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리

2019.11.04 15:25

한성덕 조회 수:47

  내 자리

      한성덕

 

 

 

 

 

  지금도 여전히 책과 신문과 인터넷을 뒤지며 산다. 동물행동분야의 석학인 ‘콘라트 로렌츠’(Konrad Lorenz:1903~1989)를 접한 것도 그런 경우다. 오스트리아의 한 시골에서 태어난 그는, 1973년 ‘생리의학’(동물 비교 행동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수상했다.  

  살아생전의 로렌츠는 자연 속에서 동물과 함께 지냈다. 동물에게서 나타나는 고유한 행동을 유형별로 관찰 비교한 것을 세상에 내 놓았다. 막 태어난 새끼가 처음 본 사물을 자기 어미로 인식하고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 신기했다. 이런 특이점을 발견한 로렌츠는 그 습성을 ‘각인’(Imprinting)이라고 명명했다. 각인현상은 출생이후 일정기간 내 결정적 시기에만 일어나며, 각인된 행동은 생애 전체에서 지속된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를 ‘동물행동학’의 창시자라고 칭하는 이유다. 그것을 정리한 게 ‘각인이론’이다.

  각인이론의 실험배경이 재밌다. 청둥오리 알을 두 곳에서 부화시켰다. 한쪽은 거위둥지, 다른 한쪽은 로렌츠 자신이었다. 거위둥지에서 나온 오리새끼들은 거위를 어미로 알고 따랐으며, 다른 오리들과 어울리는데도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그러나 인공적으로 로렌츠에게서 나온 오리새끼들은 달랐다. 일정기간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부화시킨 사람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리고 거위가 부화시킨 다른 오리들을 형제로 인식하지 못했다.

  로렌츠의 또 다른 이야기다. 동물이 야생 본능을 잃어버리면 인간의 곁을 떠나지 못한다. 이런 동물은 인간의 영향권 아래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사실 동물은, 자신이 다니던 길에 익숙하고 안전하다고 생각는 경향이 있다. 기억되고 학습된 습성을 버리지 못하는 ‘각인현상’ 때문이다.

 고등학교 겨울방학이던 어느 날, 밤새 눈이 내려 30cm가량 쌓였다. 온 산과 들과 마을의 지붕이 은가루로 반들거렸다. 동네친구들 네댓 명은 엄지 척을 했다. 산토끼 잡으러 가자는 신호였다. 쌓인 눈이 살포시 가라앉아 조금은 단단해지고, 짐승들의 배가 쪼르륵거릴 때를 기다렸다. 굶주린 산토끼가 마을로 내려오면, 다시 그 길을 따라 자기 집으로 들어간다는 게 아닌가? 몇 날이 지나 우리는 죽창을 들고 눈 속을 헤치며 산으로 들어갔다. 어른들의 귀뜸은 정확했다. 얼마 오르지 않아서 토끼발자국을 발견했다. 배설물과 함께 두세 번 오간 흔적이 눈위에 선명했다. 그 길로 쭉 올라가자 큰 바위가 보였다. 희망을 갖고 바위 속을 들여다보는 순간 산토끼의 빨간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럼부스가 이랬을까? ‘토끼다!’ 외치자,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양손을 들고 야단이었다. ‘대한독립만세’도 아닌데, 산이 쩌렁쩌렁 메아리쳐 두 쪽 날 것 같았다.

 

 인간은 어떨까? 사람도 반복된 행동이나 습관에 길들면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세살 버릇 여든 간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동물로 분류되는 사람도 다르지 않음을 알고, 예배에 참석하는 교인들의 앉는 자리를 생각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어쩌면 그렇게도 자기자리를 찾아서 앉는지 신기했다. 가끔은 앞자리부터 앉으라고 신신부탁하지만 효과는 극히 미미했다. 그마저도 몇 번 부탁해야 겨우 움직이는 시늉정도였다. ‘내 자리를 누가 앉는겨?’ 하나보다. 월세나 전세를 낸 것도 아닌데 자기자리를 고집했다.

  나를 보니 누구를 빗댈 것도 없다. 초중고 때야 정해진 자리가 있지만, 대학시절은 어디 그런가? 그런데도 내 자리가 있었다. 어쩌다 지각해서 헐레벌떡 들어가도 내 자리가 싱긋이 반겼다. 특별하지도 않은데 거긴 늘 내 자리였다. 그뿐인가? 어디를 가더라도 친한 사람 옆에만 앉는 습성이 있다.  

  60대 중반의 지금은 어떤가? 한 학기를 쉬고 있지만, 신아문예대학에서 김학 교수님의 수필지도를 받은 세월도 어언 4년이다. 4년 동안 단 한 번도 자리를 옮긴 적이 없다. 반대표나 교수님께서 지정해준 자리가 아니다. 복권이 당첨된 자리도, 황금이 나오는 자리도, 운수 대통하는 특별한 자리도 아닌데 우직하리만큼 고수한다. 강의실 오른쪽 앞에서 두 번째, 고집할 이유도 필요도 없지만 내 자리가 되었다. , 한 가지 이유라면 처음 앉았던 자리여서 어색하지 않다는데 있다. 여러 문우들도 자기자리에 앉는 걸 본다. 로렌츠의 말대로라면, 기억되고 학습된 습성에서 나온 ‘각인현상’이다.  

  나는 오늘도 각인된 길을 따라 산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모르는 길은 막힐 수도, 헤맬 수도, 무너질 수도, 사라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하나, 어디든지 내 자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내일을 살아가는 힘의 원리다.

                                              (2019.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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