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반란

2019.10.05 05:56

정남숙 조회 수:53

책들의 반란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정남숙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다.’ 옛날 인심 좋던 시절 나돌던 말이다부엌도 없는 단칸방에서 신접살림을 꾸릴 때, 옷장이나 이불장 같은 가구보다 맨 먼저 우리 신혼 방에 입주한 것은 작은 책장이었다. 신학을 공부하며 유별나게 책을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윗목에 책상 하나를 놓고 그 위를 천장까지 닿을 수 있도록 만든 책꽂이 수준이었다. 아무렇게나 수북이 쌓여있는 남편의 책들에게 미안하고 귀한 책들이 천대받는 느낌이 들어서 책 먼저 제자리를 찾아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책장의 빈칸을 채우기 위해 더 많은 책들을 골라 채우고 있었다. 그러나 채우고 채워도 내 책장은 채워지지 않았다. 책 도둑 때문이었다. 우리형제들은 책들을 무척 좋아한다. 오빠나 동생이 한 번 다녀가면 2~3권은 물론 4~5권까지도 없어지고 만다. 내가 아끼고 귀하게 구입한 책들은 말없이 친정집 형제들의 서재에 얌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다시 집어오지도 못하고 쓰린 가슴만 안고 돌아온다.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다.’ 라는 말은 ‘배우고 싶고 알고 싶어 책을 보고 싶지만 돈이 없어 책을 훔치게 되었다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는 옛사람들의 훈계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형제들은 ‘내 것도 내 것, 네 것도 내 것’처럼 아무 양심의 가책이나 미안함도 없이 도둑이 아니라며 내 책들을 훔쳐갔다.    

 

 나는 어느 집을 방문하면 제일 먼저 바라보는 두 곳이 있다. 첫 번째로 대문을 열면 보이는 정원과, 거실에 자리 잡고 있는 서재부터 찾는다. 책장의 규모와 책의 양, 책의 종류까지 한 눈에 훑어본다. 우리 집에 있는 책이나 같은 분야의 서적이 눈에 띄면 괜히 친근감이 솟구친다. 책을 읽는 집과 전시용으로 장식해 놓은 것을 쉽게 구별할 수가 있다. 하긴 나의 서재도 별반 다르지 않다. 처음에는 필요하여 구입했지만 시간이 쌓인 만큼 책도 쌓여 제일 곤란 한 것은 책의 수납이다. 책장이 넘치도록 갖고 싶은 책을 사놓고 읽지 않은 것에 죄스러움도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에 드는 책은 또 구입한다. 원래 책은 ‘사놓은 것 중에서 읽는 거다’라는 친구의 말에 위안을 받으며 설령 사놓고 못 읽었더라도 언젠가는 읽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과 책장에 꽂혀있는 목차만 훑어봐도 내가 무엇에 관심을 가졌는지 내 생각의 반향을 되돌아보기도 한다.  

 

 우리 집에 찾아오는 친구 중에는 필요한 책은 한두 권 사서 읽으면 됐지 왜 이렇게 자꾸 사서 쌓아놓느냐고 한다. 비용도 공간도 낭비라고 한다. 다 읽지도 못할 책을 사 놓는 것은 허영이라며 조롱 섞인 농담도 한다. 하지만 나는 사실 소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생각과 기억에 도움이 될 때가 있다. 그래서 옛 선비들의 사랑방에 책장에 책을 꽂아 보유하고 있는 장서를 자랑하고 있는 그림을 볼 때는 더욱 정감이 간다. 옛날에 특별히 전라도 양반들은 일찍부터 서로 시샘하듯 책 모으기가 유행했다고 한다. 새재에 가득 채워진 책은 장르불문으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모아놓았다고 한다. 이 소문이 중국에까지 퍼져 중국 사람들은 자기나라에서 구하기 어려운 책을 전주 양반집에 가면 구할 수 있다는 말까지 있어 실제로 자기나라 책을 전주 양반 댁에서 구해 갔다는 일화가 있다. 이 말은 내가 가끔 관광객들에게 들려주는 완판본 스토리텔링으로 사용하기도 하는 말이다.

