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의 사연

2020.09.24 14:25

정남숙 조회 수: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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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의 사연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정남숙







우리 집 넓은 마당 한가운데 아람드리 은행나무 한 그루가 떡 버티고 서 있는데도, 우리 집을 은행나무집이라 부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것은 우리 동네에는 감나무를 비롯하여 은행, 대추, 호두나무 등 각종 과일나무들이 울타리를 이루며 한두 주씩 없는 집이 없기 때문이다. 집집마다 작은 과수원 수준들이니 남의 집 과일을 넘보지도 않는다. 우리 집 은행나무도 그 중의 하나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 아버지가 심으셨으니 얼추 백 살은 되는 것 같다. 그러니 지금은, 그 밑둥이 어른들 둘이 맞잡아야 손끝이 닿을 정도며, 높이는 하늘을 찌르고, 둘레는 우리 집 넓은 앞마당을 온통 저 혼자 차지하듯 벌리고 서 있다.



우리 집 은행나무는 사연이 많다. 어렸을 때는 옆집 은행나무가 은행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것이 여간 부럽지 않았다. 은행나무는 다른 과일나무와 달리 암수가 마주 바라봐야 열매를 맺는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옆집에는 두 그루가 쌍둥이같이 서 있어 그렇게 많은 열매를 맺고 있는가 보다. 우리 집 앞마당에도 제법 큰 은행나무가 있다. 그런데 열매를 맺지 않는다. 수나무라서 그런가? 암나무라면 남의 집 나무라도 수나무가 지척에 보이는데 열매를 못 맺을 이유가 없었다. 열매를 기대하지 않고 가을 낙엽에 만족하며 그냥 있는 것으로 족했다. 한 해 두 해 커가며 가을에 떨어뜨리는 낙엽은 양도 점점 많아지고 태워도 타지 않는다. 바쁜 엄마의 빗 손질만 더할 뿐 아무 소득이 없으니 지청꾸러기가 되어 베어버리자는 원성까지 일었다.



차마 베지 못하고 잎이 무성한 어느 여름 날, 지나가던 사람 하나가 엄마를 찾았다. 은행나무 잎을 팔라는 것이었다. 그렇잖아도 올가을 단풍잎과 전쟁을 치러야 할 형편인데 이파리를 팔라니, 엄마는 식구들과 상의도 없이 얼른 팔아버리고 그 값을 받아 챙기셨다. 겨울나무도 아닌 것이 이파리를 억지로 다 빼앗기고 맨몸으로 서있는 것을 보신 아버지에게, 엄마는 꼼짝없이 야단을 맞으면서도 두둑한 주머니가 좋았다고 하셨다. 그런데 이 은행나무가 철이 들었는지 갑자기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우리는 또 잎을 털릴가봐 놀라서 열매를 맺는다 생각했었다. 그러나 은행나무는 싹이 튼 지 20년 이상이 지나야 열매를 맺는다고 했다. 그래서 씨를 심어 손자를 볼 나이에 열매를 얻을 수 있다하여 공손수(公孫樹)라고도 부른다는 것을 알았다.



뒤늦게 열리기 시작한 은행열매는 다른 집 은행과는 비길 바가 아니었다. 알도 굵고 양도 많아 엄마는 많은 자녀들에게 나눠주기에 바빴다. 그런데 몇 년 후, 친정집에 들러보니 은행나무의 중심 되는 두 기둥 중 하나가, 잎이 시들시들 다 죽어가고 있었다. 외양간 황소를 낮에는 끌어다가 은행나무 밑에 놓고 있어 황소의 분비물이 너무 과다해, 견디지 못하고 껍질이 벗어진 채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부부는 곧바로 뒷산에 올라가 황토를 가져다가 짓이겨 덧발라 외과수술을 해놓았다. 덕분인지 다음해 겉껍질 사이로 새순이 돋더니 다시 원가지만큼이나 자랐었다. 우리 집 은행나무의 수난은 멈추지 않았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라더니, 어느 여름날 폭우를 동반한 천둥번개를 맞아 삼분의 일쯤 많은가지를 잃고 말았다.


은행나무라 하면 떠오르는 곳이 있다. 서울에서는 가을단풍 구경하러 자주 가는 곳이 경기도 용문사 은행나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은행나무는 수령이 1,100년이 넘는 것으로, 천연기념물 제30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이 나무는 통일신라 경순왕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들어가다 심었다는 전설과,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외에도 나무를 자르려고 톱을 대었는데 그 자리에서 피가 났다는 이야기와, 정미의병(1907) 항쟁 때, 일본군이 용문사에 불을 질렀는데 이 나무만 타지 않았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이렇듯 은행나무는 불에 잘 타지 않고, 병충해에 강해 오래 살 수 있어 흔히 정자나무로 많이 심었다고 한다.



