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의 우화(9)

2019.11.30 12:27

윤근택 조회 수:30

겨울밤의 우화(寓話)(9)

- 부엌칼과 도마-

 

                         근택(수필가/문장치료사/수필평론가)

 

본디 부인네들이 즐겨 찾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말이 많은 법이다. 지난 날 우물가나 빨래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곳에서 부인들은 누가 먼저 자기 남편 자랑을 하게 되면, 질세라 한 바퀴 주욱 남편자랑으로 이어진다. 그 제 1부가 끝나면, 이번엔 남편 흉보기로 한 바퀴 돌아간다. 농부네 집 싱크대 위에도 부인들이나 자주 쓰는 년들 둘이 있다. 부엌칼과 도마가 그 년들이다. 예전 같으면 남정네인 농부가 얼씬 못했을 부엌이 현대화하는 바람에 . 오늘은 평소와 달리, 두 년은 불평을 늘여놓는다. 애용하는 부인네들을 닮아서일까?

부엌칼이 먼저 혼잣말처럼 말을 꺼낸다.

대체, 이게 무슨 꼴이람? 하고많은 날 험한 일만 하고 살아왔잖아. 어디 한번 쉬지도 못하고 말이야. 더군다나 온갖 게 살갗에 다 묻고 말이야.

농부는 부엌칼이 평소 고춧가루가 묻은 김장김치를 썰거나, 어쩌다 기름기 있는 돼지삼결살을 썰거나, 매운 청양초를 썰거나 하는 데 대한 불평임을 알아차린다.

그래서 한마디 한다.

그 년 별 소릴 다 하는군. 어디 한번 어물시장에라도 보내볼까? 걔들은 그 비린내 나는 생선을 하루 종일 썬다고 얼마나 고생을 한다고 . 나야 게을러 터져서 반찬도 제대로 해먹들 않잖아? 그리고 비린내 나는 생선 따위를 네게 맡긴 적도 없고 말이야.

     그 말을 듣던 부엌칼이 기어이 대거리한다.

     . 농부님, 어디 비교할 데가 없어서 절 그런 투박한 무쇠칼년들한테다 . 제 피부를 한번 보세요. 희디 흰 이 피부라면,검사(劍士)인지 검사(檢事)인지 그런 양반들하고 놀아야 마땅하지 않아요?

     이에, 농부는 이따가 모아서 한꺼번에 꾸지람하기로 하고, 묵묵히 듣기만 한다. 그랬더니 글쎄, 이번엔 도마 년이 불평이다.

     맞아. 부엌칼 너도 참 안됐다. 그런데 내 꼴은 또 이게 뭐야? 하루도 내 낯짝이 성할 날이 없잖아. 부엌칼 네 자국도 자국이지만, 김치물이며 고추가루며 마늘이며 청양고추며 온갖 것들이 . 맵기는 또 왜 이렇게 매운지 모르겠어. 늘 재채기를 참느라고 애를 먹고 있어.

물론 농부가 들으라고 하는 말이다.

 요년 보게나. 짝궁 편드는 척 하면서 아주 . 네 년도 한번 생각해봐라. 정육점 년은 어떻겠어? 늘 그 흉물스런 돼지머리 등을 떠받들지 않겠어?

 그 말을 듣던 도마도 입은 살아 있다.

  농부님, 저도 비교할 데다 비교하세요. 김밥집 그 가시내는 늘 고소한 참기름으로 얼굴을 처바르지 않던가요? 빵집이든 떡집이든 국수집이든 그곳 가시내들은 또 어때요? 늘 하얀 분을 뒤집어쓰지 않던가요? 어디 그뿐이겠어요?  농부님이 늘 자랑하던 미성당. 그 친구네 모탕은 어떻던가요? 금이야 은이야 가루들이 세공을 하는 중 떨어져 박힘으로써 아예 금은모탕이 아니던가요?

 이 말을 듣던 농부는 깜짝 놀란다.

