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동네 한 바퀴

2019.10.06 09:30

최상섭 조회 수:52

고향동네 한바퀴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금요반 최 상 섭

 

 

 

 

 

 

  내가 태어난 곳은 지금 지평선 축제가 한창인 전라북도 김제시 신덕동 105번지로 김제벽골제(金堤碧骨堤) 인근마을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께서는 350여 평의 대지를 매입하시고 이듬해 당시 90kg 100짝을 주고 4칸 겹집을 지었다. 부안 변산에서 아름드리 소나무를 벌채하여 4각 기둥으로 만들어 집을 신축했다. 동네에서 가장 잘 지어진 집으로 비교적 환경이 좋은 집이었다. 대청마루가 있어서 여름에는 시원했고 겨울에는 따뜻한 온돌방에서 생활하며 어린시절을 보냈다. 신기(新基)라는 이름의 마을로 우리말로 새터라 불렀다. 또 다른 이름으로는 개에 다리를 놓은 동네라 하여 갯다리(전라북도 김제시 월촌동과 부량면 용성리의 경계를 이루는 원평천에 놓인 다리)라 부르기도 했다. 그 집이 지금도 생활하기 편하다. 그래서 어머니는 바로 밑 동생에게 그 집을 물려주셨으나 현재는 기거하지 않고 집이 비어 있어 아쉽다. 나는 자주 들러 그 집을 둘러보곤 한다.

  신털미산()은 집 앞으로 흐르는 동진강 하류의 하천과 원평천을 넘어 800m의 직선거리에 있다. 그 신털미산에는 벽골제 중수비가 있었던 것을 지금의 김제벽골제 한 곳에 비각을 만들어 사적비(사적 111)로 옮기어 노역의 역사에 대한 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동네가 벽골제 인근에 있다.

 

  김제벽골제(金堤碧骨堤)는 조선조 태종 때 중수되었는데 둘레가 큰 저수지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벽골제의 축조 연대가 330(백제 비류왕 27)으로 기록되어 있다. 330년에 김제에 벽골제를 쌓았고, 벽골제 비는 1415(태종 15)에 벽골제 제방을 수리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것인데, 비문이 마멸되어 1684(숙종 10)에 다시 만들어 신털미산 정상에 세웠다. 소년 시절에 자주 올라가 놀았던 신털미산의 벽골제 비는 다소 불편하기는 해도 비문의 내용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풍화로 식별할 수 없는 비문이 되었고, 다행히『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비문의 내용이 전한다.

 

  신털미산의 유래는 조선 태종 때 전국의 장정들을 동원하여 벽골제방(碧骨堤防)을 더 높이 쌓아 크게 보수하였는데 이때는 짚신을 신고 생활하던 때였다. 비가 오면 갯벌이기에 집신에 흙이 많이 묻어 짚신의 흙을 이곳에 털었더니 산이 되었고, 신을 털었다 하여 신털미산(둘레가 약 500m. 높이 약 70m)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신털미산은 사실은 여기저기 흩어진 짚신이 보기 싫어 이곳에 모아 산이 되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소년시절에는 이곳이 낮에는 독서하는 야외 도서관이었고, 밤에는 데이트 코스로 각광을 받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까칠한 산만 남아서 앙상하다. 김지시 부량면 용성리 포교 마을(60여 호 거주)이 김제시의 벽골제 축제행사시 주차장으로 사용하고자 마을사람들을 전부 이주시켜 동네가 없어져버렸다. 당연히 이곳에 살던 친인척들이 다른 곳으로 이사해서 고향의 넓은 들엔 신털미산만 홀로 남아 쓸쓸함을 더해 준다. 차를 세우고 신털미산을 둘러보았으나 인적이 끊겨 산새소리도 들리지 않는 산이 되어 버렸다.

 

  김제벽골제 저수지는 우리나라 3대저수지(의림저수지. 제천저수지)의 한 곳으로 가장 광대하고 가장 오래전에 축조되었던 저수지이며 물을 가두어 두었다가 필요시 수문을 열어 과학적 영농을 한 곳이다. 이곳의 지형은 전주의 완산칠봉에서 서쪽으로 갈라져 나온 산자락이 낮은 언덕을 이루면서 김제시 금구면, 용지면, 교동, 월촌동을 지나 포교의 신털미산(草鞋山)에 이르러 멈추고, 상두산에서 뻗어 나온 또 하나의 줄기는 김제시 금산면, 정읍시 옹동면, 감곡면을 거쳐 김제시 부량면 명금산(조선의 천재 과학자 정평구의 묘가 있는 산)에 이르러 멈춘다. 이 두 줄기 사이의 가장 좁은 평원에 저수지의 제방을 쌓았다.

 

  현재의 김제벽골제는 길이 2,500m의 제방과 2개의 수문인 장생거(長生渠)와 경장거(經藏渠)만이 남아 있다. 김제벽골제에 있는 수문은 용골부락에서 옯겨 온 장생거이다. 또한 현재의 제방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 동진수리조합에서 둑의 가운데를 파서 농지 관개용 간선 수로로 개조해 놓은 상태이다. 벽골제방은『삼국사기』의 기록으로는 약 3,245m,『태종실록(太宗實錄)』의 기록으로는 약 3,362m로 기록되어있다. 1975년 벽골제 발굴 작업을 하면서 제방의 길이를 실측한 결과 약 3,300m가 나왔으니 문헌의 기록과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벽골제 비의 크기는 높이 1.95m, 1.05m, 두께 0.13m이다.

