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15 08:11
20170405 크고 작게 겪어야 하는 인생의 멀미
참을 수 없는 멀미가 나를 들들 볶는다. 결국, 우아하게 앉아 있지 못하고 비닐봉지를 찾고 휴지를 잔뜩 사용하면서 불편한 위장을 비워낸다. 멀미 없는 인생을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만, 고통스러워 얼굴은 찌그러지고, 기분이 안 좋으니 이런 기간에는 남에게 반짝 비치는 햇빛의 역할을 할 수가 없다. 나보다 더 멀미가 심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을 웃게 해주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능력 한도에서 도와주고 싶다.
마음이 가는 사람들이 따로 있다. 아래층에 사는 언니들은 일곱 살 터울인 자매다. 옛날 우리나라 개그맨 중에 인기인이던 홀쭉이와 뚱뚱이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언니는 빼빼고 동생은 퉁퉁한데 동생의 건강이 아주 안 좋아서 팔십을 넘긴 언니가 모든 살림을 맡아 한다.
작업실을 아파트에 마련하고 팔자 편한 모습으로 사는 내가 언니들 눈에 띄었다. 언니들이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는데 난 자진해서 장보기, 두 분 생일 챙기기 등 가볍게 함께하는 시간이 잦아졌다. 누가 부탁해서 하는 일도 아니고, 무슨 의무감으로 시작한 일도 아니다. 자연스레 아래 위층을 오가며 자잘하게 필요한 일들을 봐 드리며 지낸지 삼 년이다.
한국에서 개인 병원 원장을 지내신 부친과, 의사 오라버님이랑 친척들이 모두 의료계에선 쟁쟁한 집안이라신다. 큰언니는 교통사고를 크게 당하고 척추를 다쳐 평생 결혼도 못하고 처녀로 늙었고 작은언니는 한국에서 약사로 근무했던 재원이다. 미국 이주 후 결혼을 하고 딸, 아들 두고 살다가 영주권 받은 남편이 어느 날 두 아이 데리고 홀연히 사라졌다는 슬픈 사연이 내 가슴을 흔들었다.
당시 열두 살, 열 살짜리 두 아이 뺏기고 삼십 년을 어찌 살았는지 묻지도, 듣지도 못했지만, 그 아픔을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을 쓰고 힘껏 의지가 되어 드렸다. 언니들이 출석하는 교회가 나와는 다르지만, 가끔 모시고 가서 함께 예배도 드리고 매사에 언니들에게 관심을 두고 지내던 어느 날, 세상에서 제일 값지고 기쁜 소식을 들었다.
언니들 교회 담임목사님 사모의 조카가 작은언니 딸과 친구라는 놀라운 사실을 접했다. 교회 측에선 신자의 딱한 사정을 아니까 입소문을 냈고, 작은언니의 딸 역시 엄마를 찾고 싶은 맘으로 친구에게 속 얘기를 했던 결과가 딱한 모녀의 이별을 끝내게 했다.
언니들이 들은 흘러간 30년 세월의 아이들 생활은 예상을 뒤 엎었다. 영주권 받고 목적 달성을 끝낸 부성애 깊은 불법 체류자가, 아이들 데리고 숨겨 둔 여자와 양심의 가책도 없이 잘 살아서 오늘에 이르렀겠지 쉽게 비난을 했던 나를 부끄럽게 했다.
두 아이 데리고 숨어 버린 애들 아빠는 혼자서 밤낮을 안 가리고 일만 했단다. 경제만을 책임지고 두 아인 저희 둘이 컸단다. 입 열고 말을 하는 아빠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단다. 그래서 두 아이는 한국말을 다 잊고 영어권에서 40대가 되었다. 숨겨 논 여자도 없었다.
작은 언니 딸아이가 드나들면서 난 힘이 빠졌다. 더 이상은 내가 할 일이 없다. 딱히 언니들 생신 따져 외식하러 모시고 나갈 필요도 없다. 때 맞춰 시장 보러 기사노릇 안 해도 된다. 착하게 성장했지만 마땅한 짝을 만나지 못해 아직 혼자인 딸아이가 정성껏 엄마와 이모를 찾아온다.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새가 없다. 언니들 인생에 멀미는 끝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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