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재정이와 성덕이

2020.01.17 11:14

한성덕 조회 수:1

친구 재정이와 성덕이

                                                                                                       한성덕

 

 

 

 

  재정이의 고향은 전북 진안군 진안 읍내요, 내 고향은 무주군 적상면 삼유리다. '리'자만 떼어내면 ‘삼유’가 되는 동네다. 무엇을 해도 '삼류'밖에 안 되나 싶어서 동네 자체를 싫어한 적이 있었다. 재정이는 산을 저만큼 두고 자랐지만, 나는 산으로 뺑 둘러친 곳에서 자란 촌뜨기다.  

  나는 1971년에 고등학교를 마쳤다. 그해 6월 “무진장(무주, 장수, 진안)교회주일학교연합 교사강습회”가 무주에서 있었다. 내가 출석하는 교회여서 찬양인도를 맡았다. 150여 명의 남녀 또래들 앞에서 찬송을 인도한다는 게 여간 기쁘지 않았다. 그 자체로 신나고 재미가 쏠쏠했다. 시선을 모으려는 별도의 제스처가 필요치 않았다. 특히, 여선생들에게 잘 보이려는 끼가 퐁퐁 솟아났다. 그리고 무주교육청 직원인 것을, 미모에 신앙 좋은 청년인 것을, 가문 좋은 한 씨 가문이라는 것을 괜히 자랑하고 싶었다. 튀는 몸짓으로 날 좀 보라고 호들갑을 떠는 나이가 아닌가? 전체가 나흘간 숙식을 함께 하며 아이들에게 가르칠 것을 학습했다. 그 배운 것으로 자기 교회에서 ‘어린이 여름성경학교’ 때 가르친다.

  강습회 마지막 날은 동화대회가 있었다. 재정이의 동화는 '다윗과 골리앗'이었다. 볼펜지휘봉을 들고, 때로는 길게 늘이면서 전개하는 동화와 적절히 구사하는 성대모사가 수준급이었다. 누가 보아도 당당히 1등이었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 얇디얇은 무색꽃무늬 반팔 점퍼에 홍시 같은 주황색 목 티셔츠를 입었다. 멋져 보이라고 지퍼는 삼분의 일만 올렸다. 얇은 점퍼속의 주황색 티셔츠가 매혹적으로 비쳤다. 뭇 여성을 홀릴 참이었나? 스스로 보기에도 지나쳐 보였다. 재정이 정도는 아니지만 나 역시 만만찮게 동화를 잘 했다.

 심사평 시간이었다. 생각한대로 친구는 1등감이었다. 내 차례가 되자 가슴은 설레는데 어깨는 우쭐거렸다. 잔뜩 기대했는데 웬걸? 동화 평은 한마디도 않고 옷만 비판했다. 아예 작심하고 옷차림을 난도질했다.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숨 싶었다. 그 같은 망신은 처음인지라 당황을 넘어 황당했다. 마치 남살()당한 느낌이었다. 요지는, 아이들 앞에서의 복장이 ‘불량하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전혀 몰랐던 재정이와 친구가 되어 끈끈한 정이 들어붙은 점이다. 그리고 좀 더 복장에 유념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얼마동안 잊었다가 서울에서 만났다. 그는 홍익대학교 직원이요, 나는 총신대학교 신학생이었다. 걸핏하면 자취방을 가는데 과일이나 외식으로 대접하고, 입는 옷도 아낌없이 주었다. 가끔은 자취방에서 뒹굴며 함께 자곤 했다. 그는, 외로운 무주촌뜨기의 의지처요, 잔잔한 성격에 격의 없고 정이 퍽 깊은 친구였다. 귀찮고 싫어할 법도 한데 한 번도 내색한 적이 없다.

 친구는 개봉동 모 교회에서 찬양대 지휘를 하고, 나는 지금의 아내를 만나 열애 중이었다. 마침 교회반주자를 구한다기에 금숙이를 얼른 소개했다. 친구 덕에 부천에서 서울로 입성했으니, 뽕도 따고 임도 보는 횡재였다. 지휘자와 반주자는 바늘과 실이다. 신뢰가 덜 가는 친구라면 반주자로 보내겠는가? 찰떡같이 믿는 친구여서 맘 놓고 보냈다. 한동안은 ‘애인 지켜준 값을 내 놓으라’는 농담에 파안대소하기도 했다. 내 생애에서 이런 친구를 만난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다. 이루 말 할 수없는 사랑이 아닐 수 없다.

 

  한 해의 문턱을 넘기 전에 그 친구를 초대했다. 가난뱅이 신학생에게 베풀었던 온정을 어찌 다 갚으랴마는, 단 하루만이라도 함께하고 싶었다. 약속한 날 경기도 파주에서 내려왔다. 그 시절의 서울 자취방에서처럼 이것저것을 바리바리 내놓았다. 그날 밤 우리는 옛 이야기에 푹 빠졌다. 그대로 놔두었으면 얼마나 좋은가? ‘시간 좀 보라’며 자정이 그렇게도 시기하며 소리쳤다.  

                                        (2020. 1.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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