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검다리를 건너며

2020.07.12 18:45

한일신 조회 수:5

징검다리를 건너며

    안골은빛수필문학회 한일신



  겨우내 목이 탔던 메마른 대지를 촉촉이 적시며 봄비가 내린다. 봄을 부르는 소리에 개나리가 노오란 덧니를 내보이며 미소를 짓지만, 세상은 불청객 코로나19로 인해 엄동설한이다. 며칠 동안 바깥세상과 단절된 채 지냈더니 어디선가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히다. 
 

  그 소리에 나는 벌떡 일어나 마스크와 모자로 중무장을 하고 집을 나섰다. 거리는 한산했지만, 햇빛은 부드럽고 따사로웠다. 모처럼 전주천변을 따라 걷다가 징검다리에 시선이 끌렸다. 남천교 근처에서 징검다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더니 어릴 때의 추억이 불현듯 떠올라 잠시 걸음을 멈췄다.

   마음은 곧장 그쪽으로 달려갔지만, 발길을 쉽게 옮기지 못하고 있는데 어떤 엄마가 어린아이와 다정히 손을 잡고 건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더는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데크로 된 계단을 따라 내려갔더니 또 한 아이가 엄마 손도 잡지 않고 혼자서 징검다리를 건너오고 있는 게 아닌가?

   이 모습을 보자 내 어릴 적 추억이 살아났다. 내가 전주초등학교 3학년쯤 되었을 것이다. 전주 황방산으로 소풍을 갔는데 냇가에  듬성듬성 놓여있는 징검돌을 딛다가 일이 생겼다. 앞서가는 반 친구를 열심히 따라가는데 걸음걸이가 조금 뒤뚱거렸다. 그러더니 아차! 하는 순간 발이 꼬이면서 나는 그만 물속으로 퐁당 빠져버렸다.
 

  놀라기도 했지만, 옷이 다 젖어 부끄럽고 창피해서 곧바로 툭툭 털고 일어났다. 또다시 빠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떨리는 다리에 힘을 줘가며 조심조심 건너갔다. 그렇게 징검다리를 겨우 건넜을 때 무슨 큰일이나 치르고 난 것처럼 마음이 홀가분해지며 살 것 같았다. 지금은 마전교가 생겨서 지난 그때의 모습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추억만 맴돌 뿐이다.
 

  한 번은 외나무다리를 건너갈 때였다. 다른 아이들은 꼿꼿이 서서 껑충껑충 잘도 가는데 나는 앉아서 거북이처럼 엉금엉금 기어가듯 건너갔다. 그런가 하면 얕은 냇물을 건널 때도 깊은 물을 건널 때처럼 다리가 떨리고 어지러워서 누군가 옆에서 부축해주지 않으면 한 걸음 떼기가 힘들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어릴 적부터 매사에 민첩하지 못하고 굼뜬 편이었나 보다. 살아가면서 좀 나아지겠거니 싶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혼자서는 잘하는 일이 별로 없다. 항상 조바심 속에 살고 있으니 언제쯤이나 벗어날 수 있을까?
 

  오늘 찾은 징검다리는 전주 한옥마을 - 경기전길로 이어지는데 어릴 때 벌벌거리며 건넜던 징검다리와는 전혀 달랐다. 큼지막하고 널찍한 돌들이 다닥다닥 놓여있어 네 살배기 외손자도 건널 수 있을 것 같았다. 모처럼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징검다리를 건넜다.


   건너가다가 돌 틈 사이로 흐르는 맑은 물소리에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도란거리며 흐르는 물들이 고요한 정적을 깨트리며 시원스럽게 흘렀다. 순간 내 안에 오랫동안 짓눌려 있던 마음속의 찌꺼기도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함께 씻겨 나가는 것 같았다. 큰물에도 쉽게 휩쓸리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야무지고 단단한 이 돌들의 이끼 사이로 피라미들이 들락거리면 해님도 가끔 구름 사이로 몸을 숨기며 같이 숨바꼭질을 하는 모습이 퍽 운치가 있었다.
 

  아무리 이리저리 밟아보아도 뒤뚱거리지 않고 굳건히 자리를 지켜내는 징검다리와 쉼 없이 흐르는 물을 바라보고 있자니 내 삶도 이랬으면 싶었다. 오랜만에 정체停滯된 일상에서 벗어나 경쾌하게 흐르는 시냇물 소리와 새소리에 귀를 기울였더니 우울하고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내를 건너기 위해서는 다리가 필요하다. 나는 튼튼한 시멘트 다리보다 옛 추억이 점점이 박힌 돌 징검다리가 더 좋다. 만일 그런 징검다리 어느 한 부분이 무너지거나 물에 휩쓸려 떠내려간다면 어찌 다리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굵직하고 평평한 돌들이 하나의 돌인 듯 이어진 징검다리를 이쪽에서 저쪽으로 오가며 이 무거운 돌을 옮겨온 누군가의 수고에 감사를 드린다. 
 

  나는 살아오면서 비교적 평탄한 길을 걸어왔지만, 때로는 어렵고 힘들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수많은 디딤돌을 밟으며 여기까지 왔다. 이제는 나도 가는 길 막힘 없이 가슴 틔우며 누구나 편히 건널 수 있는 징검다리로 살아가고 싶다.
                                             

                                                                                  (202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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