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랑스러운 김제인

2019.12.15 12:13

최상섭 조회 수:14

나는 자랑스러운 김제인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금요반 최 상 섭

 

 

  예로부터 김제시를 가리켜 '징게맹경외야밋들'이라 불렀는데, 이 말은 '김제 만경 넓은 들에 곡식이 가득하다'는 뜻이다. 김제시는 호남평야의 본고장이자 주곡 생산지의 본향으로 전국 생산량의 1/40을 차지한다. 기름진 평야에서 생산된 주곡은 그 미질이 우수하고 밥맛이 좋아 전국으로 팔려나가 우리의 식탁을 풍성하게 한다.

  호남평야 하면 누구나 전라남북도를 가리켜 호남평야로 알고 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본래의 뜻은 벽골제 호수의 이남 지방이어서 호남지방이라 불리게 되었다. 김제시에는 가장 오래된 저수지 벽골제가 있고 이 벽골제는 최초로 인공 담수호를 만들어 과학적 영농을 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백제 비류왕 때인 서기 330년에 조성된 호수가 조선 시대까지 개보수를 거쳐 영농에 이용된 호수다. 매년 10월이면 벽골제에서 '지평선 축제'가 개최되는데,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대표축제로 지정되었다. 10월이면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곳이 '김제 벽골제 축제장'이다.

 

  요즈음 김제시는 농공산업의 병행과 관광산업 활성화로 가장 앞서가는 살기 좋은 고장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원평천이 길게 천애의 물소리를 내며 흘러가고, 동진강물이 농수로로 넘쳐나며, 남쪽에 있는 나지막한 신털미산[草鞋山]에 석양이 곱게 물드는 김제시 신덕동 새터에서 나는 태어났다. 부모님은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열심히 농사를 짓던 농부였다. 1980년대 지금의 '김제 지평선 축제'를 제정하여 축제의 장으로 쓰이는 곳이 부모님이 농사짓던 논이었다.

  나는 동진강 하류에서 멱감고 원평천에서 투망을 던져 잉어를 잡으며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을 보냈다. 내가 작시(作詩)하고 수필을 쓸 수 있는 정서와 문학적 감성이 이때 고양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김제시에서  K중학교를 졸업하고 익산으로 고등학교 진학을 했으며 대학 졸업 후 김제시 금산면에 있는 K중·고등학교에서 교사로 36년을 근무하고 정년퇴임했다. 김제에서 태어나 고향에 있는 학교에서 평생을 근무한 셈이다. 이러한 내 삶의 경력을 내세워 가장 자랑스럽고 보람된 인생을 경영했다고 자부하며, 재직시절에 글쓰기에 전념하여 내 인생이 새롭게 변화한 것은 자연환경 덕이다.

 

  김제시는 문향과 예향의 본고장이다. 석정 이정직(石亭 定稷) 선생은 일찍이 조선시대 가장 뛰어난 실학자 중 한 분이다. 김제시 백산면에서 태어난 근세 실학의 대가 석정 이정직 선생은 근대 성리학자로서 크게 이름을 떨쳤다. 김제 지역의 학풍과 학통을 새롭게 형성한 대학자로 수많은 제자를 길러 냈으며, 그 학문적 영향력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또한 김제시 용동리는 한국화단에 벽천 산수화풍을 진작(振作)시킨 나상목 화백이 태어난 곳이다. 나상목 화백은 대한민국 국전의 한국화 부문 심사위원장을 지냈고 원광대학교 미대학장을 역임하면서 그의 제자들에게 푸를 벽() 자의 호를 진수(陳授)하여 전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유명한 화가들 벽경, 벽산, 벽강 등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김제를 빛낸 조선 시대 인물로는 세계 최초로 비차(飛車: 하늘을 나는 연. 라이트 형제보다 300여 년 앞서 만듬)라는 비행기를 발명한 정평구 과학자를 들 수 있다. 정평구는 김제시 부량면 제월리에서 태어나 무과에 급제하고 화약을 제조하는 별군관이 되었다. 그러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 진주성 전투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왕족(정종의 10째 아들 덕천군의 후손인 이연손의 아들)이면서 전라우수사 이억기에 의하여 그 재능을 인정받게 되었다. 그 뒤 진주진영 별군관으로 발령받아 근무하면서 그의 능력을 만천하에 떨쳤다. 세계 최초의 글라이더 격인 비차를 만들어 화약과 전투 보급품을 진주성에 보급했다. 그는  3,800여 명의 관군과 지역민이 합세하여 진주성 1차 전투에서 빛나는 승리의 원인이 되었던 신무기 제조자였다. 1592(선조 25) 105일에 진주에 이른 왜장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 휘하의 왜군 2만 명이 수천 개의 대나무 사다리를 만들어 와서 진주성을 공격하고 이에 진주목사(牧使) 김시민이 지휘한 조선군과의 치열하게 싸웠다.