 

  국립전주박물관  역사실에는 책거리로 가장 유명하다는 궁중화원 이형록(1808~1871이후)의 책가도(冊架圖)가 전시되어 있다. 옛 양반들이 얼마나 책을 아끼고 가까이 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직접 책을 서가에 꽂아 놓기도 했지만 서가를 그림으로 그려 장식하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책가도는 우리말로 ‘책거리(冊巨里)’라고도 한다. 조선후기에 문()을 중시하는 정조의 문치정치의 표상과 같은 그림이다. 정조임금의 구상에 의해 화원이 제작한 것이 시초라 한다. 정조는 궁중 화원들에게 ‘책가(冊架)’와 ‘책거리(冊巨里)’를 그리게 했으며, 집무실인 창덕궁 선정전의 어좌 뒤에 ‘일월오봉도’ 대신 ‘책가도’ 병풍을 장식하고 만족해했다는 일화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전해져 오고 있다. 조선의 선비는 책과 글을 통해 자신을 닦고 나라에 이바지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책거리는 이러한 조선 선비의 취향을 잘 반영한 그림이었다. 책거리에는 책을 비롯 도자기, 청동기, 옥 등 귀한 기물들을 나열한 그림까지 포함하기 때문에 책거리가 책가도보다 상위 개념이라 한다.

 

  40여 년 동안 집 평수가 늘어난 만큼 우리 집 서재의 책들도 늘어나고 있었다. 네 방 중, 중간 방 3면을 가득 채우고도 남는다. 귀향을 계획하고 이삿짐을 싸려니 책들이 제일 골칫거리였다. 분량도 많고 무게는 2톤 트럭으로도 모자란다고 한다. 너무 많아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버리기도 아까워 기증할 곳을 찾았으나 선뜻 보낼 곳이 없었다. 이제는 다시 책과의 인연을 쌓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사전(辭典)류 만 몇 권 챙기고 몽땅 문화원으로 떠나보내고 내려왔다. 시원섭섭했다. 고향으로 돌아와 작은 평수의 아파트생활을 시작하게 되니 우리의 살림살이는 친정집 별채 신세를 지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서재의 꿈은 잊고 있었다. 서재를 만들 것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책에 대한 애착도 식어가고 있을 즈음 시간이 흐르니 또다시 책들이 한 권 두 권 모여 온 집안에 책 천지를 이루고 있다.

 

 어느 추석날, 아들 며느리가 나에게 손자손녀들을 데리고 시내구경을 하고 오라 한다. 영문도 모르고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시골 친정집으로 갔다. 손자손녀들은 강아지와 닭들과 어울려 노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저녁까지 해결하고 늦은 저녁에 집에 돌아오니 온 집안은 난리였다. 나를 내보내고 작은 방 하나를 치운 것이다. 무엇을 버렸는지도 모른다. 없어진 것은 찾지도 말라고 했다. 다음날 아침 책장이 두 개 들어와 한 면을 차지하고 있다. 아이들이 내 서재를 만들어 준 것이다. 그동안 모아놓은 책을 장르와 동인지별로 순서대로 꽂아놓으니 아직은 넉넉하다. 이왕 새로 서재를 만들고 보니, 책가도처럼 꾸며보고 싶었다. 서가 모양의 격자 구획 안에 책과 향로, 문방구를 비롯하여 선비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도자기, 화분, 부채, 더 나아가 술병, 담뱃대, 악기까지 다양한 소품들이 등장하는 책가도의 서재는, 그 기원은 분명하지 않으나, 18세기 후반에 이미 널리 유행하고 있었다고 한다.

 

 책가도의 민화처럼 그림을 따라 장식을 해봤다. 그동안 예쁜 도자기나 여러 가지 소품들이 있었지만 둘만한 곳을 찾지 못하여 포장지도 벗지 못한 채 꽁꽁 묻혀 있었던 것들이 저마다 자태를 뽐내며 자리를 잡았다. 책을 듬성듬성 꽂아놓고 중간 중간 소품으로 장식을 해 보았다. 막내 동생이 인도네시아 전통공예라며 가져온 니켈제품 날개달린 병사 한 쌍과 은잔 세트, 알코올램프와 각종 태극선, 작은 도자기 세트와 솟대들도 제자리를 찾았다. 그동안 예쁜 찻잔도자기와 여러 가지 소품들이 있었지만 둘만한 곳을 찾지 못하여 포장지도 벗지 못한 채 꽁꽁 묻혀 있었던 것들이 저마다 자태를 뽐내며 자리를 잡았다. 멋져 보였다. 서재를 만들어준 아들 내외가 고마웠다. 일부러 아침저녁 드나들 때마다 서재 방문을 열어보며 작은 기쁨을 맛보고 있다.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어 서재방문은 언제나 활짝 열어두고 있다.

                                                                                          (2019.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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