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보다 당신

2019.11.27 12:56

한성덕 조회 수:52

사모보다 당신

한성덕

 

 

 

 

  존칭은 그 사람의 품격과 맞닿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장이나 사장이나 회장으로, 선생이나 교수나 박사로, 또는 주장이나 코치나 감독으로, 하다못해 자그마한 동네의 이장이라도 되기를 바란다. 한 배구선수가 있었다. 얼마나 좋은 선수가 되기를 갈망했으면 이름이 ‘한 선수’일까?

  초등학교 3학년까지 아버지는 목회를 하셨다. 목사안수 이전에 한 교회의 담임전도사였으니 어머니는 자연스럽게 사모였다. 어려서부터 ‘사모님’이란 존칭이 귀에 달라붙어 익숙하고 친숙한 이유다.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를 전도사님으로, 어머니를 사모님으로 불러서 대단한 벼슬인 줄 알았다. 시골친구들이,

  “성덕아, 니 아빠는 전도사님이고, 엄마는 뭐다냐?” 하고 물으면,

  “우리엄마는 사모님이다 사모님!

  꽤나 거들먹거리며 호들갑을 떨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 세월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 덧 반세기기 지났다.

  군 복무를 마치고 총신대학교에 진학했다. 대학생 신입생 때부터 이미 20대 중후반이었다서울 남대문시장 근처의 서울중앙교회 목사님을 잘 알고 있었다. 입대 전부터, 신학교에 들어가면 오라는 말을 믿고 무작정 목사님을 찾아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던가? 교육전도사를 구하고 있었다며 목사님께서는 무척 반기셨다. 다음 주부터 당장 교육전도사로 오라는 게 아닌가?

  장년교인 150명쯤 되는 서울의 그 교회는 변두리가 아니라 중구 남창동에 있었다. 교육부서로는 유초등부와 중고등부를, 음악파트로는 찬양대지휘를 맡았다. 해본 경험이라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유초등부와 중고등부를 가르치며, 조금 지휘를 해 본 게 전부였다. 부담은 하늘을 찌르고, 가슴은 벌렁벌렁해서 겁이 났다. 그러나 뭔가를 맡으면 혼신을 다하는 타고난 열정이 내게는 있었다. 쏟아지는 진땀을 그 열정 하나로 날려버렸다. 6개월이 되기도 전에 안정을 찾고 주일학교가 부흥되었다. 무주 촌놈이 서울에서 사역하는 것 자체가 기적인데, 햇병아리 대학생주제에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문제는, 교회의 아가씨선생들이었다. 젊은 전도사가 그리도 좋았던가? 많은 여선생들이 나를 연애의 상대로 여겼다. 관심은 좋으나 윙크하는 눈짓이 딱 질색이었다. 노골적으로 대시(dash)하는데, 때로는 당황하고 때로는 도가 지나쳐 황당하기도 했었다. 목회 초년부터 여성문제로 구설수에 오르면 평생 꼬리표가 붙는다. 목회가 어려워질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대학생 때는 공부에 전념하고, 신학대학원에 가서 결혼하자’는 결심을 하고 있었다. 꼬리치는 여선생들의 유혹을 물리칠 자신이 없었다. 결국 적극적으로 결혼을 생각하게 되면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198010, 스물아홉의 대학교 3학년생이 이십대 중반의 아가씨와 결혼했다. 어머니처럼 아내도 자연스럽게 사모가 되었다. 좋든 싫든 들어야하는 존칭어다. 19852, 7년의 신학과정을 마치자 어느 교회의 담임전도사로 부임했다. 목회자야 헌신과 봉사가 당연하지만, 전통적으로 사모까지 동일시하던 시대였다. 젊은 나이에 ‘사모님’이라는 호칭이 얼마나 부담스러웠을까?

 실제로 그랬다. ‘사모님은 낮잠을 자지 말고, 바지를 입지마라. 개별적으로 교인을 만나거나, 새벽기도회에 빠지면 안 된다. 늘 웃는 모습으로 항상 친절하라. 말이 많거나 수다스럽지 않기를 바란다. 반드시 전도사님과 함께 심방하고 외출은 삼가라.’는 게 장로님의 명령(?)이었다. 목회초임지에서 받은 십계명 같은 엄격한 계율 때문에, 아내는 살이 빠지고 기절까지 했었으니 그게 커다란 멍에였다. 둘째를 안은 지 불과 몇 개월, 잠이 얼마나 쏟아졌을까? 방에서 대낮의 발자국소리에도 벌떡벌떡 일어났다. 장로님의 헛기침은 날벼락이자 완연한 노이로제였다. 교인들의 뜨거운 관심과 많은 사랑이 계율(?) 앞에서 사라졌다. 아내를 품에 꼭 안은 채 남편의 사랑을 확실하게 전했다.

 “여보, 사모보다 당신이 더 소중해. 누가 뭐라고 해도 당신 좋을대로 해요. 그 나머지는 내가 다 책임질 테니 걱정 말고. 알겠어요?  

  아내는 내 품에서 엉엉 울었다. 마음껏 울도록 힘껏 안아주었다.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은 바로 아내가 아닌가? 목회 초년에 절실히 느꼈던 아내 사랑이었다.

                                             (2019.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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