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처럼 스쳐간 인연

2019.10.22 22:38

소종숙 조회 수:19

바람처럼 스쳐간 인연

 안골은빛수필문학회 소종숙

 

 

 

 

 

                                                                         

  바람처럼 스쳐간 인연을 떠올리며 작은 행복감에 젖는다. 60대로 보이는 여인이 발목에 기브스를 한 채 병실에 들어서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간호사가 안내해준 병실은 6인실. 교통사고로 인해 얼마나 머물게 될 지 몰라도 여장을 풀고 침대에 몸을 눕혔다. 마침 다른 환자들이 퇴원을 하여 둘이만 있게 되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했는데 같은 병실에 둘이만 있게 되었으니 참으로 인연인 것 같았다 그녀는 자그마한 키에 얼굴은 온화한 표정이었다. 여인이 나에게 시선을 보내며 말을 건넸다. 그녀는 보호자로 있던 남편을 집으로 보낸 뒤 남편자랑을 시작했다.

   남편은 정크아트작가 B씨였다. 스마트폰을 열어 보여주는데, 버려진 폐품을 이용하여 만든 예술작품이었다 <대한민국 환경사랑 공모전. 환경부장관상>과 상금은 일천만원이나 받은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전북에 이렇게 훌륭한 작가가 있구나 싶어 가슴이 뿌듯했고, 그 여인이 남편을 자랑할만 하다고 생각했다.

  남편의 인상이 퍽 밝아 보였다. 두 사람은 미술대학을 나와 남편은 정크아트 작품을 만들고, 그녀는 의상을 만들기 좋아하는 소질을 취미로 삶아 자기 옷을 만들어 입고, 남편 옷과 가족들의 옷을 만들어 선물하면 무척 좋아한다고 했다. 평상복을 만들어 병원에 입고 온 모자달린 옷을 보여주는데 간편하고 귀여워 보였다.

  그 여자의 이야길 듣노라면 언제 시간이 흐르는지 모르게 흘려갔다. 음식 만드는 이야기며. 남편과 각방을 쓰면서 처음에는 좀 외로웠는데 지내다 보니 새로운 만남을 느낀다고 했다. 자기는 옷을 만드니 심심하거나 외롭지 않고, 남편은 작품 만드는 일에만 몰두하는데 방해 받지 않아 서로가 좋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얻어 재미있는 강의를 듣는 것 같았다.  

  그 여인이 옷을 만들면서 즐거워하듯이, 나는 독서를 좋아한다고 했다. 때로는 자연 속 숲길을 배회하며 사색하는 것이 나만의 고독한 즐거움이며, 때로는 호미를 들고 밭으로 가서 작물이 자라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우리는 오래 전에 알고 지낸 사이처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여인도 선친께서 남겨놓은 땅에 콩과 팥을 심으러 정읍에 가는 날이면 온가족이 함께 소풍가는 것처럼 마음이 기쁘다고 했다. 그러면서 손수 심어 거둔 농작물로 만든 팥주머니를 보여주었다. 나는 그 팥주머니를 보는 순간 나이답지 않게 어린아이처럼 호기심이 서려 만들고 싶은 충동과, 새로운 정보를 얻는 것 같았다. 어떻게 팥주머니를 만들 생각을 했느냐며 감탄했다. 그녀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라고 했다. 나는 그 여인의 재치를 칭찬하며, 머릿속에서 팥주머니를 만들 상상에 젖었다. 내가 지닌 주머니는 허부씨주머니인데 온기가 오래가지 않았다. 여인이 팥주머니를 230초 동안 렌지에 돌려다 침대에 누워있는 내 허리에 넣어주었다. 몸이 훈훈하고 팥의 향긋한 냄새와 그 따뜻함이 차가운 병실 침대가 온돌처럼 느껴졌다. 교통사고로 다친 몸을 치료하기에 좋은 기구를 얻은 것 같았다. 천연팩이라 그런지 온기가 오래 갔다.

