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두막과 개똥참외

2020.07.21 19:39

구연식 조회 수:2

원두막과 개똥참외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구 연 식

 

 

  비닐하우스나 온실재배시설이 없던 시절, 여름 한 철 밭농사의 특용작물로는 수박과 참외가 농가 소득의 한몫을 차지했다. 수박, 참외밭을 관리하거나 쉬면서 사러 오는 손님들을 맞이하는 장소로는 그 밭머리에 지어 놓은 원두막(園頭幕)이 있었다. 냉방시설도 없던 시절이라 한여름에는 논밭에서 일하던 마을 사람들의 유일한 만남과 피서처로 허름하지만 나름의 낭만과 추억이 가득 찼던 곳이다. 원두막은 고구려 고분벽화나 가야의 집모양토기(家形土器)에서 비슷한 예를 볼 수 있어. 원두막은 원시시대부터 여름의 임시 살림집으로 오랫동안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우리 집 밭은 마을 어귀에 있으면서 금마시장을 오가는 신작로에서 가까워 원두막의 위치로는 최적의 장소였다. 속성 재배 방법이 없이 보통 재배의 경우 참외와 수박의 출하 시기는 여름방학 때쯤이었다일손이 바쁜 아버지는 논과 밭에서 일하시고, 나는 낮에는 원두막에서 여름방학 책으로 공부를 하면서 손님이 오면 아버지에게 알려드리는 것이 여름방학 때 나에게 주어진 원두막 당번의 임무였다. 그리고 밤에는 아버지가 원두막을 지키셨다. 아버지는 금마장날에는 시장 내 채소·과일가게에 도매가격으로 넘기시고, 평일에는 원두막에서 소매로 파시는 것이었다. 식구들은 잘 익고 좋은 참외와 수박은 먹을 수 없었고, 깨졌거나 모양이 예쁘지 않고 팔리지 않은 것만 먹었다. 점심때도 잠깐 자리를 비우면 안 되기 때문에 나는 집으로 달려가서 찬물에 밥을 말아서 고추장에 멸치를 찍어서 후다닥 먹고 다시 원두막으로 갔었다.

 

 원두막에는 아버지의 목침과 과일 깎는 칼, 어머니가 출출할 때 먹으라고 꽁보리를 사카린과 가마솥에서 튀긴 보리 튀밥이 있었다. 그리고 더는 낡아서 쓰지도 못할 아버지의 밀짚모자는 아마도 가을에 힘없어도 참새 쫓는 허수아비로 쓰일는지 원두막 천장 난간에 매달아 놓았었다. 아버지의 밀짚모자 검은 테를 보면 흑백영화 헌 필름을 잘라서 붙여 놓아서 검은 테를 벗겨서 햇빛에 비춰보면 필름 속의 장면에 빠져 무료한 한나절을 때운 적도 있었다. 여름날의 긴긴 낮을 보내면서 서쪽에 있는 기와집 등 같은 금마산에 해가 넘어가기를 기다려도 아니 넘어가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가 잠이 잠깐 든 사이 해는 벌써 넘어가 땅거미란 놈이 엉금엉금 다가와 무서움을 주는데도 아버지는 오시지 않더니, 늦게 와서 미안하다는 표시인지 헛기침 소리와 담뱃불 껌뻑거리는 불빛이 밭두렁을 올라오시면 나의 일과가 끝난다.

 

 어느 날 저녁에는 소나기가 몹시 내려서 아버지는 그냥 집으로 오셔서 집에서 주무셨다. 나는 아침 식사 후 주전자에 물을 넣고 달랑 방학책 한 권을 들고 원두막으로 갔다. 그런데 밤사이 그렇게 소나기가 퍼부었는데 수박 서리를 당했다. 잘 익은 수박 참외를 몽땅 따갔다. 집으로 달려와 아버지에게 알렸다. 아버지도 바로 올라오셔서 간밤에 비가 와서 아직도 발자국에 고인 흙탕물과 참외 수박 덩굴 잎사귀가 떨어진 곳을 따라가 보니 이웃 대정마을로 넘어간 것만 확인했지 도둑은 뒤로 잡아야지 앞으로 잡지 않는다.’라는 말처럼 서리 맞은 것이 그리 크지 않아서인지 아버지는 그냥 포기하셨다.

