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2019.03.29 16:09

최상섭 조회 수:4

인연(因緣)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금요반 최상섭

 

 

 

 

  나는 늘 물이 흘러가면서 세상을 정화하고 푸르름으로 여울지는 아름다운 들길을 지나며 저물어 가는 노을을 보면서 바다에 이르듯, 상선약수(上善若水)의 의미를 되새기며 내 삶도 그렇게 이어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세상살이라는 것이 직선이 곡선을 이길 수 없듯이 내 삶의 여정에서 뒤돌아보니 굴곡은 언제나 깊게 패이고 기쁨의 날보다는 힘들고 어려운 역경을 해쳐나가야 하는 고행의 길이 더 길게 늘어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나는 한결같이 나에게 주어진 인연은 하늘의 뜻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며 아름답게 가꾸려고 노력했었다. 이제 노익장이 된 처지에서 뒤돌아보니 그 인연들은 훗날 도리어 복으로 돌아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또한 학창시절 뛰어나게 공부를 잘했던 처지도 아니지만 열심히 노력했던 기억이 역력하다. 학창시절보다는 사회생활에 더욱 진력하며 보람을 가꾸려 혼신의 노력을 다 쏟았었다.

 

  나는 한 직장에서만 35년을 근무하며 그 긴 세월동안 나의 안위나 가족의 기쁨을 각인하려는 날보다는 새벽에 출근해서 땅거미 지고 별보기 운동을 하며 퇴근하는 날들이 대부분이었다. 직장에만 충실하려는 예스맨의 태도로 그 긴 세월을 살았다. 지금 돌아보니 “아버지의 술잔에는 눈물이 반이다.”라는 이근대 시인의 시가 내 가슴을 후비며 생채기를 냈다. 그렇게 근무하다보니 가족으로부터는 따돌림을 당했으나 사립학교인데도 자연스럽게 늦은 세월에 재단과 아무 인연이 없었지만 교감으로 승진했었다. 교감이 된 뒤에는 학교발전에 매진하며 도서관을 지을 수 있는 6억 원의 교부금을 교육부로부터 받은 일과 학교운동장을 인조잔디구장으로 만드는 기반을 다졌던 게 새삼스럽게 떠오르면서 그 어려웠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나는 인조잔디구장을 만들었던 과정을 살펴보면서 새삼 인연의 소중함을 돌아보고자 한다.

 

  어느 날인가 공문을 결재하다보니 인조잔디구장을 조성하고자 하는 학교는 그 계획서를 제출하라는 공문이 『88서울 올림픽 문화재단』에서 왔었다. 교무부장에게 구체적인 계획서를 작성토록 하여 면밀히 검토한 뒤 김제시교육지원청에 직접 내가 공문을 가지고 가서 P교육장을 만났다. 인조잔디구장의 건립 당위성을 설명했더니 P교육장은 쉽게 추천을 해주었고, 나는 그 공문을 들고 다시 도교육청으로 향했다. P교육장은 내가 졸업한 중학교의 1년 후배이며 고등학교 시절부터 학교는 다르지만 남다른 인연을 맺고 가까이 지냈었다. 서로가 평교사 시절 다르게 오세아니아 주 교육연수를 갔었고, 호주의 해안도시 브리즈벤에서 P교육장을 우연히 만났었다. 그 당시에는 해외에서의 뜻밖의 만남은 희귀한 일이며 우리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내 인생의 아름다운 인연의 한 토막이 되었다. 서로가 반가워 어쩔 줄 몰랐고 그날 밤 맥주잔을 기울이며 밤 새워 이야기꽃을 피운 게 엊그제 같은데 강산이 두 번이나 변했던 옛날의 무용담이 되었다. 후배지만 P교육장은 공립학교에서 근무했고 성실함과 뛰어난 외교술로 적기에 교육장에 진급했고, 나와는 참으로 붉은 고추속의 금낭처럼 귀한 인연을 맺으며 같은 전라북도 김제시에서 근무했었다.