저 가시나가 모탕은 또 어떻게 알았지? 오냐, 이따가 한꺼번에꾸지람할 때 써 먹어야지.

그러면서 잠시 자신을 한탄한다.

 , 이년들아! 너희들만 처량하냐? 나는 뭐 크게 호강하는 줄 아냐? 다른 놈들은 마누라가 척척 받쳐주는 밥이나 먹지, 네 깐 것들과 이렇듯 말다툼도 하지 않는다고. 더더군다나 . 

 이 말을 듣던 두 년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하는 말.

 웬일?

 농부는 애써 못 들은 척 한다.

 사실 농부든 부엌칼이든 도마든 나름마다 애로사항이 없는 것도 아니다. 좀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더라면, 아니 임자를 잘 만났더라면, 모두 영광스런 자리에 올랐을 것이다. 농부는 농부대로 학자가 되었거나 지난 직장에서 더 높은 간부직에 올랐거나 했을 것이다. 부엌칼은 부엌칼대로 검사(檢事)의 칼이 되었거나, 장수(將帥)의 칼이 되었거나 했을 것이다. 그리고 도마는 도마대로 떡집도마가 되었거나 김밥집 도마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높은 곳만 쳐다볼 수도 없는 노릇.

 농부는 두 년한테 차례차례 타이르듯 말한다.

 먼저 칼에게 이른다.

 보거라, 부엌칼. 너는 망나니의 칼이 아닌 것만으로도 만족해 해라. 또 백정의 칼이 아닌 것만으로도 만족해 해라. 검사(劍士)인지 검사(檢事)인지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가지 않은 것은 더더욱 감사해야 한다. 그들의 칼은 모두 생명을 다루거나 인명(人命)을 다루는 칼이지 않니?

 그러자, 웬일로 부엌칼이 숙연해진다. 대신, 한마디를 꼭 하고 넘어가겠단다.

 농부님, 그런데요 제가 너무 힘들어요. 내일 절 한번 새파랗게 갈아주시면 안 되어요?

 농부는 부엌칼을 다독여준다.

 오냐오냐, 그렇게 해주고 말고.

 다음은 도마에게 이른다.

 그래, 네 심정도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기왕에 내 집에 온 거어디 잘 해보자꾸나. 목수들은 모탕제사(모탕祭事)도 올려준다는데 난 그러질 못했구나. 지난날 영덕 사원사택에서 먼저 사람이 버리곤 간 너를 이리저리 데리고 다녔던 걸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여태 너를 버리지 않은 것도 고맙지 않니? 네 다리가 불편함에도 .아까도 말했지만, 네가 정육점이든 어물전이든 닭집이든 그러한 데 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고마워 해라. 저 시골 여물작두 모탕이나, 이 농부네 뒷동산 장작 패는 모탕을 한번 생각해보거라. 걔들은 작두나 도끼가 사정없이 내려치는 바람에 만신창이가 되지 않겠니? 그보다야 네가 낫지 않겠니?

  그러자, 도마도 다소곳해진다. 도마도 부엌칼처럼 부탁을 한다.

농부님, 저는 얼굴에 곰팡이 등이 생기기도 하고, 물 마를 날이 없어요. 그러니 제가 자주자주 햇볕 구경하도록만 도와주세요.

농부는 도마를 다독여준다.

오냐오냐, 그까짓거야 그리 어렵지 않지. 자주자주 바람을 쐬도록 해 줄 게.

부엌칼과 도마는 입을 맞춘 듯 농부한테 말한다.

농부님, 그렇다면 저희들은 농부님한테 무얼 해드리면 좋죠?

 이에, 농부는 더 이상 바랄 게 없다고 한다. 어차피 모두모두 자신이 결정했고, 자신이 작정한 일이니 정말 괜찮다고.

 농막의 겨울밤은 모처럼 평화롭다.

 

  * 이 글은 인터넷(한국디지털도서관>윤근택>작품/논문>미발표작)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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