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빚

2020.05.04 13:11

정남숙 조회 수:0

마음의 빚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정남숙

 

 

 

  우리가 흔히 ‘사람 인()’ 자를 풀이할 때, 사람은 혼자 살 수 없고 서로 기대고 의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의미라고 한다. 한자(漢字)로 사람을 칭하는 ‘사람 인()자를 보면 재미가 있기도 하지만 오묘한 진리가 숨어있음을 느끼게 된다. 사람 인자는 작대기 두개가 서로 붙어서 지탱하는 모습의 글자다. 나와 남이 서로 지지하고 받쳐주며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라는 의미다. 사람 인자는 아주 간단한 글자여서 누구나 쓸 수 있으며, 이 글자를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그 간단함 속에는 너무도 깊고 오묘한 철학이 담겨 있다. 나도 더불어 사는 짧은 기간이지만 서로 의지하며 힘이 되었던 분에 대한 ‘마음의 빚’을 갚을 수 있었다.

 

 그 분과의 만남은, 우리 내외가 40여 년의 타향살이를 끝내고 부푼 희망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와 농장을 가꾸던 10여 년 전이다. 농사일에 전혀 경험이 없는 남편을 다독이며 농장을 일구고 있을 때, 내 형제·친척 외에 제일 먼저 우리에게 다가와 말벗이 되어준 분이다. 새벽부터 밤중까지 농장에 엎드려 지내는 우리에게 처음에는 4륜 전동차(電動車)를 타고 지나시며 아는 체를 하시더니, 어느 날 농장에 찾아와 말을 붙이셨다. 직접 뵙기는 처음이지만 동생을 통하여 그분에 대한 대강을 들어 알고 있었다. 짐작대로 조그맣고 깡마른 몸집에 목소리는 카랑카랑했었다. 그 후론 매일같이 우리 농장으로 출근을 하셨다. 밭두둑에 앉아 자신의 과거사를 풀어놓으셨다. 그동안 자존심을 내세우며 동네 이웃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부분까지도 털어놓으셨다. 점심때 자장면이나 짬뽕을 같이 나눠먹기도 하며 이웃식당에도 같이 동행하게 되었다.

 

  이 분은 우리농장 근처 복지시설(福祉施設)을 운영하는 원장님이셨다. 우리가 귀농하던 즈음에 음해(陰害)하는 자들로 인해 억울하게 모함(謀陷)을 받아 복지시설이 폐쇄되어 자식같이 돌보며 키우던 원생들을 모두 빼앗기고, 홀로 남은 본인은 집행유예기간임을 어렵게 고백하고 있었다. 의지할 곳이 모두 사라지고 할 일이 없어진 이 분은 날마다 우리 농장에 들러 우리와 대화하는 일이 이 분이 할 수 있는 일상(日常)이 된 것 같았다. 어느 날 그분이 오시지 않았다. 오늘은 늦잠을 주무시고 쉬시나보다 했는데 왠지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일손을 멈추고 옆에서 일하는 남편을 앞세워 그분의 집으로 찾아가 보았다. 허름한 소파 위에 담요를 아무렇게나 포개놓고 그 속에 사람이 들어있었다. 깜짝 놀라 119에 전화에서 예수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원인인즉 추운 겨울 날씨에 노출되어 급성폐렴으로 긴급한 상황이 벌어질 뻔했다고 한다. 며칠 후 퇴원하여 겨우 농장에 찾아온 그분은 자기를 살려준 은공을 무엇으로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그 분이 거처하는 곳은 넓은 복지관과 사무실 등 온전한 건물이 있는데도 맨 위쪽 작은 건물 처마에 덧대어 만들어놓은 비닐천막 같은데서 장작 난로와 맨 땅에 소파하나 의지하고 침식(寢食)을 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돌보던 원생들이 어디서 고생하고 있을 텐데 자기만 편안한 잠자리에서 지낼 수 없다는 부모의 심정일 것 같았다. 겨울이 되니 비닐을 23중으로 둘러치고 있었는데 겨울 찬바람이 비닐은 날려버려, 한데 같은 추위가 그대로 스며들어 생사의 길을 오가는 위험한 일을 당한 것 같은데, 정작 본인은 자기를 해코지 하려는 집단들이 밤중에 몰래 비닐을 걷어 치워 자기를 죽이려 했다고 한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으나 조금은 피해망상(被害妄想)에 빠진 것 같기도 했다. 이후로는 더욱 친근하게 대하며 보살피기로 했다. 점심 저녁은 거의 한 식구처럼 지내고 있었다. 날씨가 풀어지고 몸이 좀 우선해지니 나에게 갈 곳이 있다며 운전을 부탁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화훼농장을 찾았다. 봄꽃이 만발한 농장에서 꽃들을 골라 원생들이 다 떠나 빈집이나 다름없는 을씨년스런 복지원에 꽃길을 만들고 자기 좁은 처소에도 화분을 가득 쌓아놓고 좋아라하셨다. 일일이 꽃 이름과 꽃말을 일러주며 키우는 노하우도 나에게 전수해 주셨다. 덕분에 우리 농장도 꽃동산을 이룰 수 있었다.

