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아리랑

2020.09.12 14:11

신팔복 조회 수:45

고향 아리랑

안골은빛수필문학회 신팔복

 

 

 

  아침해가 솟으면 또다시 일은 시작되었다. 가족의 생계를 맡은 사람들의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산 높고 골 깊은 첩첩산중 내 고향은 언제나 흙과 씨름하는 필사적인 삶이었다.

 

  주위는 온통 울창한 소나무 숲이었고, 산토끼도 넘나드는 깊은 산속 오솔길로 나무꾼들이 오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중간마다 쉴 바탕이 있었다. 나무꾼들은 등짐을 받쳐놓고 담배 구름을 하늘로 날리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며 호탕하게 웃을 때는 고단함도 잊었다. 한결같이 남루한 옷차림에 길목 버선을 신었지만, 숯을 굽는 사람도, 나무 장사를 하는 사람도 모두가 내년에는 조금 더 나아지겠지 하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산천은 말이 없으나 역사를 품고 흘러갔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조선 말기 고종 때부터 사셨던 할아버지 할머니의 삶은 참으로 고단한 세월이셨던 것 같다. 할머니의 이야기로는 무섭고 혹독하고 하루 지내기가 어려운 생활이었다고 하셨다. 양반의 위세 앞에 농민들은 쩔쩔매었고 한마디 대꾸도 못 하고 기죽어 살았단다. 양반들의 부패, 관리들의 당쟁, 나약해지는 왕권은 조선을 차츰 암울한 시대로 몰아넣었다. 세계는 변화하는데 그에 대처하지 못한 나라의 잘못은 금수강산을 식민지로 넘겨야 했다. 죄 없는 백성은 세계사에서도 그 유래를 찾기 힘든 왜놈들의 종살이를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총칼은 여지없이 우리 강토를 짓밟고 깡그리 뭉개버렸다.

 

  기름진 문전옥답을 빼앗고 허허벌판 이국의 땅, 만주벌판으로 내몰았다. 공출과 부역도 벗어날 수 없었다. 놋그릇도 공출했고 송진까지도 전쟁물자로 받아 갔다. 칼 찬 순사는 이장을 앞세우고 마을을 순행하며 짚가리, 나뭇단 등을 샅샅이 뒤져 조상님 제사에 쓰려고 조금 남겨둔 나락까지도 빼앗아갔다. 발각될 때면 여지없이 대가를 치렀다. 전투기에 쓰려고 기름을 짜낸 콩깻묵을 배급 주며 물에 불려 밥을 해 먹어라 하고 던져주었다. 징병과 징용에 따르지 않으면 늙은 아비를 못살게 굴었다.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 헌병대나 주재소로 끌어가 상상도 못 할 구타를 당했고, 유치장에 넣어 며칠씩 굶기기도 했다. 마치 노예처럼 다루었다. 모든 걸 빼앗기고 잃었다.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었다. 하늘을 원망하며 기구하게 살아야 했다.

 

  징용으로 잡혀가 깜깜한 막장에서 모진 고생을 했고, 징병으로 끌려가 전쟁터로 내몰렸다. 결국 총알받이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영혼이 부지기수였다. 심지어 어린 여학생들을 취직 시켜 돈 벌고, 개화된 공부까지 시켜준다는 거짓말로 꾀어서 군대 위안부로 데려가기도 했다. 할당 수가 모자라면 마구잡이로 끌어가기도 했다. 기약 없는 생이별이 이뤄졌다. 그래서 조혼하는 경향이 있었다. 얼마나 악독한 일이었던가?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비인간적 만행을 스스럼없이 저질렀다. 내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도 징용의 피해자였다. 두 자식을 보낸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얼마나 울부짖고 애간장이 녹았을까 싶다. 할머니는 매일 마이산을 찾아가 치성으로 빌었다.

 

  천지신명의 가호로 해방을 맞아 돌아오신 아버지와 작은아버지의 삶도 순탄치는 않았다. 광복의 기쁨도 잠시, 세계열강의 이념에 휘말린 우리 강토는 허리가 잘렸고, 결국 동족상잔의 쓰라린 아픔도 겪어야 했다. 농촌은 더욱 피폐하여 몸뚱이로 버텨가며 살아야 하는 길고 긴 고난의 세월이 이어졌다.

 

  실개천이 흐르는 곳이면 손바닥만 한 땅이라도 다랑논을 만들었다. 화전도 일궜다. 하늘의 뜻에 맡겨야하는 천수답에 벼를 심었다. 아예 산도(山稻)나 조, 메밀을 심기도 했다. 가뭄이 심할 때면 기우제도 지냈다. 논을 매고 피를 뽑고 서리 내리기 전에 거두려고 물꼬에 매달렸다. 쌀 한 톨이 귀했다. 산에서 풀을 베어다가 두엄을 만들어 썼지만, 땅은 언제나 거칠고 메말라 소출이 적었다. 그래서 새나 들쥐가 먹을세라 이삭줍기는 필수였다. 온갖 것을 거둬들여도 긴 겨울을 견뎌내려면 턱없이 모자라는 양식이었다.

 

  눈 녹은 봄이면 곧바로 쑥과 냉이를 캤고 산나물과 송기로도 허기를 달랬다. 몽근 등겨나 싸라기를 섞어 범벅도 만들어 먹었다. 어렵게 살던 춘궁기에는 높고도 높은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였다. ‘가랑이가 찢어지게 가난하다.’ 는 말도 거친 음식만 먹어서 뒤보기가 어려워 이때 생겨났다. 보리죽, 감자떡, 풋콩죽으로 끼니를 이어갔다. 칡뿌리나 돼지감자를 캐 먹고 도토리 밥도 해 먹었다. 옥수수 대의 단물은 아이들의 간식거리였다. 긴 겨울은 고구마와 무김치로 넘겼다.

 

  정치가 안정되고 소득이 늘면서 차츰 사회가 발전되었다. 부지런히 일하고 아끼고 모으면 자기 삶을 개척해 갈 수 있게 되었다. 길도 넓혀졌고 시장도 커졌다. 학교가 불어났고 너나없이 희망을 키워갔다. 누구나 노력해서 성공하기를 바랐다. 초가지붕이 헐렸고 울타리가 바뀌었다. 좁은 들녘에도 황금빛이 넘실댔다. 라디오가 보급되고 전기도 들어왔다. 전화기가 놓였고 텔레비전 방송을 시청할 수 있게 됐다. 냉장고와 세탁기 등 가전제품이 늘었다.

 

  노동의 가치를 존중하고 돈의 가치를 깨달았다. 소 대신 트랙터가 논밭을 갈고 있다. 비닐하우스가 많아졌고 스마트-팜이 생겨났다. 농사용 트럭에 승용차까지 즐비하다. 마을회관과 복지시설도 들어섰다. 좋아진 것이 한둘이 아니다. 어린 시절엔 상상도 못 한 큰 변화다. 슬픈 과거를 떨쳐버리고 희망차고 행복이 넘치는 고향 모습을 보면 그야말로 감개무량하다.

                                                (2020.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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