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림을 준비하며

2020.03.30 14:59

송병운 조회 수:17

버림을 준비하며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송 병 운

 

 

  서재 책장에 새로운 책이 들어 갈 공간이 없다. 그렇다고 책장을 더 준비하자니 아무래도 의미 없는 일로 느껴진다. 앞으로 얼마나 책을 보겠냐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읽지 않는 책을 버리고 새 책으로 채우면 되는 것이다.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책 중에는 요즘에 손에 닿은 적이 없고, 앞으로도 거의 가능성이 없는 것이 많다. 그것들을 버리면 된다. 대부분 전공서적인 역사관련 책이다.

 

  역사학자가 되고 싶다는 욕심으로 대학을 갈 때 사학과를 선택했었다. 틈나는 대로 서점에 들러 책을 구했고, 때론 귀한 역사서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고서점을 돌아다니곤 했다. 역사 전공서는 수요가 적다보니 대개 비싸고 구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복사본을 만들기도 했다. 특히 대학원에 다닐 때는 전공서 한 권을 구하면 왜 그렇게 행복하고 좋았던지…. 그처럼 많은 돈과 정성을 다해 준비했던 책들이 이제 쓸모가 없어졌다. 아니 책장만 차지하고 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다보니 새 책들이 들어와도 책장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이곳저곳에서 푸대접을 받았다. 지난번 이사할 때도 많은 책을 버렸던 생각이 난다. 그때도 꽤나 속이 상했었다.

 

 전공서적은 버리는 것보다 대학교에 기증하는 것이 좋겠다며 학과교수에게 연락을 해보았다. 그러나 그 곳에도 퇴직한 교수들이 기증한 책들이 많고, 예전의 귀한 책들이 이제는 인터넷에 올라 있거나 컴퓨터로 자료화되어 있어 필요성이 적어졌단다. 그러니 우리 집에 있는 책은 갈 곳이 없었다. 망설임 끝에 책장에서 역사서를 중심으로 필요 없다고 생각되는 책을 꺼내어 박스에 담았다. 오랫동안 손길이 닿지 않아서인지 먼지도 쌓여있고 퀴퀴한 냄새마저 났다. 나의 손때가 묻어있는 것도 있고, 어떤 것은 필요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샀는데 책꽂이에 있다가 그냥 박스에 들어가는 것도 있었다.

 

 책을 현관에 내놓고는 또 며칠이 지났다. 자꾸만 망설여졌다. 그래도 오늘은 버려야지, 그래 버려야지 하며 버티다 아파트 쓰레기장으로 가지고 갔다. 일반 책들은 아까워도 버릴 수 있었는데 역사서에서 손길이 멈춰졌다. 못내 아쉬워하며 한 권씩 뒤적이는데 표지에 메모가 보였다. 책을 구입한 날짜와 서점 이름, 그리고 구입가격…. 살짝 눈물이 걸리며 망설임이 짙게 다가왔다. 긴 숨을 내쉬다 다시금 집으로 들여왔다. 지금은 쓸모없다지만, 이들은 나의 꿈과 세월이 고스란히 묻은 사랑이요 내 삶의 흔적이었다.

 

 한경선 작가의 수필 <개밥바라기별 뜰 때>가 떠오른다. 그동안 모아놓은 책을 버리는 아픔을 엮은 글이다. 특히 이사를 하면서 본인의 첫 수필집 중 남은 것을 버리는 대목에서는 가슴이 뭉클하게 저려왔다. 지금의 내 마음도 그러하다. 이런 것을 동병상련이라 하던가.

 

 새 주인을 만날 수는 없는 것일까. 비록 나에게는 필요 없을지라도 정말 필요한 사람이 한 명도 없을까? 혹시 필요로 하는 사람이 나온다면 새롭게 살아갈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간사한 게 사람의 마음이다. 이렇게 마음을 먹으니 쓸모없어 불쌍하게 보이던 책들이 더욱 아까워졌다. 다시금 그 책들에 생기가 돋아나는 것 같았다. 비록 나는 필요 없지만 언제든 누군가에게 곱게 보내고 싶었다.

 

  법정스님은 <버리고 떠나기>라는 산문에서 “버리고 비우는 일은 결코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모습이다. 버리고 비우지 않고는 새것이 들어설 수 없다. 그러므로 차지하고 채우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침체되고 묵은 과거의 늪에 갇히는 것이나 다름이 없고, 차지하고 채웠다가도 한 생각 돌이켜 미련 없이 선뜻 버리고 비우는 것은 새로운 삶으로 열리는 통로다.”라고 말씀하셨다. 스님의 이야기는 가진 물건을 버리라는 것도 있겠지만 묵은 생각이나 삶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리라. 그런데도 나는 내 멋대로 받아들여 책을 버리는 것에만 용기를 얻으려 했다. 참으로 엉뚱한 생각임에 틀림없다.

 

 서재를 정리하며 헌책을 버리면 서재도 여유롭고 마음도 편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생명이 다하여 의미를 갖지 못하고 있는 것들을 마냥 끌어안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소유하고 있는 물건이든 머릿속의 생각이든 늘 새롭게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평생을 살아오면서 묶여진 생각, 삶의 태도를 바꾸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제는 더욱 알 것 같다. 묵은 책하나 버리는 것도 이렇게 어려운데 말이다. 그래서 법정 스님은 지금까지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면 그는 새로운 삶을 포기한 인생의 중고품이나 다름없다며 묵은 것을 버리는 것이 새로운 삶을 여는 통로라 했나 보다. 책도 버리고 답답한 나의 생각이나 삶의 태도도 시원스레 버리어 책장은 물론 마음까지 새롭게 정리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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