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가 사랑했던 남자, 소세양

2020.01.22 00:42

구연식 조회 수:226

황진이가 사랑했던 남자, 소세양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구연식

 

 

 

 남녀 간의 사랑은 사회적 신분의 벽 때문에 이루지 못해서 안타까움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회적 지위나 국경을 초월하여 세기의 사랑을 보여주어 연인들의 로망이 되기도 한다. 전북 익산시를 지나가는 국도 1호선 길섶에는 사랑 이야기 전설이 가득하다.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유적지 옆 국도 1호선 건너편에는 보물 제46호로 지정된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의 사랑 이야기가 있다. 동쪽의 여자 석상과 서쪽의 남자 석상은 옥룡천을 사이에 두고 약 200m쯤 떨어져 서로 바라보고 있다. 음력 섣달 그믐밤에 옥룡천이 꽁꽁 얼면 두 석상이 서로 건너가 끌어안고 그동안 맺혔던 회포를 푼다. 새벽에 달이 기울면 헤어져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또 1년을 기다리며, 천년의 사랑을 이어온다는 전설이 있다. 쉽게 만나고 너무 쉽게 헤어져 사랑 탓만 하는 오늘의 사람들이 돌 입석의 천년의 사랑을 배웠으면 한다. 국도 1호선이 고개를 넘고 있는 미륵산과 용화산의 산기슭에는 서동과 선화공주 이야기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에도 사랑의 전설이 깃들어 있어 3척 동자도 알고 있다. 더는 설명이 필요 없는 사랑의 혼으로 이어져 온 지역이다.

 

 오늘은 대전에 사는 4촌 여동생의 아들이 대전 유성에서 결혼하는 날이다.나와 아내는 자가용으로 1시간 남짓 달려 예식장에 도착했다. 예식이 끝나고 돌아올 때는 소한이 눈앞인데도 날씨는 봄날이어서 드라이브를 하기 좋았다. 귀가할 때는 고속도로 대신 지방 국도 1호선을 타고 내려오면서 차창을 여니 기분 좋은 훈풍이 내 얼굴을 만지며 아내 머리카락을 흔들어 준다. 모처럼 우리도 신혼부부의 기분을 내면서 길가의 지형지물에 대하여 아는 체하는 소리를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계속 주고받았다. 자동차는 어느덧 충남 경계를 넘어 내 고향 전북 익산으로 진입하여 쑥고개를 넘고 있었다. 우측 용화리 탄곡마을 입구 주차장에 잠시 차를 세우고 우리 부부는 양곡(暘谷) 소세양(蘇世讓)의 신도비(神道碑)가 있는 언덕에 올랐다.

 

 이곳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용화산 아래의 용화리 저수지가 바로 발끝에 있다. 확 트인 저수지에는 맑고 잔잔한 물이 가득했다. 황진이 고향 개성에서 날아왔는지 기러기 한 쌍이 사랑놀이의 물질로 일렁이는 작은 물결은 호수를 웃음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야말로 한 폭의 화조도(花鳥圖)이다. 아내는 참 좋다! 참 좋다!를 연거푸 읊으면서 눈을 떼지 못한다. 이곳은 서너 번이나 탐방한 적이 있다. 그중에는 서예교실에서 소세양 신도비의 탁본을 하러 찾아온 적도 있었고, 수필의 글감을 얻으려 방문한 적도 있다. 그중에는 아내와 온 적도 있는 것 같아서 그런 분위기로 아내한테 이곳을 말했더니, 아내는 처음으로 와 본 곳으로 어머니 포대기 속같이 따뜻하고 아늑한 사랑의 풍광을 그저 좋아하면서도 어떤 여자와 왔느냐고 질투 반 의문 반으로 되묻는다.

