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 아래서

2019.10.01 14:35

이희석 조회 수:4

은행나무 아래서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금요반 이희석

 

 

  가을빛이 짙어 간다. 이른 아침에 고향 집을 둘러보러 갔다. 토방에 걸터앉아 숨을 고르고 있자니 소슬한 바람이 낙엽을 굴리고 있다. 저만치 고샅길 은행나무는 잎이 샛노란래져 환하다. 바로 일어나 발걸음을 그쪽으로 옮겼다. 가까이 다가섰다. 노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실려 나풀나풀 떨어지고 있다.

   옷깃을 여미고. 고개를 들어 보니 잎을 떨구어 낸 가지들이 앙상하다. 스산하고 쓸쓸함이 오히려 우련한 멋으로 배어 나온다. 낙엽이 져서 선명해진 빈 가지는 그래서 더 애잔하다. 밑동을 만져 보니 쭈글쭈글하고 거칠다. 그동안 은행나무의 삶이 전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뙤약볕이 따가워도 한 걸음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동산 위로 솟아오른 아침 햇살이 나무 잎사귀들 사이로 찬란하게 비쳐들어 왔다. 황금빛 부채 모양의 은행잎들이 한 잎 두 잎 심심찮게 떨어지고 있다. 작은 은행잎 하나가 공중에서 휘돌다가 발밑에 떨어진다. 그 잎사귀를 집어 들었다. 노랗게 반짝이며 한 해의 삶을 마무리한 낙엽이 기특하고 고맙다. 이리 작은 걸 보니 너무 늦게 돋아난 잎일 것이다. 몇 날이나 나무에 달려 있었을까. 짧은 생을 마감한 잎이다.

  하지만 이 작은 은행잎의 삶은 아직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한 번 더 생의 기회를 줄 생각이다. 내 책 속에서 책갈피 역할을 다하며 두 번째 삶을 살게 해줄 요량이다. 사실 모든 생명체에게 삶은 단 한 번뿐이다. 어찌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오늘 내게 선택받은 은행잎의 첫 번째 삶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사는 자체의 삶이고, 두 번째 삶은 책갈피로 쓰인 후의 삶이지 않겠는가.

  은행잎 책갈피는 내게 아름다운 금빛 추억이다. 학창 시절, 시집(詩集) 갈피에 은행잎을 끼워 두고 이따금 꺼내 보았던 적이 있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 책갈피는 운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잎 책갈피보다 그다지 퇴색되지 않아서 좋았다. 그때 그 시절에는 구르몽의 시 ‘낙엽’을 어찌 그리 좋아했는지. 해마다 이맘때면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입안에서 맴돌곤 한다. 옛 정취는 사라졌지만 ‘낙엽’에 대한 나의 원초적 감정, 생태적 공감대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우리 집 은행나무는 해마다 가을이 깊어지면 동네 골목길에 연서를 썼다. 그 노란 연서를 사각사각 밟으며 걸을 적마다 나는 행복했었다. 은행잎 연서를 떠올리면 사춘기 시절처럼 가슴이 들썩거린다. 아직도 사춘기 시절의 풋사랑처럼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은행잎 편지는 오래도록 아름다운 연서였다.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다 보니 한나절이 다 갔다. 바람이 멎자 잎새 진 은행나무는 고요 속에 잠겨 있다. 머잖아 겨울잠을 잘 것이다. 겨울도 시나브로 사라지고 어느덧 봄이 곁으로 다가오리라. 그리고 녹색의 향연이 벌어지는 여름이 오고, 또 낙엽 지는 가을이 올 것이다. 한 해 내내 생명 활동으로 온 에너지를 쏟아내고 시나브로 마을을 환하게 밝힐 것이다.

  노란 잎을 떨구는 은행나무는 어느 시절에라도 생의 아름다운 희망이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바라보는 일. 그것은 가을에 내가 할 수 있는 희망 찾기다. 그리운 이에게 보낼 편지 속에 노란 은행잎 하나 넣어 보내고 싶다.

                                                                       (2019.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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