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26 12:42
한성덕
세리머니(ceremony)란, 어떤 일을 축하하기 위해 벌이는 의식이다. 운동경기에서 골을 넣거나, 혹은 승리한 선수가 기쁨을 나누며 축하하는 행위다. 자신의 승리를 자축하면서 남에게 알리는 양면성이 있다. 어디까지나 승리자의 것이지만, 그 모습을 보는 관중들도 함께 즐기며 열렬히 박수를 보낸다.
나도 축구사랑만큼은 광팬이다. 고등학생 때는 축구선수로 선발되기도 했었다. 그 당시 100m 기록이 12.2초였으니 축구실력에 뜀박질이 한몫 했다. 전라북도 군 대항에 무주군대표로 출전했으나 첫 게임에서 골을 넣지도 못하고 패하고 말았다. 그 바람에 세리머니는커녕 그 즉시 ‘고향 앞으로 갓!’ 이었다.
그래도 나름의 세리머니 경험은 있다. 총신대학교 4학년 때였다. 5월 축제 끝날의 마지막은 늘 축구경기였다. 결승전에서 신학대학원 3학년과 붙었다. 연장전까지 치르고도 승부차기에 돌입했다. 그 마지막 볼 하나를 골키퍼인 내가 막아내서 이겼다. 두 손을 하늘로 쭉 뻗으며 ‘와!~’하고 괴성을 질렀다. 그리고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동료선수들이 덮치는 통에 압사당하는 줄 알았다.
이런 이력 때문인가? 특히, 축구선수들의 세리머니에 관심이 많다. 경기관전 못지않은 게 골 세리머니다. 그게 없거나 흐리멍덩하면 재미가 떨어진다. 어떤 경기든지 생각대로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시작부터 세리머니를 탐낸다. 이 급한 성미를 어찌하랴? 유심히 관찰해 보면 보통 재미난 게 아니다. 그 선수의 특성이 세리머니에서 묻어나기 때문이다. 선수와 연계하면 생각 밖으로 좋은 관전이 될 수 있다. 가나다순으로 몇몇 선수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축구에서 키다리 김신욱은, 무릎을 꿇고 두 팔을 쭉 뻗으며 하늘을 향해 뭐라고 중얼중얼한다. 준족 문선민은 껑충껑충 뛰면서 관제탑 세리머니를 하고, 배구스타 문성민은 환한 미소로 동료들에게 손바닥 터치를 유도한다. 축구천재라던 박주영도 기도하는 세리머니를 펼치고, 한국축구의 대표 격인 손흥민은 무릎을 꿇고 잔디 위로 사정없이 미끄러지며 포효한다. 귀염둥이 이강인은 양팔을 아래로 손가락을 펴서 가슴을 확 열고 나보란 듯이 내달린다. 축구의 귀재 황의조는, 두 팔을 크게 벌리고 아래위로 휘휘 내저으며 기쁨을 만끽한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인상적인 세리머니는, 2002년 한일축구월드컵주장이었던 홍명보에게 있다. 16강을 예상했던 한국축구가 8강에서 강호 스페인과 연장전까지 치렀으나 무승부였다. 이제 승부차기에서 이기면 4강이다. 꿈이 현실로 다가왔다. 이운재 골키퍼가 하나를 막았으니, 마지막 한 골만 넣으면 4강으로 간다. 주장 홍명보가 무거운 걸음으로 볼 앞에 섰다. 그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그의 발끝을 떠난 공에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인의 눈이 집중되었다. 그 시선들이 불을 토하며 강풍을 몰고 왔나? 아니면 골대 신(?)이 골문으로 볼을 끌어당겼나? 골망이 출렁거렸다. 순간 홍 선수는 양손을 번쩍 들고 달려 나오더니, 어느덧 오른팔을 휙휙 휘두르며 활짝 웃는 얼굴로 펄쩍펄쩍 뛰었다. 기자들의 카메라플래시가 홍명보에게 팡팡 터졌다. 지구촌 한쪽이 내려앉으면서 천지가 발칵 뒤집히는 듯했다. 세월이 꽤 흘렀지만, 내게 있어서만큼은 영영 잊을 수 없는 감격의 세리머니였다.
(2020. 2. 25.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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