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감은 당신과 가까운 곳에 있다

2019.10.25 13:00

송준호 조회 수:9

글감은 당신과 가까운 곳에 있다

송준호

 

 

 

 

 

목련꽃 목련꽃 / 예쁘단대도 / 시방 / 우리 선혜 앞가슴에 벙그는 / 목련송이만할까 / 고 가시내 / 내 볼까봐 기겁을 해도 / 빨랫줄에 널린 니 브라자 보면 / 내 다 알지 / 목련꽃 두 송이처럼이나 / 눈부신 / 하냥 눈부신 / 저…(복효근, 〈목련꽃 브라자〉 전문)

 사춘기로 접어든 딸아이의 신체 변화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아비의 눈길이 참으로 정겹다. 아비는 어느날 마당의 빨랫줄에 걸린 딸아이의 '브라자'를 발견하고 그 아이의 '앞가슴에 벙그는 목련송이'를 연상한다. 읽는 이의 마음까지 훈훈하게 덥혀주는 예쁘고 '하냥 눈부신' 한 편의 시는 거기, 그렇게 가까운 마당의 빨랫줄과 그보다 더 가까운 시인의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글감은 이 시인처럼 자신과 가까운 곳에서 찾는 것이 가장 좋다. 모든 글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쓰는 것인데,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일수록 그런 체험을 생생하게 되살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 체험

 아는 건 쉽고 모르는 건 뭐든 어렵다. 이건 불변의 진리다. 평생 술을 입에 대본 적도 없는 사람이 술꾼들의 애끓는 심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글을 쓰는 일도 마찬가지다. 글쓰기는 생각과 느낌을 문자언어로 표현하는 행위다. 글감은 당연히 생각과 느낌을 갖게 한 그 어떤 것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그 어떤 것'은 바로 자신이 직접 체험한 걸 가리킨다.

 체험은 사람을 사람답게 변화시키는 힘이다. 어린아이가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것은 세상살이의 체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 아이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다양한 체험을 하면 많은 지식을 축적해서 세상물정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체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간접체험과 직접체험이다.

 간접체험은 다른 사람의 말이나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거실 소파에 앉아서 TV를 통해 아프리카 오지를 여행할 수 있다. 심장병으로 죽어가는 연인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흉부외과 의사의 삶도 대신 살아볼 수 있다. 특히 독서는 많은 지식과 다양한 느낌을 한꺼번에 얻을 수 있는 대표적인 간접체험 방식이다.

 직접체험은 살아가는 동안 몸으로 직접 부딪치고, 겪고, 보고, 느끼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들 대부분은 직접체험을 통해 얻어진다. 직접체험은 하루하루 일상으로부터 시작된다. 여행도 뺄 수 없다. 여행은 평소 흔히 접할 수 없는 세계로 가서 새로운 것을 직접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니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체험으로 여행만한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이 또한 우리에게 좋은 글감을 제공하는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모든 체험이 곧바로 글이 되는 건 물론 아니다. 직접 부딪쳐가며 생생하게 체험한 일들을 어떻게 하면 온전한 자신의 것으로 만들 것인가, 가까운 곳에 있어서 누구의 눈에나 보이는 것들 중 하나를 골라서 자신의 체험과 어떻게 연관 지어 글로 쓸 것인가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바로 이 아이처럼.

 벚꽃이 눈송이처럼 날린다.

 갑자기 작은이모가 보고 싶다.

 초등학교 2학년짜리 여자아이가 쓴 동시다. '그리움'이라는 제목으로 쓴 이 글은 보다시피 단 두 줄짜리다. 이 동시에는 아이의 두 가지 체험이 들어 있다. 하나는 어느 봄날 벚꽃이 눈송이처럼 날리는 장면을 보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읽는 이로서는 도무지 그게 무슨 까닭인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은 곁에 없는, 작은이모와 함께했던 시간의 체험이다.

 아이는 자신이 겪은 이 두 가지 직접체험을 글감으로 한 편의 동시를 쓴 것이다. 물론 이 아이와 똑같은 체험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 두 행에 들어 있는 서로 다른 체험을 인과관계로 연결하기가 쉽지 않다. 벚꽃이 눈송이처럼 날리는 것하고, 작은이모가 갑자기/뜬금없이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하고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점이 이 글을 읽는 묘미를 더해준다.

