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당신

2019.12.17 13:09

하광호 조회 수:6

소중한 당신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하광호

 

 

 

 내가 근무했던 청사 입구에 한 아름이나 되는 은행나무가 있었다. 나는 언제부턴가 은행나무를 좋아하게 되었다. 근무하는 직원들도 좋아했다. 좋아하다보니 거름도 주고 관리도 잘했다. 봄 이되면 파릇파릇 새순이 돋아나고, 여름이면 푸른 황록색으로 푸르름을 주고,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자리를 내주었다. 가을에는 다른 나무와 달리 석양에는 노랑 은행잎이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해마다 은행을 판매하여 전 직원 선진지 견학시 비용까지 내어주니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고향인 시골에는 은천 숲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20년쯤 되는 은행나무가 있다. 해마다 두 그루에서는 은행이 많이 열린다. 가을에는 은행이 떨어져 주워오곤 했다. 전날 저녁 비온 뒤 새벽에는 당연히 그곳으로 달려갔던 기억이 났다. 그 때 은행나무도 암컷과 수컷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세 번이 더 변해도 기억이 소소하다. 행정으로 자리를 옮겨 진안군 동향면사무소에서 근무했다. 동향면 소재지를 경유하는 지류인 구량천의 물결이 밤에는 별빛에 빛나고 낮에는 햇볕에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경지정리가 된 대량리 넓은 뜰은 마음까지 보듬으니 내심 여유로웠다. 대량리 문필봉과 학선리 명덕봉, 자산리 두억봉, 성산리 성주봉은 산세가 좋아 동향면민의 민심을 후하게 하고 큰 인물을 낳게 하는 곳으로 예부터 잘 알려진 곳이다.

 

 어느 날 육번집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돌아오는데 은행나무 옆집에서 피아노선율이 아름답게 퍼지고 있었다. 음악에는 문외한이었지만 가던 걸음을 멈추고 은행나무 아래서 들었다. 몹시도 궁금하여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학원 현관 문틈으로 보았다. 아름답고 날씬한 아가씨가 피아노 교습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 후로 그 곳에 올 때는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밑에서 내 마음도 온통 동화되곤 했었다.

 

 근무하면서 마음에는 온통 그 녀 생각으로 가득 찼다. 때로는 은행나무 아래서 기다리는 시간이 많았다. 데이트 신청하여 마음이 통한 때에는 석양이 질 때는 오솔길을 따라 말고개를 함께 걸었다. 구량천의 시원한 바람도 불어와 내 마음을 아는 듯 살랑거렸다. 하천 둑을 따라 걷는 동안 갈대숲의 흔들림 속에 ‘데이트 잘 하세요!’ 하며 나를 응원했다. 가슴 조이며 설렜던 시간이다. 그녀의 아름답고 예쁘고 심성이 고운 탓으로 내 마음은 그녀가 전부였다. 그 뒤 가끔은 진안 북부마이산 연인의 길을 산책하곤 했었다.

 

 요즈음은 은행잎들이 낙엽이 되어 바닥에 지천으로 깔렸다. 청소부 아저씨들도 치우느라 진땀을 흘린다. 앙상한 가지만이 소슬바람에 스산한 느낌마저 든다. 다가오는 겨울의 한파에는 어떻게 견딜까 마음이 아리다. 사람에겐 산고의 고통처럼 겨울의 모진풍파를 잘 견디며 새 봄을 기다리지 않을까 생각하니 애잔하다.

 

  지난달만해도 단풍철이었다. 부채꼴모양의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었다. 명주골 한국전력 앞 은행나무 길을 걸었다. 유달리 노란색으로 물감을 칠한 것처럼 주변이 노랗다. 아내와 함께 은행잎을 가까이서 보았다. 은행잎 사이로 햇볕이 비춰진 아내의 얼굴 모습이 화사했다. 추억으로 남기기 위해 인증샷도 찍었다. 지난 시절이 그리워진다.

 

 어머니는 94세까지 사시다가 하늘나라로 가셨다. 평소 쑥국을 좋아하시고 쑥떡도 잘 드셨다. 쑥국을 드시고 난 뒤 “잘 먹었다. 고맙다.” 늘 그러셨는데 지금은 안 계시니 마음이 허허롭다. 어머니를 닮아 나도 떡을 좋아한다. 아내는 고맙고 또 고맙다. 나는 ‘당신의 소중함을 이제야 느꼈습니다.’ 제2의 삶을 추구하는 생활에 아내가 있어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일체유심조(唯心造)란 말이 떠오른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나는 부족한 점이 많다. 아내 입장에서는 서운한 점이 많겠지만 내색을 하지 않는 편이다.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노력했지만 늘 부족했다. 아내는 언제나 따뜻한 등을 기댈 수 있는 언덕을 내주었고, 삶이 힘들 때는 가까운 마이산 벚꽃 길을 둘만이 자주 걸었다. 그동안 참고 묵묵히 함께한 아내에게 늘 감사할 뿐이다. 지금도 자식들 뒷바라지 하느라 고생하는 아내가 무척 대견스럽다.

 

 나의 삶은 언제나 부끄러움과 부족함으로 이어져 왔다. 연애도 결혼도 내가 선택했다.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 ‘세월이 유수 같다’는 말을 실감한다. 경자년 새해에는 외국여행보다 국내의 문화와 삶을 곁들여 맛 여행을 하기로 했다. 이제는 지나온 길보다 가야할 길에 더 마음을 쏟고 싶다. 가지 못한 길의 아쉬움을 섬진강가에 흘려버리고 여유롭게 앞만 보고 가면서 웃으련다.

                                                               (2019.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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