 

  어느 나른한 오후 주전자에 물도 떨어져서 목은 마르지, 햇볕이 유난히 쨍쨍 내리쬐는데 수박이 엉덩이를 하늘로 쳐들고 있어 따먹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그런데 수박은 너무 커서 혹시 아버지가 중간에 오시면 먹다 말아서 영락없이 들킬 것 같았다. 수박보다는 삽시간에 먹어 치울 수 있는 참외를 따서 먹기로 하고 누렇게 익고 배꼽이 튀어나온 참외 하나를 따서 깎을 시간도 급해서 한 움큼 입으로 베어서 혀로 밀고 앞니로 껍질을 벗겨가며 정신없이 먹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아버지의 밀짚모자가 하늘거리며 걸어오셨다후다닥 참외 껍질을 발로 밟으면서 황토 속에 밀어 넣고, 먹다 남은 참외는 밭고랑 멀리 던져 버렸는데 순간 아버지가 그것을 모두 보셨다. 이제는 아버지한테 혼날 일만 남아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서 있는데, “땄으면 그냥 먹지 왜 버리느냐?” 하시면서 몇 푼 벌자고 정작 자식들에게는 좋은 참외, 좋은 수박을 못 먹게 하신 것이 미안하셨는지, 아주 잘 익은 참외 하나를 따서 깎아서 나에게 주시고 아무 말 없이 집으로 가셨다. 나는 아버지가 깎아 주신 참외를 받고 아버지의 속마음을 알고서는 겨우 참외 하나를 먹었다. 그날 저녁 아버지는 마당에 생 쑥과 보리 까끄라기로 모깃불을 피워놓고 원두막으로 가시더니, 수박과 참외를 한 소쿠리 따오셔서 밀짚 방석에 둘러앉은 식구들에게 그해 참외 수박 농사 처음으로 포식을 하게 해 주셨다. 수박을 너무 많이 먹어서인지 식구들은 밤새도록 화장실만 들락날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할머니는 막내 작은집에 사셨는데 참외 수박밭에는, 한 덩어리라도 더 팔아서 가용 돈에 보태라는 뜻인지 통 비깜을 안 하셔서 가끔 할머니댁에 아버지의 수박, 참외 심부름을 갔었다.

 

 참외, 수박 수확 계절이 끝나면 여름방학도 끝났다. 그렇게 여름방학 동안 원두막 당번으로 열심히 일해서 그해 추석 때 아버지는 검은색 학생복과 운동화를 사주셨다. 학교에서 집에 올 때 원두막 부근 임시 화장실로 사용했던 산골짜기를 일부러 둘러 나오면 개똥참외 개똥수박이 얼마 남지 않은 가을 햇볕에 익어가는 열매가 올망졸망 붙어있었다. 그것은 지난여름 때 아버지 몰래 원두막에서 내가 따먹고 난 흔적이었다. 지금도 산야에 가면 누가 실례했는지 개똥참외가 있어 원두막과 아버지가 떠오른다.

 

                                                                          (2020. 7. 22.)

 


 

 

댓글 0

파일 첨부

여기에 파일을 끌어 놓거나 파일 첨부 버튼을 클릭하세요.

파일 크기 제한 : 0MB (허용 확장자 : *.*)

0개 첨부 됨 ( / )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47 남의 실수에서 배운다 고도원 2020.07.19 3
546 산과 삶에 대한 명언들 힐러리 2020.07.19 46
545 지금 생각하면 곽창선 2020.07.20 1
544 새엄마를 정말 미워했어요 딸랑구 2020.07.20 1
543 벌개미취 꽃 백승훈 2020.07.21 3
542 바이칼 호수의 온도 관리 능력 고도원 2020.07.21 5
» 원두막과 개똥참외 구연식 2020.07.21 2
540 진정한 보배 김동윤 2020.07.21 2
539 [김학 행복통장(23)] 김학 2020.07.22 1
538 가로수와 특화거리 한성덕 2020.07.22 3
537 가장 중요한 일 홈스 2020.07.22 1
536 달력 속 숨은 이야기 고재흠 2020.07.23 2
535 만나면 피곤한 사람 이동희 2020.07.23 1
534 내탓 네덕 김정길 2020.07.24 4
533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정태표 2020.07.24 3
532 가을감자를 심고 윤근택 2020.07.25 10
531 두 형님 전용창 2020.07.25 3
530 주시경과 숱한 애국자들 두루미 2020.07.26 2
529 더뎅이 윤근택 2020.07.26 50
528 책을 낼 때마다 김학 2020.07.26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