  당시 조선군은 성문을 굳게 닫고 지금의 수류탄과 비슷한 대기전(大岐箭)을 쏘아 대나무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일본군을 물리쳤다. 또한 마른 풀에 화약을 싸서 던지거나 끓는 물, 큰 돌들을 던지며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진주성 1차 전투에서 6배나 많은 왜군을 무찌르고 대승을 거두었다. 이렇게 해서 1010일 왜군은 6일간의 전투에서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남은 패잔병을 데리고 패주했다. 이때 죽은 왜군 전사자의 수가 17,0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렇게 대승을 거둔 진주성 1차 전투의 숨은 공로자가 김제인 정평구였다.

 

  김제시는 모악산(높이 794m)이 있어 일찍이 불교가 크게 성행한 지역이다. 금산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로서 『금산사사적(金山寺事蹟)』에 의하면 600(무왕1)에 창건되었으며, 백제 법왕이 그의 즉위년(599)에 칙령으로 살생을 금하고, 그 이듬해에 금산사에서 38인의 승려를 득도시켰다.

 

 그러나 이때는 그 규모나 사격(寺格:절의 품격)으로 볼 때 별로 큰 사찰이 아니었으며, 1492(조선 성종 23)에 쓴 「금산사오층석탑 중창기」에 의하면 과거불(過去佛)인 가섭불(迦葉佛) 때의 옛터를 중흥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금산사의 터전에 오랜 불연(佛緣)이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금산사가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된 시기는 진표(眞表)가 중창을 이룩한 신라 경덕왕대 이후로 보고 있다. 중창 주 진표는 12세에 금산사의 순제법사(順濟法師)에게 가서 중이 되었고, 그 뒤 금산사를 떠나 부안의 선계산 부사의암(不思議庵)에서 참회법(懺悔法)을 닦아 미륵보살과 지장보살로부터 계법(戒法:계율을 엄수하는 수행법)을 전해 받은 뒤 금산사로 돌아와서 중창을 시작했다.

  지금의 금산사는 임진왜란 때  암자 40여 동과 함께 일본군의 화재로 완전히 소실되고 불에 타지 않는 석조물만 남았었다. 대사구 자리에 1601년에서 1635년까지 지금의 금산사를 수문대사가 중건했다. 현재는 조선 3대 승병장이었던 처형 뇌묵대사전이 준공되었고 체험관광(Templestay)을 할 수 있는 한옥구조의 여러 동 건물을 증축하여 전북도민과 함께하는 생활 속의 종교로 발돋움하고 있다. 모악산의 정상에 이르는 등산로가 있는 금산사는 유서 깊은 사찰과 관광을 함께 즐길 수 있어 관광 김제시의 관문이 되고 있다.

 

  뿐만아니라 농공병진정책의 일환으로 민간육종단지와 스마트 팜 농생명 밸리가 김제시에 들어서 종자 보존의 메카와 선진농업의 신 개척지로 떠오르고 있다. 만경농공단지에는 종자개발 생산수출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 고부가가치 종자인 '골든 시드(Golden Seed)' 생산지원 및 종자 전문 프론티어 양성 등 10개 특화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그리고 백구면에는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하고 농생명 미래기술을 확보하여 관련 산업의 인프라를 조성해서 김제시가 첨단농업의 메카로 굳건히 자리매김할 수 있는 스마트 팜 농생명 밸리가 조성되고 있다.

  또한 김제시 백구농공단지에는 자동차 중 특장차 생산을 전문으로 하는 전문 농공단지로 조성되었다. 단지의 유치업종은 트레일러, 고소작업차, 크레인, 렉카차, 소방차, 청소차 등으로, 특수기계 장착의 부품생산과 조립을 할 수 있는 전국 최초의 특장차 전문 집적화 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김제시 장화동에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전국에서 제일 큰 뒤지가 마당 가운데 있고, 이 곡식으로 밥을 지어 지나가는 과객에게 누구에게나 풍성하게 식사를 대접했었다. 우리나라 도작문화가 크게 융성했던 김제시는 예나 지금이나 모든 것이 풍족하고 인심이 넉넉하여 풍류를 즐기는 여유와 관광과 산업을 함께 추진하고 있는 선진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예향의 고장이요 맛과 멋과 김제만의 고유 전통이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있다.

 

  이렇게 고대로부터 이어지는 도작문화와 현대산업이 함께 발전하고 있는 김제시는 전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서, 환경이 아름답고 산수가 빼어난 고장이다. 노란 양탄자를 깔아 놓은 듯 끝없이 펼쳐지는 황금들녘은 김제인의 넉넉한 도량이요 빛나는 삶의 터전이다. 나는 김제에서 태어나 내 꿈을 이루며 삶을 이어가는 김제인이 된 사실에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지금도 내가 자랑스런 김제인이어서 가슴이 뛴다.

 나는 앞으로도 김제시를 위하고 김제인의 위상을 높이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 기울일 생각이다.                                                     

                                                                     (2019.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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