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씨 고운 며느릿감들

2020.01.11 14:16

구연식 조회 수:58

마음씨 고운 며느릿감들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구연식

 

 

 


 내가 어렸을 때 농촌의 영농방식은 기계농은 상상도 못 했었다. 남의 힘을 빌리지 않고 가족끼리 농사를 짓는 호락질이거나, 이웃끼리 품앗이나 마을 전체의 두레 또는 울력 등 협동과 상부상조로 농사일을 꾸려갔다. 방과 후나 여름방학 때는 논밭에 나가서 부모님의 일손을 돕는 것은 당연시되어 자녀가 많은 집은 일꾼으로 한몫을 했었다.

 

 오늘은 대서(大暑) 더위가 막바지 발악을 하는지 한낮 지열이 끓어올라 시골집 마루 난간이 가마솥 뚜껑처럼 뜨거워져 앉을 수도 없다. 토방 아래 박물관이나 있을 법한 낡아 늘어진 헌 여자 고무신을 보니 생전에 어머니가 논밭에서 일하셨던 모습이 떠오른다.

 

 무더운 여름방학 때쯤인 것 같다. 어머니는 이웃집 일을 하러 가셔서 밭을 매다가 고무신이 찢어져서 일을 마치고 뜨거운 황톳길을 맨발로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셨다. 뒤따라오던 그 집 큰딸이 자기 손수건으로 황토 먼지와 땀으로 뒤범벅된 어머니의 얼굴을 닦아주면서 "아주머니, 제 신발 신으셔요!" 하고 얼른 곱디고운 손으로 자기 신발을 벗어서 어머니 앞에 놓았다. 순간 어머니는 이렇게 마음씨 착하고 예쁜 며느릿감이 어디 있을까 하고 아냐, 나는 괜찮아. 맨발로 가면 가시 찔러. 거기나 신고가.하면서 도로 신발을 그 집 딸에게 되돌려 주고 뜨거운 황톳길이 덥고 피곤할 텐데, 그 고마운 마음 때문에 잊으시고 맨발로 집으로 오셔서, 마루에 걸터앉아 책을 읽고 있는 나에게 고마운 고무신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어머님은 하늘나라로 가셨다. 고마웠던 그 따님의 청량음료 같은 고마움을 간직하고 맨발로 집으로 오셨지만, 가끔 그 고마운 마음을 며느릿감으로 생각하셨는지 잊을만하면 그 이야기를 줄곧 나에게 들려주셨다. 어머니와 그 집 큰딸이 보고 싶다. 그 집 딸이 옆에 있으면 고무신 대신 유리 구두를 사서 신겨드리고 오늘처럼 무더운 날씨에 팔이 빠지도록 부채질도 해주고 싶다. 본인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행동이었겠지만, 어머니의 속마음과 내 생각도 말해주고 싶다. 그나저나 이제는 모두 다 세월이 훌쩍 지나가 버려 낯선 거리에서 만나면 고무신 이야기는 전혀 기억이 없을 테고, 서로 알아보려는지 모르니 그것이 슬플 따름이다. 아무런 대가 없이 순수한 마음에서 상대방의 측은함을 보고 우러나오는 고운 마음씨는 주는 자는 몰라도 받는 어머니에게는 지워지지 않는 천리향(千里香)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도 가끔 이웃집 일을 하러 가셨다. 아버지가 그 집 일을 가셨던 날은 아마도 둘째딸이 학교 소풍날인가 싶다. 소풍날에는 어느 집이나 맛있는 어머니의 도시락과 색다른 간식거리도 몽땅 싸주기에 대개 아이들은 도시락보다는 평소에 먹어보지 못한 과자, 빵 등의 간식거리로 먼저 배를 채우고 도시락은 나중에 먹기에 남겨서 도로 가져오거나 선생님이 지정한 쓰레기 집합장소에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그 집 둘째딸은 친구들이 버린 도시락 밥이 너무 아까워 모두 다 긁어모아서 보자기에 싸서 집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자기 집 마당에서 놀고 있는 닭들에게 던져 주니 닭들은 주인댁 둘째따님에게 고맙다는 건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도시락을 쪼아 먹기에 바빴다. 안방에서 문틈으로 마당을 바라보시던 그녀 할머니가 문을 배시시 열고 웃으시며 좋아하셨다. “할머니, 내가 오늘 소풍 가서 친구들이 먹다 버린 밥을 주워다가 닭에게 줬더니 저렇게 잘 먹네!그 장면과 말을 아버지가 우리 집에 오셔서 그대로 전하시면서 어쩌면 그 집 애들은 마음씨가 그렇게도 착하고 알뜰하냐? 뉘 집 며느리로 갈 건지 그 집은 복 받은 집이다.” 하셨다. 지금부터 50여 년도 훨씬 더 오래된 이야기인데 참으로 마음씨 곱고 착한 며느릿감 아가씨들이었다. 아버지도 그 집 딸이 며느릿감으로 좋으셨던 것 같다. 인간의 순수하고 착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은 모두 다 아름답고 예쁘게 느껴지는 것 같다.

 

 어머니의 검정고무신에 아름다운 추억을 담아 호수에서 멀리 띄워 보냈지만, 심술궂은 역풍은 고무신 배를 호숫가 모래톱에 도로 데려다 놓았다. 부모님이 좋아하셨던 며느릿감 아가씨들은 모두 고향을 떠났고, 부모님들도 세상을 떠나셨다. 이제는 아무도 없는 시골집을 나도 떠나려니 눈가엔 땀인지 눈물인지 질척거려 연신 훔쳐내도 마르지 않는다.

                                                                           (2019.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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