가을녘 들길에서 만난 노란 은행나무의 잎은 가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어서 좋다. 그러나 도심의 공해에 매우 강하고, 단풍이 아름답다는 이유로 심은 가로수 은행나무는 아주 귀찮은 존재가 되고 있다. 옛날에는 도로변에 떨어진 은행 열매를 줍기 위해 단속반과 시민들이 숨바꼭질을 했었지만. 요즘은 달라졌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떨어지는 낙엽을 모아 걷고 싶은 낙엽거리를 만들자는 낭만파도 있지만 바람만 불면 사방으로 흩날리는 이파리는 미화원들의 골칫거리다. 그러나 사실 문제는 이파리가 아니다. 열매가 떨어져도 주워가는 사람도 없고 도리어 시민들이 밟거나, 자동차 바퀴에 짓이겨지면 풍겨 나오는 악취가 문제다. 이 고약한 냄새는 씨를 둘러싸고 있는 물렁물렁한 겉껍질에서 발생한다. 겉껍질은 고약한 냄새뿐 아니라 알레르기를 유발하는 성분을 가지고 있어 옷이 오른 듯 가려움증으로 고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기억에 남는 곳이 있다. 내가 지역 민간단체장으로 있을 때 전라남도 강진군의 초청을 받았다. 여러 곳을 답사하던 중, 은행나무가 있는 병영면에 들렀었다. 고려시대 도강(道康)현의 현청이 있던 곳으로 조선 초기에 전라병영이 설치되었던 곳인데, 이 은행나무는 마을 중앙에 우뚝 솟아 마을을 대표하고 있으며, 주변에 민가 8채의 부엌, 방 밑까지 뻗어나가 왕성한 수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곳은 네덜란드의 하멜(Hamel) 일행이 7년간 억류생활을 했던 곳이며, 그들이 억류생활을 하면서 노거수 은행나무를 보았다고 「하멜표류기」에 기술했던 나무가 바로 이 은행나무였다고 한다.



올해도 우리 집 은행나무는 키가 너무 솟아 사다리차를 동원하여 10여m를 잘라 주었다. 이제는 고목이 되었나보다 생각하고 자세히 살펴봤다. 젊어서 앓은 흔적인지 속이 썩어 있는데도, 껍질로 둘러쌓인 새 가지들은 아직도 청춘이다. 장수하는 나무라니 안심이 된다. 그래도 어김없이 열매를 가득 달고 있다. 해마다 10여 포대가 넘는 수확을 한다. 그래도 동생은, 바람이 불어 미리 떨어지는 열매를 하나 하나씩 포대에 주워 담는다. 이렇게 수확한 은행열매는, 품을 사서 겉껍질을 벗겨 햇볕에 바짝 말려 잔손이 많이 간 은행들을, 형제들은 물론 이웃 그 누구든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있다.



특히, 기관지천식을 앓으신 아버지를 닮은 우리 형제들은 하나같이 기관지가 좋지 않다. 그래서 집에 있는 동생은 하나라도 더 모아 놓는다. 겉껍질을 벗겨낸 은행은 백과(白果)라 하여 식용뿐 아니라 약용으로도 쓰이는데, 폐와 위를 깨끗하게 해주며 진해·거담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밥에도 넣어먹고 간식으로 볶아 먹기도 한다. 지난해 갈무리해 놓은 백과는 아직도 내 냉동실에 보관되어 있다. 또한 징코민의 원료가 된다는 은행이파리는 방충작용을 하는 부틸산이 있어, 책에 좀이 슬지 않는다고 한다. 가을 노랗게 물든 예쁜 단풍잎을 주워 책갈피 속에 한두 잎씩 넣어두었던 낭만적 행위도 선현들의 지혜뿐 아니라 과학적인 이유도 있었던 것 같다. 길거리에 뒹굴다 쓰레기로 버려지는 은행잎을 보면 그냥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수백 년을 살아온 은행나무들은 우리주변에서 쉽게 만나 볼 수 있다. 한옥마을, 최씨 종가집을 비롯 전주향교에 있는 은행나무들은 이 가을에도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을 것이다. 우리 집의 희로애락과 모든 역사를 지켜보며 살아온 우리 집 은행나무는, 이 나무들에 비하면 아직 청년인 것 같다. "은행나무야, 부탁한다. 앞으로도 어떤 수난과 역경이 닥쳐와도 꿋꿋하게 우리 집을 편안하게 쭉 지켜주렴."

(2020.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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