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회초리를 맞는 날

2019.10.08 17:32

김학 조회 수: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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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회초리를 맞는 날
김 학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8월이 가슴을 활짝 열어젖힌 1일 새벽, 시외전화 한 통을 받았다. 텁텁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신동우 선배의 목소리였다. 그 선배의 전화를 받고서야 오늘이 8월 초하룻날임을 알았다. 지난 7월 초하룻날 전화를 받고 한 달 만에 다시 신 선배의 전화를 받은 것이다.
신동우 선배는 군산서해방송에서 함께 근무했던 직장동료이자 인생 선배다.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 방송국이란 생소한 직장으로 옮겨 어려움을 많이 겪었던 분이다. 막걸리를 즐겼고, 목소리가 우렁차서 술 한 잔 마셨다 하면 좌중을 압도하는 분이었다. 10여 년간 같은 방송국에서 일하다가 1980년 방송통폐합으로 헤어졌다. 그러다 20여 년의 세월이 흐르고 나서 가까스로 연락이 닿은 분이다.
신동우 선배를 생각하면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그 당시 텔레비전에도 자주 나왔던 인기 만화가 이름이 바로 신동우였다. 그래서 신동우 선배의 이름은 더 잊히지 않는다. 그 선배가 성우를 하고 싶다고 하여 라디오 광고 스파트를 만들 때 ‘야호!’를 해 보라고 했었다. 그때는 새벽에 뒷동산에 오르면 남녀노소 누구나 흔히 내지르던 소리가 ‘야호!’였다. 어린이를 가르치던 점잖은 선생님이 스튜디오 안에서 ‘야호!’를 외치려니 어찌 성우처럼 능란하게 제대로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 일이 있고나서 신동우 선배는 ‘야호 선생’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었다.
지난 달 초하룻날 전화를 받았더니 자기는 매달 초하룻날이 감사의 날이라는 것이다. 매월 초하룻날이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은혜를 입은 분이나 평소 존경하는 분에게 꼭 감사의 전화를 한다는 것이었다. 보금자리를 서울로 옮긴 뒤부터 10여 년간 계속해온 일이란다. 자주 만나는 사람을 제외하니 지금은 그 전화대상이 열다섯 분쯤 되는데 그 중 네 분은 벌써 하늘나라로 가셔서 그 대신 유가족들과 안부전화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멋진 착상이 아닐 수 없다.
왜 나에게 전화를 했느냐고 물었더니, 내 도움으로 수필집도 내고 수필가로 등단까지 했는데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느냐며 너털웃음을 웃었다. 신동우 선배의 말씀대로라면 나는 앞으로 매달 초하룻날이면 신 선배의 전화를 받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지난봄 어느 날, 서해방송에서 편성국장으로 모셨던 임선기 선배의 전화를 받았다. 신동우 선생이 자서전을 출판하려고 하는데 잘 아는 출판사가 있으면 소개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대한문학사 정주환 교수를 소개해 주었고, 그런 뒤에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초여름 어느 날, 수필집 한 권이 우송되었다. 흔히 있는 일상적인 일이라 또 누군가가 수필집을 출간하여 보내준 것이려니 여겼다. 그러다 자세히 보니 신동우 선배의 수필집이었다. 《들꽃은 외롭지 않다》, 제목도 멋지게 뽑았구나 싶었다. 나는 깜짝 놀랐고 무척이나 반가웠다. 닥치는 대로 몇 편 읽어 보았다. 수록된 수필작품들이 아주 괜찮았다. 이렇게 좋은 작품을 쓰리라곤 예상하지 못했었다. 군산사범학교 출신이고 교육자의 길을 걸었기에 글을 쓸 수 있으려니 여겼지만 이렇게 글 솜씨가 좋을 줄은 몰랐다. 더구나 신 선배의 연세가 70대 후반이 아닌가?
며칠 뒤 종합문예지 대한문학 2009년 여름호가 배달되었다. 신인상 수상자의 사진대열 속에 수염이 하얀 신동우 선배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그 선배의 등단작품이 소개된 178쪽을 펼쳐 보았다. 프로필을 보니 틀림없이 내가 잘 아는 신동우 선배였다. 신동우 선배는 일흔여덟 살에 드디어 수필가로 등단하여 문학 소년의 꿈을 이룬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대한문학 발행인 정주환 교수가 수필집을 만들면서 작품을 읽어 보고 수필이 좋아서 등단을 시켰다고 했다. 인연이란 이렇게 예상치 않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앞으로 매달 초하룻날이면 신동우 선배는 어김없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 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날이 두렵다. 신 선배의 전화를 받는 매달 초하룻날은 내가 마음의 회초리를 맞는 날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은혜를 입은 분들이 어찌 한두 분일 것이며, 나에게도 존경하는 분들이 어찌 없을 것인가? 이제는 또 집안의 어르신들도 몇 분 생존해 계시지 않는다. 날마다 문안전화를 드려야 할 처지다. 그런데 편리한 핸드폰까지 갖고 있으면서도 지금까지 무심히 넘겼다. 마침내 신 선배 때문에 나는 잊고 살아온 사람의 도리를 깨닫게 되었다. 늦게라도 내가 신동우 선배를 만난 것은 다행한 일이다. 신동우 선배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깨달음도 얻지 못하고 내가 이승을 떠났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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