 

  김제시에서는 현재의 김제벽골제에서부터 벽골제의 원형을 복원하여 유네스코 문화재로 등재하기 위해 흰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남아 있는 바로 아래 용골마을도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김제벽골제라는 이름으로 지평선 축제가 열리는 현 위치에는 우리 논이 두 필지(2,400)가 있었다. 이곳은 모래가 섞인 토지라서 농사가 잘 안되어 아버지께서는 논을 팔고 아래지역인 용골부락 인근에서 논을 샀다. 새로 산 논은 농사는 잘되었으나 논을 팔고나서 2-3년 뒤 현 위치에 김제벽골제가 건립되어 아쉬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유소년 시절의 내 고향인 김제벽골제를 고희를 넘기고서 한 바퀴 둘러보는 나는 새삼스런 감회에 젖는다. 우리 논이 있던 자리 옆에 벽골제를 본떠 상당히 큰 호수를 만들어 놓았고, 뱃놀이를 할 수 있는 시설이 되어 있었으나 전시용이어서, 주민이나 관광객이 사용할 수는 없었다. 1억을 들여 만들었다는 대형 용의 조형물이 낡아 작년 3천만 원을 들여 보수했다고 하나, 지금도 이곳저곳이 부서져 있다. 어릴 때 보았던 되배미논(승답 升畓)은 없어진지 오래다. 벽골제방의 보수 시 당시는 숫자를 세는 문화가 발달되지 아니하여 동원된 장정들을 지게를 지고 이곳에 가득 채우면 500명이 되었다. 이렇게 모인 장정들에게 작업배치를 했다고 한다. 김제벽골제 행사장을 축조하면서 되배미논을 실제 측량해 보니 618평이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되배미논은 당시 작업인부를 파악하는 중요한 수치의 논이었고, 그 수가 정확했다고 한다.

 

  이웃집에 하지감자 한 바가지를 가져다주면서 “물짠 놈이어라오.” 라고 한다. 여기서 '물짠 놈'이란 말이 벽골제 제방 축조 시 생겨난 말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전국에서 동원된 장정 중에는 장보고의 유민인 장정들도 있었다. 이 사람들은 노를 젖는 일인 물만 젓다 와서 요즈음 말하는 지게를 지고 하는 땅떼기를 할지 몰랐다. 감독하는 중간 팀장인 십장이 큰소리로 나무라면 옆에 있는 사람이 “물젖는 놈”입니다. 라고 한 말이 '물짠 놈'으로 변형된 말이라고 한다. 즉 일을 못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세월이 흘러 '물짠 놈'이 되었고, 이 말은 좋지 않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원평천이 지나가는 곳은 강폭이 300m가 넘는 곳도 있었다. 이 원평천은 논의 물을 빼서 서해바다로 흘러 보내는 큰 하천이다. 그런데 원평천에는 돌간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물속의 강바닥이 돌로 되어 있고 시멘트 바닥처럼 단단한 이곳저곳에 큰 웅덩이가 자연적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지금의 9-10월이면 김제시 죽산면 해창의 수문을 열어 물을 바다로 흘려보내고 원평천에는 1/3의 물만 낮게 흘러간다. 우리 동네에는 집집마다 잉어를 잡는 그물코가 넓은 드믄 장 그물과 붕어나 작은 물고기를 잡는 뵌 장 그물이 한 채씩 다 있었다. 학창시절 동생을 데리고 이 돌간에 가서 투망으로 큰 잉어를 잡은 기억이 있다. 반바지를 입고 미리 그물을 물에 적시어 팔에 사르고 물소리를 내지 않고 가만가만히 웅덩이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여 한 번에 물속의 숨겨진 웅덩이를 싸도록 그물을 던져야 한다. 잉어는 깊은 물속과 바닥이 견고한 곳을 좋아하는 습성이 있다. 이때 웅덩이 속에 제대로 그물을 던져 그물 속에 잉어가 같이게 되면 성질이 급한 잉어는 위로 높이 솟는다. 그러면 동생을 불러 그물 줄을 주고 헤엄을 쳐서 들어가 잉어와 그물과 함께 싸서 들고 나와야 한다. 그냥 그물 줄을 잡아당기면 힘센 잉어가 그물추 밑을 차고 나가버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큰 잉어를 한 번에 두 마리 혹은 몇 마리를 잡으면 이때의 기분은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그 돌간에 가 보았으나 지금은 물이 귀해 빼지를 않고 원평천에 가득 차 있고, 물이 오염되어 고기를 잡아도 냄새가 나 먹을 수 없다.

 

  내가 살던 동네는 전국에서 농사짓기가 가장 편리하고 인심 좋은 47호의 대부분이 평산신씨(申氏)들인데, 마을이 생성될 때는 평산신씨의 집성촌이었다. 내 외가도 평산신씨 일문이다. 우리 동네 뒤 해송 밭 넘어 벽골제의 무너미 자리가 있었으나 지금은 농토로 바뀌어 흔적만 남아있다. 새삼 김제벽골제가 있던 인근 새터마을에서 멱 감고 물장구치며 살았던 나는 여러 가지 추억과 함께 잊을 수 없는 고향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면서 지난날의 아릿한 추억을 회상했다. 세월은 흘러갔어도 내 꿈을 키우며 자라온 고향은 아직도 포근하기만 했다.                                                      (2019. 10.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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