 

  수십 년 전, 유년의 추억이 떠오른다. 머리가 아플 때 어머니는 으레 이마를 짚어보시고는 팥주머니를 이마에 올려 주셨다. 옛부터 팥은 액운을 끊는다 하여 혼례상. 돌잔치에도 ‘팥떡'을 했고 재앙을 물리치는 액땜을 한다는 뜻으로 이사 가면 ‘팥죽'을 끓였다. 동짓날을 정하여 ‘팥죽'을 끓여먹는 풍습이 예부터 내려오고 있다.

    혈액순환과 이뇨작용에도 좋다하여 쓰이는 팥을 이용하여 ‘팥주머니’를 만든 그녀의 재주가 참 놀라웠다. 그 여인은 발목이 좀 나았는지  팥주머니를 데워다가 몇 번이나 내 품에 안겨주었다. 나는 그녀의 친절을 마음속으로 고마워하며 우린 서로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교환했다. 그렇게 온정을 베풀고 그녀는 병실을 떠났다. 나는 떠나는 그 여인의 뒷모습을 한참동안이나 바라 보았다. 잠시나마 함께했던 그녀가 머물다 떠난 자리를 바라보니 왠지 횅하고 쓸쓸했다. 그 여인이 내게 베풀었던 행동이 뇌리에서 떠나지가 않았다. '어서 퇴원해서 팥 주머니를 만들어야지.' 머릿속은 ‘팥주머니'에 대한 상상에 잠겼다.

   퇴원날 만을 기다리며 창밖을 내다보니 봄은 어느 사이 성큼 다가왔는지 자기의 임무를 다하려는 듯찾아와 벚꽃이 꽃망울을 터트리며 만면에 웃음을 띄고 있었다.

  마침내 퇴원하여 ‘팥주머니'를 만들었다. 원단을 면천으로 하여 가로 40센지. 세로 52센지로 사각주머니를 두 개 만들었다. 팥은 약한 불에 살짝 볶았다. (혹시 벌레가 있을 수 있으니까) 두 겹으로 만든 팥주머니를 렌지에 230초 동안 돌려 통증이 오는 곳에 얹어 놓으며 사용하고 있다.

  팥의 고향은 동양이 원산지로서 한자로는 소두, 적두, 홍두라 한다. 팥음식을 섭취했을 땐 피로회복과 어혈, 부종을 제거해주는 효능이 있다 한다. 또한 따뜻한 팥주머니를 하복부에 올려놓으면 생리통이나 난소질환에 효과적이며, 여행을 떠날 때도 ‘팥주머니'를 여행가방에 넣어가지고 가서 렌지에 돌려 사용하면 상비적인 찜질팩 역할을 할 것이다.

  어느덧 가을이 왔는지, 들녘의 여백을 가득 메운 벼들이 머리를 숙이고 있다. 호수 같이 맑은 가을하늘은 하얀 구름이 변화하며 요술을 부리며 떠가고, 밤에는 온 들녘이 별밭으로 변한다.

   밭에 심어놓은 소국이 다사로운 미소로 가을햇살 아래 쓸쓸함이 깃든 보랏빛 얼굴로 환하게 웃는다. 둔덕에는 하얗게 핀 억새꽃이 이별이 아쉬운 듯 지나가는 길손에게 손짓을 한다.

  따뜻한 기운이 그리워지는 계절,  ‘팥주머니'가 요술을 피우며 허리, 어깨, 무릎, 여기 저기 옮겨 다니며 통증을 사그라지게 한다. 이젠 내겐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품이 되어버린 팥주머니 속에서 그녀의 얼굴이 맴돈다.

  대부분 인간관계는 상호적인데 그녀는 부매랑처럼 네게서 자기에게 돌아갈 보상이 없는데도 나에게 무한한 친절을 베풀어주고 헤어졌다. 내게도 누군가에게 친절을 돌려주라는 신()이 내리는 무언의 명령일까? 미국의 소설가, 헨리제임스는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인지 고민하다가 답을 구하는 편지를 받고, 인생에는 중요한 것이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다. 첫째, 둘째, 셋째도 친절할 것을 작가는 답으로 보냈다. 아마도 마음의 문을 여는 친절을 베풀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뜻인 것 같다.  

 

  나는 오늘도 팥주머니를 바라보며 바람처럼 스쳐간 여인과의 인연을 머리에 떠올리며 고마움을 느끼고 행복감에 젖는다.

 

                                                                     (2019.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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