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묘를 찾아

2019.07.24 20:15

김길남 조회 수:8

무명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묘를 찾아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김길남

 

 

 

 

 

  완산칠봉 끝자락에 있는 전주시립도서관에 갔다. 알아보고 싶은 내용을 너무 쉽게 찾고 바로 옆의 곤지산에 올랐다. 정상에 대접을 엎어 놓은 것 같은 둥그런 화강석 조형물이 있었다. 앞면에 사발통문이 안내되어 있어서 사발통문 모양임을 알았다. 그늘진 의자에 앉아 쉬었다.

 건너다보이는 투구봉에 무슨 새 건물이 보였다. 4월말 경에 철쭉꽃 구경 갔을 때 짓고 있던 건물이다. 무슨 건물일까 궁금했었다. 뒤에 전주시 홍보지를 보니 61일에 거기에서 무명 동학농민운동 지도자 유골을 봉안하는 행사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곳이 유골 봉안하는 건물임을 알았다. 행사에 참여하고 싶었으나 몹시 피곤하여 나가지 못해 서운했었다.

 오늘이라도 가보고 싶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그곳으로 갔다. 입구에는 아직 안내판도 없고 건물에는 현판도 없었다. 남자 직원이 있기에 유골을 봉안한 곳이 맞느냐하니 그렇다며 길을 안내해 주었다. 길을 따라 들어갔다. 손대면 열리는 자동문이다. 전시실에는 왼쪽에 동학혁명의 날짜별 역정이 적혀있었다. 반대편에는 폐정개혁 12개조항이 씌어 있었다. 원형으로 되어있어 돌아들어가니 마지막에 봉안한 묘가 나왔다. 모두 화강암으로 조성하고 묘도 대리석에 ‘무명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묘’라 새겨 덮었다. 모자를 벗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한 뒤 묵례를 올렸다. 속으로 ‘얼마나 큰 염원을 빌며 싸우셨습니까?’ 했다. 그리고 죄송하다고 했다. 1996년에 국내로 봉환했으나 모실 곳을 찾지 못하여 23년이나 전주역사박물관 수장고에서 기다리게 했기 때문이다.

 행사당일 신문기사를 찾아보니 1906년 진도에서 효수당한 분이라 한다. 일본인이 인종학 연구를 하려고 일본으로 옮겨 갔다한다. 그 뒤 행방을 모르다가 1995년 북해도대학 표본 창구에서 발견하여 알려졌다.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북해도대학과 합의하여 1996년에 국내로 모셔왔다. 모실 곳을 찾아 여러 곳을 물색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동학혁명의 중심이었던 전주에 모시게 되었다. 다행이라 생각한다.

 신원을 확인하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해서 영원히 모르게 되었다. 그 원인은 동학군에 참가한 분의 후손들이 후환이 두려워 성도 이름도 바꾸고 숨어버리고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 귀띔해줄 사람도 없다. DNA검사를 하면 알 수 있는데 후손이 나타나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요즘 사람들의 고조부쯤 되는 분들이니 너무 세월이 흘러 알 수 없는 일이다. 인골연구가의 도움으로 형상을 재현하여 흉상을 만들어 모신 것이 다행이다.

 이 동학농민군 지도자도 한 집안의 아들이고 남편이며 아버지였다. 당시 탐관오리들의 학정에 시달리다 못해 일어섰을 것이다. 농사를 지어도 너무 많은 세금에 식구들의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참다 참다 나서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투쟁하면서도 두고 온 가족이 눈에 아른거렸을 것이다. 가족들도 남편과 아버지를 얼마나 기다렸을까. 기다리다 지치고 나라의 감시 속에 편할 날이 없었을 것이다. 결국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한 많은 세상을 마쳤으니 그 원한이 얼마나 컸을까.

 

 외가가 금구면 대화리다 원평이나 금구에서 전주로 가는 길목이다. 어려서 들은 이야기인데 갑오년 난리에는 마루 밑에서 키만 둘러쓰고 구석에 숨으면 살았다고 했다. 민간인은 동학군이나 경군의 표적이 아니었음을 나타내는 에피소드인 것 같다. 우리 조상도 금구에서 살았는데 동학혁명 때 어떻게 넘겼는지 전해지는 이야기가 없어 궁금했다. 아마도 유학자들이어서 동학을 믿지 않았을 것이라 여겨진다. 만약 동학에 가담하여 사망했으면 나는 이 세상에 없을 것이라 생각하니 다행인 것 같다.

 동학혁명 당시에는 지배층이나 지식인은 동학군을 동적(東賊)이나 동비(東匪)이라 했다 한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고부에서 동학비적이 봉기했다 했고, 최익현은 황룡강 전투에서 사망한 경군장교 이학승 순의비에서 혹평했다. 안중근도 폭동이라 하고 토벌에 앞장섰다 한다. 평등사상과 민주사상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때라 그랬던 모양이다.  

 우리 역사를 뒤돌아보면 안타까운 일이 많다. 외침도 많았고 지배층의 폭정에 시달리면서 살았다. 세종대왕과 정조 시절에나 편하게 살았을까, 나머지는 어려운 삶을 살았다. 통일 신라 때도 한 때는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사이에서 시달리며 살았다. 그래도 위기마다 목숨 바쳐 싸우신 분들 덕택으로 우리 민족은 살아남았다. 나라와 겨레를 위해 희생한 애국선열이 그래서 존경스럽다. 동학 농민군도 폭정에 항거하여 싸운 애국자다. 보국안민(輔國安民) 제폭구민(除暴救民) 척양척왜(斥洋斥倭), 얼마나 좋은 구호인가?

 완산칠봉에서 곤지봉 쪽으로 내려오면 동학혁명 기념물이 많다. 성안의 관군과 완산칠봉의 동학농민군이 대적하여 싸운 곳이라 그럴 것이다. 중간에 동학혁명 기념비가 있고 철쭉꽃이 피는 투구봉에는 무명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묘가 있다. 차례로 참배를 하고 곤지봉에 이르면 사발통문 모형이 있으니 가 볼만 하다. 전주 사람이라면 한 번 찾아가 우리조상들이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어떻게 싸웠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2019.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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