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에서 감사하다 말할 수 있을까

2019.09.29 06:26

박제철 조회 수:9

죽음 앞에서 감사하다 말할 수 있을까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금요반 박제철

...

친구가 식도암과 투병한 지 3개월 만에 끝내 이승을 떠났다. 그가 나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내 나이 팔십까지 살았으니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지 모르겠다.”

병원에서 수술을 해보자고 했지만 주어진 남은 시간에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고 참회기도를 하며 생을 마감하고 싶다고 거절했다고도 한다. 집으로 돌아와서 투병생활 3개월 만에 그의 말대로 저승으로 떠났다.

불교 용어에 해탈(解脫)이란 말이 있다. 죽음과 삶의 갈림길에서 사랑하는 사람이나 물건 등에 대하여 지나치게 집착하는 애착(愛着), 만족하지 못하고 더 구하고자 집착하는 탐착(貪着), 원망하는데 집착하는 원착(怨着)을 모두 내려놓고 편안한 마음으로 이승의 모든 인연과 이별하는데 걸림이 없는 자유를 의미한다. 불교나 원불교를 신앙하는 많은 사람들은 진정한 해탈을 얻기 위하여 수도한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죽음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감사와 행복을 느낀다는 것은 어쩌면 해탈의 경지일지도 모른다.

나는 40대에 죽음과 삶의 갈림길에서 헤맨 적이 있다. 급성결핵에 걸렸었다. 체온이 40여 도를 오르내리는 고통 속에 헤매다가 어느 순간 마음이 편안해지며 지독한 고통 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영혼이 내 몸에서 빠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그때 나에게는 대학과 고등학교에 다니는 남매가 있었다. 내가 죽으면 저 어린것들과 아내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가족에 대한 애착이 저승으로 가려는 나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아직은 안 돼!”

가물거리는 정신을 챙기려고 안간힘을 해 보았다. 하지만 끝내 내 영혼은 내 육신을 병원 응급실 복도의 병상에 버려 둔 채 빠져나와 공중으로 떠올라 내 육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내는 내 육신을 흔들어대며 울부짖기도 했다. 동료직원은 “이러시면 안돼요.” 하면서 얼음주머니로 내 몸을 문지르기도 했다. 아내의 울부짖음과 동료의 얼음찜질, 가족에 대한 애착이 있어서인지 나는 저 세상으로 가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다 30여 분 후에 영혼이 다시 육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편안했던 내 영혼과 육신은 오간데 없고 아픔의 육신덩어리로 변했다. 저승의 문턱에는 가보지 못했지만 육신과 영혼이 분리되었다가 합하는 것만큼은 그때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육신만 있고 영혼이 없으면 죽은 시체요, 영혼만 있고 육신이 없으면 귀신이라고 한다. 육신과 영혼이 같이 있을어야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화를 본 기억도 있다. 교통사고로 죽은 한 남자의 영혼이 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애착 때문에 천국으로 떠나지 못하고 여자친구 주변을 맴돈다. 결국에는 무당의 힘을 빌려 산자와 죽은 자의 영혼이 만난다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의사의 사망확인이 있었음에도 깨어난 사람이 있는가하면, 미국의 어느 곳에서는 죽었다 살아난 아이들의 영혼이 바뀌었다 하여 큰 화제가 된 일도 있었다. 사람이 죽으면 3일장을 지내는 이유도 살아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들에는 애착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믿을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젊을 때는 애착이 필요할 때도 있다. 나도 가족에 대한 애착이 있었기에 저승의 문턱에서 돌아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제는 다 내려놓을 때다. 부처님 경전에는 애착(愛着), 탐착(貪着) 원착(怨着)을 내려놓지 못하면 죽어서 영혼이 새 몸을 받으러 떠나지 못하고 그 주변에서 맴돈다고 한다. 그러다가 그 집안에서 사람의 몸을 받지 못하면 그 집 가축으로 태어난다고 한다.

내가 직접 경험도 했고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화도 보았으며, 죽음에 감사해야 한다는 경전공부도 하고 있다. 마음으로는 모든 걸 내려놓자고 다짐하지만 실천하기가 어렵다. 내려놓는 연습을 얼마나 해야 저승사자가 찾아오면 반갑게 맞이할까? 어느 노(老) 철학자는, 외출할 때는 물론이고 집에 있을 때도 항상 몸을 깨끗이 하고 단정하게 하며 저승사자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한다. 죽음은 언제 올지 모르는데 남에게 추한 꼴을 보여서야 되겠느냐는 것이다. 40대 때는 할 일 많은 애착 때문에 저승으로 갈 수 없다며 돌아왔지만, 이제는 저승사자가 날 데리러 오면 억울하고 할 일이 많아서 못 간다고 할 수야 없지 않은가? 왜 이제 데리러 왔느냐고 호통 치는 날까지 살고 싶지만, 죽음을 앞두고도 감사하다고 말하며, 저승으로 간 친구의 영정 앞에 숙연해짐은 왜일까?

(2019.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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