 사실 그건 글을 쓴 아이만 아는 일이다. 읽는 이는 그걸 몰라도 된다(아니 어쩌면 모르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 벚꽃이 눈송이처럼 날리던 과거 어느날 아이는 작은이모의 손을 잡고 소풍을 재미있게 다녀왔을 수도 있다. 어쩌면 자신을 몹시 귀여워했던 작은이모를 무덤에 묻고 펑펑 울면서 돌아오는 길에 벚꽃이 눈송이처럼 날리는 장면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이 동시를 읽는 이는 이런 상상을 함으로써 두 행을 인과관계로 연결한다. 물론 그런 상상을 다양하고 풍부하게 할수록 읽는 맛이 더해질 것이다. 그 과정에서, 속사정이 뭔지는 잘 모르지만, 작은이모를 간절히 그리워하는 아이의 애달픈 마음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 동시를 쓴 아이처럼 글은 자신이 겪은 걸 쓰는 데서 시작한다. 그것도 자주 겪어서 잘 아는 것부터 쓰는 것이 좋다. 그런 이야기일수록 쓰기도 쉽다. 우리는 자신이 겪은 건 사소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건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 내가 겪은 것은 모두 나만의 소중하고 특별한 체험이라고 믿으라는 말이다.

 남들이 체험한 건 자신이 직접 겪었거나 눈으로 본 것만큼 생생하게 쓰기가 어렵다. 또 책을 읽어서 얻은 지식이나 지혜를 글로 곧바로 옮겨 쓰면 자칫 현학적인 허영의 늪에서 빠질 수도 있다. 사실을 과장하거나 축소하게 될 우려도 있다. 특히 글쓰기의 초보 단계에 있는 이들일수록 이런 잘못을 저지르기 쉽다.

 그렇게 쓴 이야기는 사실감이 떨어져서 읽는 이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누군가에게 온몸을 실컷 두들겨 맞은 뒤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싶어서 글을 쓰다 말고 밤거리로 나가 동네 불량배들에게 일부러 시비를 걸기도 했다는 어느 작가의 회고담은 그런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깨에서 힘 빼기

 글감은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다. 글감을 찾는다고 남들이 살아온 이야기들의 주위만 맴도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이역만리 낯선 곳을 헤매는 건 더 어리석다. 거창한 글감을 찾아서 내가 쓰는 글에 온갖 세상사를 한꺼번에 쓸어담는 것은 어차피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주머니 속에 항상 넣고 다니는 스마트폰도, 컴퓨터 모니터에 붙여놓은 포스트잇 한 장과 거기 적힌 짧은 메모도, 거의 매일 얼굴을 대하는 부모와 형제도 훌륭한 글감이다. 좋은 글을 쓸지 여부는 자신이 겪은 일을 얼마나 오랫동안 깊이 돌아보고 생각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느냐에 있지 글감 자체를 얼마나 거창한 것으로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어깨에서 힘을 빼라는 말이 있다. 글쓰기도 같다. 글재주가 영 신통치 않아서 글을 못 쓰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글감을 찾지 못해서 헤맨다. 도대체 어떤 걸로 글을 써야 될지 모르겠다거나 자신의 삶 속에는 글로 쓸 만한 것이 없다고 하소연하는 이들도 있다. 왜들 그러는 걸까. 무엇 때문에 그럴싸한 얘깃거리만 골라서 폼나게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줄 수 있는 거창한 글감을 찾아서 멋들어진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는 한 글쓰기는 시작조차 하기 어렵다는 걸 잊지 말자. 설령 어찌어찌 쓴다 해도 좋은 '작품'을 쓰기는 애당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내가 겪은 것만 쓰기에도 원고지 칸은 모자라고 컴퓨터 모니터는 좁다고 굳게 믿자. 더구나 나는 지금도 나만의 체험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고, 또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아갈 것이지 않은가. 그런 걸 써야 하는데 자꾸 먼 곳에서만 글감을 구하려 들기 때문에 글쓰기가 시작 단계부터 삐걱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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