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던 날

2020.02.20 12:32

김효순 조회 수:4

  내리던 날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김효순

 

 

 

 눈이 많이 내렸다. 지난해에 이어 올 겨울에도 태국으로 긴 여행을 다녀온 나로서는 거의 이태 만에 보는 눈이었다. ‘조그만 산길에 흰 눈이 곱게 쌓이면 내 작은 발자국을 영원히 남기고 싶소. 내 작은 마음이 하얗게 물들 때까지 새하얀 산길을 헤매고 싶소.’ 자주 듣던 가곡 한 자락이 저절로 흥얼거려졌다.

 창문을 열고 방충망마저 제치니 밖에서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이 춤추며 내려오던 눈송이들이 나풀나풀 방안으로 들어온다. 근사한 카페에 홀로 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을 연출하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전주천변에서 나목이 되어 마른 겨울을 견디던 가로수들도 오늘은 하얀 정장을 차려입고 한껏 멋을 부리고 있다. 물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 돌멩이들은 제 가슴 넓이만큼씩 소복이 눈을 품고 있다. 아무 소리 없이 흐르는 듯 마는 듯 고요하던 전주천이 제법 돌돌 물소리를 들려준다.

 오리가족들은 신이 나서 자맥질에 여념이 없다. 넓은 눈밭을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강아지들도 보이면 더 좋을 텐데... . 나보다 대여섯 살은 더 들어 보이는, 칠순을 눈앞에 두었음직한 여인이 셀프 카메라로 사진 찍기 삼매경에 빠져 있는 모습도 애교스럽다. 문득, 이제는 거의 잊고 살고 있는데 어릴 적 고향집 장독대 위에 소담스럽게 내려앉았던 눈과 함께 옆집에 살던 현숙언니가 떠올랐다. 얼굴이 뽀얗고 웃으면 보조개가 깊게 파이던 현숙언니는 6학년이었고 나는 1학년이었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걸까? 그 때는 지금보다 눈이 더 많이 왔던 것 같다. 간밤에 눈이 내리면 등굣길은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걷기에는 험한 길이 되어 버렸다. 아이의 무릎까지 눈이 쌓였으니, 그런 날이면 옆집 현숙언니는 서슴없이 나에게 등을 내주곤 했었다.

 이듬해 읍내에 있는 여자중학교에 입학한 현숙언니는 가끔 수를 놓거나 뜨개질을 했다. 가정 선생님이 내준 숙제라고 했다. 나는 그런 언니 옆에 가만히 앉아 있는 순간도 참 좋았다. 친언니는 물론 사촌언니도 없는 나에게 현숙언니는 지금껏 ‘내 맘 속의 언니’였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우리 가족은 다른 고장으로 이사를 했고, 현숙언니는 결혼을 해서 옆집을 떠났다.

간간이 들리던 소식마저 끊어진 지도 십 수 년이 지났다. 그런데 오늘 분분히 눈이 내리는 천변 길, 예쁜 볼우물을 만들어 보이면서 저만치 눈발 속을 걸어오고 있는 현숙언니를 본다. 나도 얼른 달려가서 현숙언니의 손을 덥석 잡아보고 싶은 마음 간절한 날이다.

  동네 목욕탕에 들렀다. 흩날리는 눈발 속을 헤매고 다니느라 노곤하던 몸이 금세 활력을 되찾는다. 그러다가 며칠 전부터 철모르고 피어났던 홍매화 생각이 퍼뜩 났다. 그 꽃들의 안부가 염려스러워 달리다시피 찾아갔다.

 아파트 양지녘의 홍매화는 그 눈보라 속에서도 내가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의연한 모습으로 삭막한 정원을 밝히고 있었다. 마냥 철없는 꽃은 아닌 성싶다. 미처 털어내지 못한 눈송이들을 두건처럼 눌러 쓴 채 생긋 웃는다.

 꽃술에 매달린 눈송이들을 대강 떼어 주고는 내 얼굴을 꽃송이 가까이에 대어 보았다. 진한 설중매 향내가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202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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