며 신이 났는데 밀물이 들어온다며 나가자고 재촉하는 것이었다. 주섬주섬 챙기고 나가려는데 아내가 더뎠다. 일행은 저만치 앞서가는데 아내를 데리고 나오며 펄에 발이 빠져 행동을 바로 할 수가 없었다. 얼른 나오지 못하는 내게 이쪽으로 나오라고 방향을 가르쳐 주어 걸어 나오니 한결 수월했다. 바다도 길이 있었는데 진즉에 알려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뭍에 올라와 보니 하반신은 흠뻑 젖었고, 랜드로바 캐주얼화를 난생 처음으로 신고 나들이 했는데 어패류 조각에 긁혀 말이 아니었다. 새로 산 신발은 사랑땜도 못했으나 밀물에 화를 당하지 않은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일행은 나룻배를 타고 낚시를 다시 시작했다. 제 살을 찢어 끼웠는데도 넣기만 하면 곧바로 찌가 잠수했다. 나보다 오히려 아내가 많이 잡을 정도였으니 망둥어 천국이었나 보다. 잡아 올린 망둥어를 칼로 잘라 대접에 소주를 따라 서너 잔 들이키니 정신이 몽롱해졌다. 바다에서 나룻배를 타고 낚시를 하는 풍경, 거기에 소주 한 잔은 긁혀진 랜드로바의 아픔을 잊게 해준 잊히지 않는 추억이다.

  이규보의 ‘부녕포구’라는 시를 접하면서 나도 모르게 이곳에서 있었던 추억을 더듬게 되었다. 고려시대 이규보가 본 부녕포구의 정경이 내가 그려본 모습과 다르지 않아 감상에 젖은 듯하다. 부녕포구의 아름다움을 노래해준 이규보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머지않은 날 이 시를 들고 우리 고장 전북의 아름다운 부안을 아내와 다시 한 번 찾으리라.  

                                                      (2018.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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