 

 

 

 이 분은 남북 이념이 부딪히는 현장에서 아버지와 형제들이 죽어가는 처절한 고통과 비극 속에서 살아 왔다. 어려서부터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 6·25참상을 목격하고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겠다고 스스로 거세(去勢)하여 자신의 일생을 헌신(獻身)하겠다고 결심한 분이다. 지식과 상식도 풍부했다. 전주고등학교를 거처 한신대를 나와 목회를 시작했으나 원치 않는 폐병이 찾아와 지리산골짜기에 쌀 여섯 가마로 10만 평의 땅을 마련하고, 2마리로 목장을 시작했다고 한다. 10년이 지나 80마리의 소를 기르게 되자 그는 다시 그 곳을 팔고 1978년 현재의 이곳으로 돌아와 부랑아(浮浪兒)를 위한 복지시설을 운영했다. 5만여 평의 땅을 개간하여 자립 자활의 길을 개척했다. 넓은 온실을 마련하여 원생들의 사회복귀를 위한 자립기반을 위한 화훼농장을 운영하며 유기농 비료를 활용한 작업으로 복지원 입구 2~3Km 길 양편에 철따라 꽃길을 조성해 인근 주민들을 즐겁게 하기도 했었다.

 

  이러한 관계를 유지하며 지내던 중 나에게 심한 어려움이 닥쳐왔었다. 이분은 몇 번이나 나를 찾아와 위로하며 힘내라고 고기를 사 먹여주곤 했었다. 그러나 내가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간간히 안부만 들었는데, 어느덧 나도 잘 계시겠거니 그분을 잊고 있었다. 지난해 갑자기 그 분이 생각났다. 언제나 그 곳에 계실 것 같았는데 연세가 90이 다 되었을 것을 생각하니 조바심이 났다. 바로 찾아가 보니 그의 거처는 이미 쑥대밭이 되었고 인적은 찾을 길이 없었다. 이웃에 물어도 모른다고 했다. 동생에게 부탁하여 지자체와 아는 지인들을 수소문해도 알 길이 없었다. 양로원에 들어갔을 것이란 말만 들었으니 어디에 있는 곳인지 알 수도 없었다. 돌아가시기 전 꼭 한 번은 뵙고 고맙고 감사했노라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래야 내 마음의 빚을 내려놓을 것 같았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는 말은 맞는 것 같다. 내 마음을 누르고 있던 그 분 소식을 들은 것이다. 인편을 통해서가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서였다. 우연히 스마트폰을 펼치고 그 분 이름을 처 봤다. 그 동안 몇 번을 검색해 봐도 전혀 없었는데 거짓말 같이 그분의 근황이 나왔다. 곧바로 글 올린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봤다. 그 분과의 관계를 말하고 거처를 물어 아직은 생존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기다리거나 미룰 것도 없었다. 눈보라치는 길을 나섰다. 병상으로 달려가 ‘날 알아볼 수 있느냐?’고 물으니 한참만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음료수도 마실 수 있으며 글도 읽을 수 있다고 했다. 얼른 차속에 있던 내 수필집을 꺼내 보이니 “제목이 멋있네!" 하며 웃었다. 평소 그의 마음처럼 창가에 화분이 몇 개 놓여있었다. 화분 곁에 내 책을 놓아 달라 하더니 화분 하나를 가져가라 했다. 옛날일이 생각나셨나보다.

 

 삼년 묵은 체증이 싹 없어진 것 같았다.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날 알아볼 수 있을 때 만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내 나름의 ‘마음의 빚’을 갚은 것 같았다. 이렇듯 사람의 관계는 ‘사람 인()’자처럼 너와 나 서로 비스듬히 기대며 사는 것임은 알 수 있었다.

                                                                        (2020. 5. 4.)

 

 

 

 

 

댓글 0

파일 첨부

여기에 파일을 끌어 놓거나 파일 첨부 버튼을 클릭하세요.

파일 크기 제한 : 0MB (허용 확장자 : *.*)

0개 첨부 됨 ( / )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227 다름을 인정할 줄 알아야 김길남 2020.03.21 0
2226 몽돌 정근식 2020.08.26 0
2225 비빔밥 두루미 2020.01.02 0
2224 2019년 우리 집 10대 뉴스 정성려 2020.01.02 0
2223 2019년 우리 집 10대 뉴스 김용권 2020.01.02 0
2222 창임 섬 김창임 2020.02.05 0
2221 새로운 다짐 곽창선 2020.02.24 0
2220 묵언 전용창 2020.02.24 0
2219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야 박제철 2020.02.24 0
2218 달팽이가 간다 강순 2020.02.24 0
2217 엘리베이터를 타는 날 정석곤 2020.02.24 0
2216 방콕생활 열하루 째 김학 2020.02.29 0
2215 강제휴가 홍성조 2020.03.16 0
2214 김상권 후배의 선종을 애도하며 김길남 2020.05.04 0
2213 알아야 면장을 하지 박제철 2020.04.27 0
2212 나도 확찐자 정남숙 2020.05.02 0
» 마음의 빚 정남숙 2020.05.04 0
2210 새로운 일상 하광호 2020.05.06 0
2209 뻐꾸기의 심술 한성덕 2020.07.16 0
2208 나그네 이우철 2020.07.16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