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어느 날에

2019.09.21 05:45

김효순 조회 수:7

9월 어느 날에 

      신아문예대학 수요 수필반 김효순

 

 

 

 9월이다. 아침저녁으로 부는 바람결이 청량해졌다. 무더위에게 담금질 당하던 세상만물들이 환호성을 지르는 소리가 들린다. 무심하기만 한 세월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여름내 서슬이 퍼렇던 억새들의 목에서 힘이 살짝 빠지는가 싶더니 꽃을 피워내기 시작했다. 얼마 후면 그 하얀 꽃무리들은 은빛 물결로 반짝이면서 우리들에게 눈부신 가을을 선사할 것이다.

 한 달에 한 번씩 하는, 9월 골프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퇴직 후에 인연을 맺은 인생선배들과 운동을 하는 것이 주목적인 모임이기 때문에 그 동안에는 사적인 대화를 나눌 기회가 드물었다. 운동을 마친 뒤 식사가 끝나면 자리를 뜨기가 바빴는데, 어쩌다 보니 그날은 카페로 자리를 옮겨 긴 이야기를 나눴다. 아니, 오랜 인연을 이어온 사람들 속으로 편입한 막내 신입회원 격인 나는 주로 듣는 사람이었다.

 

 하나. 세정 언니 이야기

 세정 언니는 시내 번화가에 있는 번듯한 빌딩 주인이자 꽤 유명한 한복집 사장이다. 이 모임을 시작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나는 세정 언니의 화장하지 않은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동트기 전에 골프 연습장에서 만났을 때나 심지어 필드에 나가 골프게임을 끝내고나서 샤워장에서 나올 때도 언니는 고운 화장을 한 모습이었다. 수십 년 동안 많은 고객들을 응대해온 사람으로서 자기관리가 철저한 사업가의 면모가 엿보이는 부분이다.

 어느 날, 골프 연습장에서 언니와 거의 동년배인 남성 사이에 시비가 생겼는데 내가 보기에도 그 남성의 언행이 좀 부당하다 싶었다. 만약 나였다면 그 자리에서 벌컥 화를 내며 쏘아부쳤을 것이다. 아니면 속에서는 그를 볼 때마다 부글거려도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할 것이다.

 그런데 세정언니는 달랐다. 궁금했던 후일담을 들려주었다. 다음 날 그 사람을 조용히 불러서는 '내가 지난 밤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이러저러해서 화가 풀리지 않는다.'고 무겁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단다. 그랬더니 상대 얼굴이 발개지더니 ‘미안하다’고 하더란다. 그 뒤 언니는 그 사람에 대해서 예전과 같이 편안한 마음이 되었노라고 했다.

 그런 내공은 어디서 나오느냐는 나의 질문에 세정언니 대신 옆에 앉은 형순 언니가 대답했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세정언니는 매일 새벽 430분에 일어나 교회에 가서 새벽예배를 드린단다. 그 세월이 30년이 넘었다고 했다. 여행 가는 날만 빼고 날마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오늘처럼 6시에 골프 모임이 있는 날에도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온단다, 세정언니는 하루에 두 끼만 먹고 살아온 지 15년이 넘는다나? 저녁 모임이 있는 날에도 절대로 식사는 하지 않는다고 했다.

 

 둘. 형순 언니이야기

 형순 언니는 키가 훤칠하고 서글서글한 외모에다 성격까지 좋은 남편과 초원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산다. 시내 요지에 있는 5층짜리 빌딩 주인이기도 하다. 아들 셋은 모두 훌륭한 직장인으로 성장해서 결혼하고 손주들도 여러 명을 두었다.

 목소리가 크고 잘 웃는 형순 언니는 손도 크다. 골프 모임이 있는 날이면 귀한 음식을 많이 가져 오곤 했다. 웬 거냐고 묻는 우리에게 형순 언니는 자기 여동생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여느 공무원들처럼 가난한 신혼 시절에는 셋방살이부터 시작했는데, 그 때부터 시골에서 여학교를 막 졸업한 동생을 취업을 시켜서 한 집에서 데리고 살았다고 했다. 

  그 뿐 아니라 그 여동생을 결혼시켰고, 직장에 다니는 동생을 대신하여 그 자식들인 조카들까지 자기 손으로 키웠단다. 자기가 낳은 아들 셋과 동생의 아들 둘, 모두 다섯 명을. 지금이야 육아의 절반은 어린이집 선생님의 도움을 받는 시대지만 그때는 어린이집도 드물던 시절 아닌가? 그랬으니 동생은 지금도 시시때때로 언니와 형부를 극진히 챙긴다고 한다. 얼마나 힘들었느냐고 물으니,

 “나는 세상을 건성건성 살아. 어떤 안 좋은 일이 생겨도 5분 이상은 생각 안해.  그냥 나 편한 쪽으로 마음을 바꿔 먹어버리거든.”  

김치를 잘 담그는 형순 언니는 집에서 몇 백 포기씩 김장을 하고 후배가 김장하는 날이면 김장도우미로 출장을 나가기도 한다고 했다. 고스톱도 잘 치는 형순 언니는 이래저래 가만히 집에 앉아있을 새가 없단다. 누군가 나에게 종교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불교신자다.'라고 하자, 형순 언니가 반색을 하며 말했다. '! 나도 불교인데, 근데 나는 절에는 초파일에 한 번밖에 안 가.' 하면서 깔깔 웃었다. 

 

 하늘에서 꽃비가 쏟아져 내려도 각자 자기가 지닌 그릇 만큼만 받을 수 있다는 불경 한 구절이 화두가 되어 머리에 맴도는 날이었다. 과연 나는 어떤 그릇으로 살아 왔는가? 설마 그릇을 뒤집어 들고서 하늘의 꽃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2019.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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