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020.09.27 14:28

이우철 조회 수:2

묵향(墨香)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이 우 철

 

 

 

 취미생활을 하며 적당히 갈 곳이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은퇴하기 5년 전부터 서예를 시작했으니 벌써 오랫동안 벗이 되었다. 마음이 답답할 때, 어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붓을 잡으면 잡념이 사라지고 정신이 맑아진다. 한 글자 한 글자 쓰다보면 나도 모르게 세상 시름을 잊는다. 동호인들과 교감을 나누며 차를 마시는 것은 덤으로 주는 행복이다.

 

 나는 요즘 예기비(器碑)를 즐겨 쓰고 있다. 중국 곡부(曲阜) 공자묘당의 비문을 탁본한 것이다. 후한(後漢) 이후 1,80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까지도 훼손되지 않고 안전하게 보존되어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서법학자들은 이 비문을 일컬어 “중후와 연미의 어느 것에도 기울지 않는 중용의 품격을 얻은 예서체로 한비(漢碑) 가운데 가장 우수한 작품이다. 용필이 정교하고 방정하고도 준엄한 힘이 있다”고 평가한다.

 

 과거 이름있는 선비들은 먹을 갈며 글을 쓰는데 평생을 보냈다. 연필이나 볼펜도 없던 시절, 편지는 물론 모든 의사전달도 붓글씨로 했다.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 하여 글씨는 그 사람의 인격과 학문의 깊이까지도 평가를 받던 시대였으니 서원을 중심으로 그 열기가 대단했으리라. 서예를 하면 당연히 필력이 생기고 기교가 늘어 날렵한 선율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으니 글방선비들은 대부분 사군자를 비롯한 문인화, 산수화 등 그림에도 예술의 경지를 넘나들었다.

 

 당파에 몰려 하루아침에 귀양살이를 떠나기도 했다. 그래도 가락은 있어 주막을 드나들며 “이봐라, 주안상을 들이거라.” 큰 소리를 치기도 했지만 가난뱅이 주제에 그 술값은 어찌했을까? 유배생활을 오래 하던 다산(茶山)선생은 주모의 치마폭에 그림이나 시 한 수씩 써주며 술값을 대신했다고 하니 그 시절 멋진 풍류가 아니었던가?  여인과 긴밤을 지새우며 남몰래 결실을 맺기도 했으니 먼 훗날 몸이 아플 적 생면부지의 젊은 처자가 나타나 “아버님, 뵙시다” 큰절을 올리며 한 달간 병간호를 했다는 일화는 훈훈한 감동을 준다.

 

 요즘은 누구를 막론하고 바쁜 세상이다. 세월아 네월아 먹을 갈며 붓글씨를 배우는 사람은 줄어들었다. 아무리 인품이 좋고 재능이 뛰어난 사람도 주머니가 비어 있으면 푸대접을 받기 마련이다. 오래오래 인고의 과정을 거쳐야 하니 그걸 꺼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면 명필이 튀어나오고 크기 간격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도 있으니 명필가가 무슨 소용이랴, 그래서 대학의 서예학과도, 학원가도 그 입지가 좁아져가고 있다. 이제 복지관이나 주민자치쎈터에서 나이드신 분들이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으니 서예문화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우리는 자고이래로 한자문화권에서 살아왔다. 언어, 문자에 이르기까지 한자와는 땔 수 없는 관계에 있었으니 붓글씨도 그 맥을 함께 해온 셈이다. 우리민족의 뼛속깊이 드리워진 붓과의 인연을 누가 감히 떼어 놓을 수 있을까? 한글은 소리글이라 추상명사 기저에 한자가 숨어있다. 일부에선 한글전용을 외치지만 우리의 지력개발을 위해서도 한자교육은 전향적으로 생각할 때이다. 다만, 한자일변도의 행()․초서(草書)가 서예의 얼굴을 대신하다보니 젊은이들의 관심이 점점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행서 초서는 읽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문장을 이해하는데도 어려움이 있다. 이제 한자 한글을 병용하되 누구도 이해할 수 있는 한글서예가 대중속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한글이 세계적으로 그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는 마당에 서예가 함께 발전해 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글은 궁체가 대표적이지만 민체, 판본체, 캘리그라피 등이 다양하게 개발되어 발전해가고 있으니 다행이다. 붓을 이용하여 한글서예가 재미있는 생활예술로 승화해 나간다면 세인들의 관심도 높아질 것이다.

 

 금년 초 한 해를 시작하면서 번져온 역병(코로나19)이 이 땅을 강타하고 있다. 마땅히 갈 곳도 없어 손발이 묶이고 마음에는 통증이 일었다. 이때를 위해 준비해 두었을까? 학원에 나가 붓글씨를 쓰며 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 얼마나 반가운 친구인가?

 

 깊어가는 가을, 창가에 스며드는 햇살이 따사롭다. 두둥실 떠가는 솜털구름은 그렇게 기다리던 가을하늘이 아니던가? 나는 찻잔을 들고 묵향에 젖어 이 시간도 분에 넘치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2020. 9. 20.)

 

 

곡부 공자묘당(曲阜 孔子廟堂) : 곡부는 유교창시자 공자의 출생지로 산동반도에 있다. 2,4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노나라의 수도였던 곳이며 지금도 중국인들은 공자묘당이 있는 곡부를 성스럽게 여긴다.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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