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이야기

2019.09.29 09:39

변명옥 조회 수:19

소 이야기

신아문예 수필 금요반 변명옥

 

 

 

 

 

 “밥 먹고 바로 누우면 소 된다.

 할머니의 말씀을 듣고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중학교에서 집까지 6km도 넘게 걸어 와 눈이 실실 감겨도 소는 되지 말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앉아 버텼다. 소가 된다는 일은 생각만 해도 두려운 일이었다. 지푸라기나 풀, 콩깍지 같은 거친 음식과 하루 종일 쉬지도 못한 채 온갖 일에 끌려 다니고 산더미처럼 쌓인 무거운 수레를 끌어야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어쩌다 좁은 길에서 배가 불룩한 엄청나게 큰 소와 마주치면 주인이 고삐를 쥐고 있어도 무서워 얼어버렸다. 뒤룩뒤룩한 핏발이 선 큰 눈과 금방이라도 달려와 찌를 것 같은 휘어진 뾰족한 뿔, 육중한 네 다리는 소가 완전히 지나갈 때까지 길 바깥으로 비켜서서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내가 자란 곳이 소를 자주 볼 수 있는 농촌이 아니라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어른들은 소가 순하다고 했지만 외모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특히 눈이 무서웠다.

 

  처음으로 부임한 학교에서 3년쯤 지난 화창한 어느 봄날이었다. 일요일에 텅 빈 교무실을 지키기보다 연둣빛으로 빛나는 들길을 봄바람을 맞으며 살랑살랑 걸어보고 싶었다. 모내기할 논에서 ‘이랴! 이랴!’ 하는 농부들의 목소리도 활기차게 들리는 바쁜 농번기였다. 나는 멍하니 앉아 ‘무얼 할까?’ 하는데 현관에서 수상한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지?’ 하고 소리 나는 현관을 내다 본 순간  “어머낫!”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집채만큼 큰 소가 현관에 세워 둔 큰 거울을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순간 ‘저 소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날뛰면 아수라장이 되는데’ 하는 생각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현관 문 한쪽만 열어두었는데 저 큰 소가 어떻게 비집고 들어왔는지도 이해가 안됐다.

 ’아이구, 어쩌면 좋아?‘ 무서워 가까이 갈 수도 없고 소가 날뛸까봐 크게 소리칠 수도 없었다. 우선 도움을 청하려고 현관 뒷문으로 해서 운동장에 나가 이쪽저쪽을 향해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마치 양치기 소년처럼 절박하게 외쳤다. 마침 학교 옆 밭에 있던 아저씨가 달려오셨다.

  “소가, 소가 현관에 들어왔어요.

 급히 안으로 뛰어 간 아저씨는 자기소처럼 고삐를 잡고 나오셨다. 고맙다며 안도의 한숨을 쉬는 나에게 웃으며 한마디 하셨다.

“선생님, 소도 공부하고 싶어 들어간 것 같은데 글 좀 가르쳐 주시지 그러세요?

하며 끌고 갔다. 나는 소띠인데도 소만 보면 겁이 난다.

 

  농사를 지어야 먹고 사는 선조들의 생활에서 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물이었기 때문에 소에 대한 속담이나 이야기가 유독 많다. 이야기할머니 교재에도 ‘소가 된 스님’ ‘호랑이를 이긴 소’ ‘소가 된 게으름뱅이’ 이야기가 나온다. 밥 먹고 바로 누우면 소가 된다는 경계의 말은 ‘소가 된 게으름뱅이’와 비슷한 교훈이 들어있다. 일하기 싫어 게으름을 부리다가 소머리 탈을 쓰고 소가 되었다. 쉴 틈  없이 일을 하고 “난 사람입니다” 하고 울부짖어도 ‘음메! 음메!’ 소리만 나니 시끄럽다고 등짝이 얼얼하도록 얻어맞았다. 소머리 탈을 만든 할아버지가 무를 먹으면 죽는다고 한 말이 생각나 무를 먹었는데 소머리가 벗겨져 다시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서 게으름뱅이가 죽도록 일하게 되는 것은 자업자득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난 사람입니다’ 큰 소리로 외치는데도 소 울음소리로만 들렸다는 대목에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얼마나 답답하고 괴로웠을까? 육체적인 괴로움보다 마음의 고통이 더 컸을 것같다.

 ‘호랑이를 이긴 소’ 는 자기를 지극 정성으로 아껴준 주인이 호랑이에게 공격을 당하자 나무그늘에 있던 소가 호랑이를 뿔로 받아서 주인을 구했다. 집으로 돌아 온주인이 호랑이에게 물린 상처로 죽자 펄쩍펄쩍 뛰며 울부짖다가 3일 만에 주인을 따라 죽었다는 이야기다. 짐승이지만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소가 된 스님’은 잘 익은 벼를 흐뭇한 마음으로 만져보다가 손바닥에 떨어진 벼 낱알 세 톨을 먹고 삼년동안 농부의 소가 되어 일을 해 주고 다시 스님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다. 소에서 다시 스님으로 돌아오자 품삯은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쓰라고 하고 훌훌히 떠났다.

 

  황희 정승이 젊은 시절 논길을 가다가 소 두 마리로 밭을 갈고 있는 농부에게

  “어떤 소가 일을 더 잘하는가요?” 하고 묻자 일손을 놓고 황희 정승에게 다가와 귓속말로 “검정소가 일을 더 잘합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하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 이야기에서 선조들은 동물에 지나지 않는 소지만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생각할 수 있는 머리와 느끼는 마음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 순박한 농부의 마음가짐이 젊은 시절의 황희 정승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큰 일깨움을 주는 게 아닐까?

   

 지금도 경운기나 트랙터가 들어가지 못하는 오지에서는 소의 힘을 빌려 농사를 짓는다. 강원도 오지에서 소와 함께 늙은 할아버지가 듬성듬성 털이 빠진 소의 등을 어루만지며 “저도 늙고 나도 늙었어. 누가 먼저 갈지는 몰라.” 하며 친구에게 하듯이 중얼거렸다. 오랫동안 주인과 호흡을 맞춰 온 소는 마치 주인의 분신인 양 묵묵히 논과 밭을 간다. “이랴, 쩟쩟, 와 쩟쩟” 라고 외치는 주인의 명령에 따라 오른쪽 왼쪽으로 돌며 논밭을 간다. 풀을 뜯기고자 어린 주인이 고삐를 끌어도 ‘딸랑 딸랑’ 방울소리를 내며 따라가는 소의 모습은 순하고 순하다. 그런데도 겁 많은 나는  그 큰 덩치 때문인지 만나면 되도록 멀리 비켜선다.  ‘워낭’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소는 소의 평균 수명의 3배에 가까운 40년을 주인과 동고동락하다가 죽어 경북 봉화의 하늘마을에 묻혔다고 한다.

                                                                                          (2019.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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