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두콩 이야기

2019.06.17 06:05

이진숙 조회 수:9

완두콩 이야기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이진숙

 

 

 

 

 콩을 거둘 때가 한 달쯤은 지났을 것이다. 하긴 무슨 영문인지 제때 잘 심었는데 한 20일이 지나도록 감감 무소식이었다. 행여 땅이 무거워서 밀어 올리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어느 날 호미로 흙을 꼭 찍어 파보니 그곳에 마치 새끼고양이 콧수염보다 더 작고 가는 것이 고개를 쑥 내밀고 있었다. 부리나케 흙을 다시 덮고 기다리기로 했다.

 땅을 힘차게 밀고 얼굴을 쏘옥 내민 연한 잎사귀가 사이좋게 두 개가 나란히 보였다. 아니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구멍구멍 심은 대로 서너 개씩 빠짐없이 올라오고 있었다. 참 대견하고 신통했다. 여리디 여린 새싹이 무거운 흙을 제치고 나오는 모습이 마치 씨름 선수가 천하장사 상패를 받고 두 팔을 번쩍 치켜 들고 포효하는 양 기세가 등등했다. 아무 탈 없이 무럭무럭 자라 주었다.

 무슨 변덕인지 올해는 꽃샘추위도 없이 초봄이 잘 지나가더니 느지막이 마치 놀부가 심술을 부리듯이 느닷없이 기온이 뚝 떨어졌다. 너무 일찍 따뜻한 날씨에 일찌감치 보일러를 껐는데, 다시 보일러 스위치를 올리고 이불도 봄 이불대신 겨울 이불을 꺼내느라 부산을 떨었다. 건장한 사람도 얼떨떨한데 연약한 식물들은 어떨까? 조금 일찍 심은 여러 종류의 모종들은 추위에 떨고 있었다. 그러더니 힘없이 축 처지고 약한 녀석들은 이내 고개를 떨어뜨리고 다시 일어나질 못했다.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고 잘 자라던 녀석들도 갑작스런 봄추위에 바짝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래도 변덕스런 날씨를 잘 버텨 주는 것이 고마웠다. 여느 때 같으면 고추 모종을 심을 시기가 되면 밭에 있는 녀석들이 실하게 콩 꼬투리에 알맹이를 품고 주인을 기다리는데, 올해는 갑작스런 추위에 놀라서인지 꽃도 늦게 피더니 콩 꼬투리도 납작한 것이 영 시원치 않았다. 다행인 것은 올해는 고추 모종을 다른 밭에 심어놓아서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려 줄 수 있었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는 주인의 심정을 헤아리듯 콩꼬투리가 제법 실한 녀석들이 눈에 띠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마다 밭에 나가 잘 여문 것들로 골라 두 손 가득 따 가지고 들어와 껍질을 벗기면 그 속에 초록색 구슬이 많게는 예닐곱이나 들어있기도 하고 적게는 두세 개씩 들어 있다. 잘 씻어서 솥에 하얀 쌀과 함께 한 주먹 넣은 다음 스위치를 누르고 기다리면 어느새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고슬고슬 맛있는 완두콩 쌀밥이 우리를 기다린다. 아침마다 밭에 나가서 완두콩을 따는 것도 이제는 나도 따가라며 내 손길을 기다리는 것들이 너무 많아 아예 밭에서 모두 뽑아 수확을 할 때가 되었다.

 하지만 ‘세월을 이기는 장사가 없다’더니 남편과 나도 이젠 나이가 들었는지 며칠 전 집안에 큰 행사를 치르고 나니 서로 시합이나 하듯이 온 몸이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도무지 밭에 나갈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밭에 있는 완두콩은 ‘주인님, 날 좀 어떻게 해 주세요.’하듯 누렇게 변해가며 바닥에 드러 눕고 말았다. 엎친데덮친격으로 날마다 한두 방울씩 비 아닌 비가 내려 밭이 질척질척하여 들어가기가어렵게 되어 버렸다. 그러나 더 이상 미루다가는 애쓰게 심어 놓은 것들이 모두 썩어버릴 것 같았다.

 

 오늘 아침에도 부슬부슬 가랑비가 내리는데 밀짚모자를 눌러 쓰고 장화를 신고 용감하게 밭으로 나가 완두콩을 뽑기 시작했다. 땅이 질척거리니 완두콩을 뽑을 때마다 흙이 사정없이 내 얼굴과 안경에 그리고 옷에도 달라붙었다.

 큰 소쿠리 하나 가득 담아 부엌 쪽 데크에 부려 놓고 둘이 마주 앉아 꼬투리를 따기 시작했다. 주인이 게으른 탓에 말라 비틀어져 못쓰게 된 콩, 곰팡이가 피어 못 먹게 생긴 것들, 여태껏 뭐하느라 크지 못했는지 코딱지만한 녀석들, 성질 급하게 참지 못하고 콩 꼬투리를 열고 자유를 찾아 떠난 것들, 참으로 가지각색이었다. 그래도 충직하게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얌전히 있는 콩들이 많아 그나마 콩깍지를 까는 재미가 있었다.

 남편과 마주 앉아 콩 꼬투리를 까면서 ‘이 녀석은 욕심도 많네!’ ‘에고고 그동안 뭐 하느라 이렇게 작을까?’라며 깍지 속의 콩들에게 일일이 말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또 힘이 넘치는 녀석들은 꼬투리를 벌리자마자 톡 튀어 올라 바닥으로 데굴데굴 굴러 화단으로 떨어져 나간 녀석, 테이블 밑으로 기어 들어간 녀석, 계단으로 떼그루루 굴러간 녀석 등, 참 행동도이 빠르기도 했다. 농부가 게으름을 피우긴 했지만, 그래도 반짝반짝 윤기가 흐르는 완두콩이 제법 큰 소쿠리로  가득했다.

 봄에서 여름으로 막 넘어가는 이 시기에 딱 맞는 제철 농산물 중 하나인 완두콩을 동생들에게도 고루 나누어주어야겠다. 한동안은 쌀밥에 초록색 완두콩이 듬성듬성 들어간 밥으로 달아나기 쉬운 여름입맛을 잡으며 건강하게 여름을 맞이하면 좋겠다.  

                                                     (2019. 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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