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21 19:13
물처럼 살고 싶어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김성은
비온 뒤 청량한 공기가 상쾌하다. 바쁘게 출근준비를 하며 오늘은 모처럼 보온병에 커피를 챙겼다. 평화로운 루틴에 감사하며 활동보조 선생님 차를 탔다.
1교시 T전화 그룹콜로 온라인 수업을 했다. 한 달 남짓 해보니 새로운 수업형태인데도 학생과 교사 모두 무리 없이 적응되었다. 코로나19가 하루 속히 잠식되기를 바라며 등교일을 손꼽아 보지만 꺼진 듯 꺼지지 않는 감염의 불씨가 이 곳 저 곳에서 우리를 위협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요 며칠 사납게 쏟아지던 빗줄기에 먼지가 씻겨 나간듯 코로나19 바이러스도 말끔히 사라졌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비가 참 좋다. 대지를 촉촉하게 적시며 온갖 생명체들의 숨통을 푸르게 터주는 것 같은 넉넉함이 좋고, 내 마음의 묵은 떼를 말끔하게 씻어 주는 것 같아서 언제나 반갑다. 휴대폰으로 빗소리 ASMR을 다운 받아 듣고 있으면 바깥 풍경과는 관계없이 내 귀가 빗소리로 가득 찬다. 내 세계가 열리는 문인 두 귀가 메마른 가슴에 단비를 뿌려주는 것 같아서 문득 울컥해질 때도 있다.
막 설거지한 그릇이나 샤워한 몸, 물을 흠뻑 머금은 화분에서는 시작의 기운이 묻어난다. 사랑하는 커피, 와인, 맥주는 나른한 온기가 되고, 반신욕으로 찰랑이는 물결은 수 억만 개의 세포에 산소 머금은 붉은 피를 보낸다. 사는게 거짓말 같아서 미치고 싶을 때는 눈물이 분노를 씻어내고, 거대한 물보라로 출렁거리는 파도가 내 미미한 한숨을 덮어 주는 것 같다. 워터 슬라이드에 몸을 싣고 기세 좋게 미끄러지는 내 딸 유주의 환호가 꿈같고, 진흙으로 진창이 된 어린이들의 신발과 손과 옷이 시원한 물줄기에 깨끗이 씻겨 나간다.
굳었던 얼룩을 녹이고 희석의 묘미를 아는 물은 고집 부리지 않고 욕심 부리지 않고 흐른다. 수용하지 못할 부피가 침범했을 때는 지체 없이 자기를 버림으로써 딱 그만큼의 자리를 내어 주고, 아집도 저항도 없이 묵묵하다. 집체만한 배를 띄워 주며 더 큰 세계에서 하나가 된다. 잘 섞이고 스미며 자정하는 의연함까지, 물은 성직자를 닮았다. 맹렬히 타오르는 불길을 잠재우고, 색깔도 맛도 향도 없이 순하게 포용하는 미덕이 아름답다. 나도 물처럼 살 수 있을까?
작은 얼음틀에 갇혀서 꽁꽁 얼어버린 얼음조각같이 좁고 뾰족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봤다. 크고 넓은 곳을 향해 유연하게 흘러가도 좋았을 내 지난 날들이 후회스럽다. 정직하게 스스로를 마주하면 길이 보일까? 물처럼 유유히 흘러갈 수 있을까? 깊게 패인 감정의 골도 피곤한 주름살도 굽이굽이 흘러서 마침내 드넓은 바다에 닿으면 기적같은 화합의 물쌀이 지친 우리를 맞아줄까? 습지는 온갖 생명체를 잉태하고 번식시키며 성장하게 한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경계 없는 습지주의자로 살 수 있으면 좋겠다. 때로는 형체 없는 수증기로 기화되어 없는 듯 느긋했다가 순서가 되면 무한히 순환하는 그 침착함을 닮고 싶다. 먼 길 흘러 흘러 마침내 닿는 곳에 당신이 있었으면 좋겠다.
(2020.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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