 

 조선의 절세가인 황진이의 가슴을 설레게 하며 눈시울을 적셨던 사대부 대열 중에 소세양도 빠지지 않는 인물이다. 소세양은 조선 중기(성종~명종, 1486~1562)에 전북 익산시 금마면 신룡리에서 태어났다. 77세를 살면서 풍성한 삶을 영위했다. 소세양의 신도비에는 연산군 10(1504)에 진사가 되고 중종 4(1509)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직제학·승정원·동부승지 등을 지냈으며, 명종 때 좌찬성까지 올랐다. 형조판서 등을 거쳐 1533년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 때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서 호조, 병조, 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右贊成)이 되었다. 조선 시대 문관 직제에 편성된 임금을 제외한 모든 직책은 두루 거쳐서 사직 후 고향 익산(益山)으로 은퇴했다. 이런 천하의 인재 소세양이 한때는 황진이와 러브스토리가 있었다. 소세양(蘇世讓)은 서울의 유명한 벼슬아치 시절에 황진이의 소문을 듣고 동료들에게 이렇게 장담하고는 개성으로 갔다.

  내가 그녀와 30일의 기한을 정해 동거하되 하루라도 기한을 어기면 사람이 아니다.”

  그는 그녀와 정을 통하고 30일의 기한을 채우고 헤어지는 날 둘이서 개성의 남대문 누각에 올라 술을 마셨다. 이때 황진이가 시 한 편을 써서 바치며 말했던 양곡(暘谷)과 명월(明月)의 관계는 조선조 숙종 때 활약한 임방(任埅)의 수촌만록(水村漫錄)에 기록된 황진이가 일생을 통해 남성으로서 사랑했던 사람은 소세양이었다 한다.

 

 황진이가 소세양을 그리워하며 쓴 시를 가수 이선희가 노래로 번안하여 불렀던 알고 싶어요”(달 밝은 밤에 그대는 누구를 생각하세요~)는 너무 유명하다. 그런데 소세양과 황진이의 사랑 이야기는 소세양의 신도비에는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없다. 사대부 가문에 한낱 기생의 연모(戀慕)를 신도비에 각인(刻印)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을 시대적 금기사항이었다. 그러나 양곡과 명월의 혼은 불사조가 되어 오늘도 소세양의 무덤 앞 호수에서 부리를 서로 비벼대며 사랑을 속삭이는가 보다.

 

 시대의 관념과 제도의 벽 때문에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청춘들의 사랑을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청춘의 사랑은 누구에게 양보할 수도, 대신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오직 그들만의 특권을 실현하여 누리도록 해야 한다. 나는 살며시 아내의 손을 잡아 보았다. “우리는 소세양과 황진이의 하룻밤 풋사랑이 아닌, 47여 년을 지킨 천생연분이오, 그리고 묘비에 적어도 떳떳하고, 죽어서도 같은 장소에 묻힐 부부요, 혹 그간 서운한 사랑이 있었다면 용서하세요.를 뇌까리니 벌써 국도 1호선 전주 끝자락인 평화동 진입로에 이르렀다.

                                                                        (20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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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註釋)

 

신도비(神道碑) : 임금이나 종이품 이상 벼슬아치의 무덤 앞이나 근처 길목에 세워 죽은 사람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을 이르던

진사(進士) : 조선시대 소과(小科)의 하나인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사람.

직제학(直提學) :조선시대, 규장각의 정삼품 당상관에서 종이품까지의 벼슬.

승정원(承政院) :조선시대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던 관청,

동부승지(同副承旨) : 승정원의 정삼품 벼슬

좌찬성(左贊成) : 조선시대, 의정부(행정부의 최고 기관)의 종일품 벼슬

우찬성(右贊成) :조선시대, 의정부의 종일품 문관 벼슬

형조(刑曹)판서 : 조선시대 법률, 소송, 형벌 따위의 일을 맡아보던 정이품 으뜸 벼슬

호조(戶曹)판서 : 조선시대 호구, 공부, 전량 및 식량, 재화, 경제를 맡아보던 정이품 벼슬

병조(兵曹)판서 : 군사와 우역(郵驛) 따위의 일을 맡아보던 정이품 벼슬

이조(吏曹)판서 : 문관에 관한 인사행정권을 일을 맡아보던 정이품 벼슬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 : 왕명을 출납하고 궁중을 숙위 일을 맡던 정이품 벼슬

진하사([進賀使) : 조선시대, 중국 황실에 경사가 있을 때 중국에 보내던 임시 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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