 

  전라북도교육청에서는 N보건체육과장이 이 업무를 주관하는 담당자였고, 그 또한 나와 대학재학시절 의형제를 맺었던 1년 후배였다.

 “N과장, 나 N과장한데 부탁하러 왔어요.” 하고 서류봉투를 내미니 서류를 차분히 살펴보더니

 “선배님, 도체육회 한 번 다녀오시지요. 도 체육회장 추천서가 첨부되어야 합니다.” 라고 설명했다. 도체육회를 찾아가 사무처장을 찾았더니 이 분 또한 고향의 옆 동네에서 자랐고 1년 먼저 수학하신 L선배였다. 서류를 보이며 다른 학교는 절대 추천해주면 안 되고 본교만 추천을 해 줄 것을 강조했더니 그리 해 주겠다고 시원하게 대답했다. 매사가 쉽게 풀려 하늘을 날 것 같이 기분이 좋았다. 도 체육회 추천서를 들고 다시 도교육청 N과장을 만나 금년도에는 본교 1개교만 추천해 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그리하겠다는 다짐을 받았다. 그렇게 말하는 내게 N과장은 한 달 뒤쯤 실사가 나올 테니 그 분들 안내를 잘 해야 된다고 말했다.

 

  학교에 돌아와 학교장에게 당일 인조잔디구장 과정을 자세히 복명했으며 실사가 나오면 그 분들 안내를 각별히 신경 써 줄 것을 말씀드리고 교무실 내 자리로 돌아와 땀을 닦으며 “후유”하고 안도의 숨을 쉬었다. 비만 오면 돌이 뾰쪽뾰쪽 돋아나는 본교 운동장은 학생들의 안전사고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학교였다. 그러나 이 사업은 금방 실행되지 않고 학교의 규모에 따라 연차적으로 시행되었다. 정년퇴임 2년 전에 올린 서류였다.

 

  그런데 이러한 사업이 말처럼 쉽게 그냥 이루어질 수는 없었다. 어떤 일이든지 우여곡절(迂餘曲折)이 따르듯이 이 사업 또한 어려운 난관이 있었다. 실사단이 학교를 방문했을 때 나는 출장 중이었다. 학교장에게 서류 접수사항을 복명할 때 N과장이 한 말을 상기하며 실사가 나오면 특별히 안내해 줄 것을 부탁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없다”는 실사단의 말만 듣고 그냥 보냈다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가운 일이었다. 문뜩 머리를 스치는 P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P친구는 그때 대한체육회 사무처에 근무했고 이 친구는 경희대 체대를 졸업한 핸드볼 국가대표선수 출신으로 한국의 핸드볼 여자국가대표 감독을 역임했었다. 이 친구에게 전화를 했더니 이 친구가 이 사업에 대하여 먼저 알고 있었다. 실사단의 대접이 소홀했던 점을 사과하고 이 친구에게 실사단에게 대접해 줄 것을 부탁했더니 농담 반 진담 반의 알아들을 수 없는 대답을 했었다.

 

  퇴임 후 지금 근무하는 직장을 가면서 보니 내가 근무했던 그 학교에서 인조 잔디구장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깜짝 놀라 곧바로 그 학교에 들어가 후배 교장을 만나 자초자종을 물으니 오히려 내게 되물었다.

 “교감 선생님께서 신청하시지 않았나요? 그때 신청한 사업이 이제야 시설되고 있습니다.” 

 인조 잔디구장사업을 신청한 뒤 만 5년 내가 퇴임한 뒤 3년만에 공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새삼 생활이란 터전에서 인연을 아름답게 가꾼 보람의 흔적이 아닐 수 없었다.

 

  탐 존슨의 ‘고향의 푸른 잔디’ 란 팝송을 속으로 흥얼거리며 초록의 보리밭처럼 변한 인조구장에 한 가닥 내 영혼이 깔려있음을 실감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2018.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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