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처럼

2020.02.09 12:44

정성려 조회 수:5

눈사람처럼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정성려

 

 

 

 

  별일이다. 한겨울에 눈이 아닌 비가 여름 장맛비처럼 사흘이나 계속 내렸다. 삼한사온이 뚜렷한 우리나라에서 겨울이 없어지려는 징조인가? 12월도 지나고 해를 넘어 1월 중순으로 들어섰다. 예년 같으면 눈이 내려도 여러 번 내렸을 것이다. 올해는 이상기온의 날씨가 계속되고 여기저기 계절을 잃은 꽃소식이 들려온다. 겨울비는 지나가고 나면 추워진다. 그런데 추워질 기미는 보이지 않고 봄비처럼 포근했다. 겨울다운 추위도 없이 동장군은 겨울을 잊은 채 겨울잠을 자고 있는지 이대로 봄이 올 것만 같다. 지구가 환경오염으로 온난화가 계속되면서 우리나라의 사계절에 영향을 미친 게 분명하다. 밤새 몰래 눈이 내리면 나무와 지붕, 장독대와 대지에는 눈이 소복소복 쌓여서 하얀 은빛으로 변한 세상이 너무 좋았다. 아름다운 하얀 세상을 볼 수 없게 될까봐 아쉬움이 크다. 핸드폰으로 눈 소식이 언제쯤 있는지 일기예보를 검색해보지만 눈을 상징하는 눈사람의 모형은 없다. 비를 의미하는 우산이 보일 뿐이다. 앞으로 겨울에 하얀 눈은 기대를 말아야겠다. 눈사람은 그림으로나 볼 수 있을 것 같다.

 

 눈이 내리면 빙판이 되기 마련이고 행여 미끄러져 넘어질까 봐 조심조심 걷지만 순간 미끄러져 넘어질 때도 있다. 젊을 때는 순발력이 있어 크게 다치지 않지만 나이가 들어 넘어지면 골절위험이 높다. 어머니는 설날이 다가올 무렵, 하얀 쌀을 불려 옆 동네 방앗간에서 가래떡을 뽑아 머리에 이고 돌아오시다가 눈길에 미끄러져 팔에 골절이 생기는 큰 사고를 당했다. 그 와중에도 자식들에게 나누워 줄 가래떡이 무사했다니 어쩌면 머리에 이고 있던 가래떡을 버리지 않으려고 하다가 더 큰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119에 실려 병원에 가셨고 골절 진단에 수술을 해야 한다는 처방을 받고 수술준비 검사에 들어갔다. X-레이 촬영을 마치고 가족들을 급하게 부른 의사의 말에 놀랐다. 큰 병원으로 옮겨서 정밀검사를 받아보라는 것이었다. 이미 온 몸에 암이 퍼져있어 손을 쓸 수 없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항상 건강하시던 어머니가 암이라니, 가족들은 모두 말문이 막혀 서로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큰 병원으로 옮겨 정밀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3개월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청천벽력 같은 말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우리 육남매는 어머니의 말씀은 곧 하늘이라 믿고 살아왔고 천사처럼 고운 마음씨를 가진 어머니는 집안에서는 물론 모든 사람의 본이 될 만큼 좋은 분이셨다. 그런 어머니가 3개월 밖에 살 수 없다니….

 우리 육남매는 한 시도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고 함께 했다. 저녁에는 새벽까지 남동생들이 병실을 지켰고, 낮에는 나와 여동생들 그리고 올케들이 함께 했다. 그렇게 100일이 지났다. 돌덩이처럼 단단하게 만들어 놓은 눈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녹아내리듯 무쇠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감기나 몸살을 모르고 억척스럽게 일만 하시던 어머니는 따스한 햇살이 퍼지고 꽃들이 화려하게 피던 봄날, 하늘나라로 가셨다. 자식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와 가정사 모든 것을 깔끔하게 정리하여 육남매에게 맡기고 곱고 편안한 모습으로 돌아가셨다.

 

 겨울이 오면 눈을 기다린다. 바쁘게 일상에 묻혀 살다보면 잊고 살게 된다. 그러다가 눈이 내리면 어머니 생각이 난다. 가슴이 아프다. 눈길에 넘어지면서 팔에 골절이 생겨 어머니의 병이 조금이라도 빨리 발견되어 그나마 못 다한 효를 할 수 있었다고나 해야 할까? 돌아가시지 않고 평생 우리 곁에 함께 있을 줄로만 알고 미뤘던 효도를 짧은 기간에라도 할 수 있어 불행중다행이었다.  

 

 단단하게 만든 눈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귀가 먼저 녹아내리고, 솔잎으로 만든 머리도 녹아 빠져나간다. 까만 숯덩이로 만든 눈썹도 코도 떨어지고 깊이 파놓은 입까지도 녹아 일그러진다.

 무쇠와 같던 어머니는 눈사람처럼 오랜 세월 찌든 일로 몸이 서서히 망가져 장기가 녹아내리는 줄 몰랐다. 나이가 들면 당연히 그러는 줄로 알고 아파도 참고 계셨던 걸까? 아니면 자식들이 걱정할까 봐 아프다는 말을 못하고 참고 계셨던 걸까? 병을 숨기고 참고 사셨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어린 딸들과 손이 시린 줄도 모르고 하얀 눈을 굴려 큼지막한 눈덩이 두개를 만들어 눈사람을 만들었던 때가 어렴풋이 떠오른다. 머리와 수염은 소나무 가지로 붙이고 코와 눈썹은 까만 숯덩이로, 귀는 눈을 뭉쳐 투박하게 만들었다. 제법 건사하게 만들어 마당 한 쪽에 안전하게 자리 잡아 주었다. 시간이 지나고 며칠이 지나 서서히 녹아내려 일그러진 눈사람을 죽었다며 울던 어린 딸의 모습이 떠오른다. 어머니도 겨울 내내 서서히 그렇게 가셨다. 봄의 길목에서 녹아내리던 눈사람처럼….

                                                                                         (2020.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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