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마을 숲정이

2020.11.19 13:55

백남인 조회 수:64

고향마을 숲정이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금요반  백 남 인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 방면으로 여행할 때면 나도 모르게 왼쪽 좌석에 앉는 경우가 많다. 태인과 원평 사이를 지나갈 때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고 유심히 바라보면 추억의 장소들이 눈에 들어온다. 풍촌(豊村)과 기름재(油峙)의 숲정이를 멀리서나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곳을 지나친 뒤에도 70년이 지난, 어렸을 적의 모든 일들이 활동사진처럼 머리에 떠오른다.

  내가 태어난 곳은 정읍군 감곡면 대신리 풍촌 마을이다. 이웃 마을들은 야산이 있기도 하고 산들이 많았는데 그 마을은 들이 넓었다. 특히 논이 많았다. 사람들은 거의 농사를 짓고 살았다. 그 마을에는 부안김씨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었다. 나의 일가는 한 집도 없었다. 풍촌은 나의 외가 마을이었다.

  그 마을엔 대농의 큰 부잣집이 세 집 있었고, 대부분은 중농이나 소농이었으며, 나머지는 전답이 전혀 없어 머슴살이나 품삯을 받는 사람들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외가의 사랑채에서 길쌈을 하고 품삯을 받아가면서 악의악식으로 전답을 조금씩 늘여가면서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사업을 하시려고 외지에 나가 계셨다.

  초등학교 다니기 전의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초등학교 다닐 적에는 몸이 건강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이들과 물고기 잡으러 다니거나 이웃 마을의 산에 가서 뛰어노는 것이 일이었다.    

  기름재와 풍촌 사이에 숲정이가 있었다. 오래된 소나무가 주로 많지만 잎이 넓은 나무들도 많있다. 50m쯤 길게 늘어선 숲이 언제 생겼는지, 왜 생겼는지 잘 아는 사람이 없었다. 내 생각으론 아마 오래 전부터 방풍림으로 심지 않았을까 싶다.

  숲정이 아래는 잡풀이 자라서 그 속에서 뱀이 나오지 않을까 항상 불안하고, 나무들이 꾸부러져 아름답기보다는 기분이 그리 좋지 않은 모양새였다. 풍촌과 기름재 중간에 있는 숲정이. 낮에는 그래도 괜찮은데 밤에 그 옆을 지나려면 등에서 땀이 날 정도였다. 바람이라도 부는 날엔 ‘휘이 휘이’소리가 들려와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기름재에서 풍촌 쪽으로 약 300미터 쯤 내려가면 방앗간과 대여섯 집이 있었다. 거기서 약 100미터쯤 가면 풍촌이다. 6.25전까지는 풍촌에 살고 있었다. 작은형님이 객지에서 돈을 벌어서 외가 마을에 있는 방앗간을 샀다. 6.25 후 어수선하고 불안한 판국이라 누구나 학교에 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어머니가 근근이 모아온 돈과 작은형님이 보태어서 기름재에 집을 샀다. 풍촌에는 적당한 집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름재는 지금껏 살아왔던 마을은 아니지만 그리 크게 타관을 타지는 않았다. 오래도록 곁방살이만 하다가 우리 집이 생기자 날아갈 듯이 기뻤다. 대문 바로 앞에 기름진 논도 몇 마지기 샀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밭도 샀다. 해마다 논 밭에서는 쌀과 밭곡식이 풍부히 나왔다.  

 

  작은형님은 방앗간을 하는데 바쁠 때는 가끔 도와드리러 가야했다. 어느 때는 저녁 늦게까지도 일을 했다. 그 날도 일이 저녁 늦게 끝나고 나는 기름재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잔뜩 긴장하고 숲정이 옆 길 근처에 가고 있는데, 빨갛고 둥그런 불덩어리가 느닷없이 푹 솟더니 나에게로 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홱 돌아서서 오던 길로 젖 먹던 힘을 다해 도망쳤다. 200미터 정도를 단숨에 달렸다. 불덩어리는 커졌다 작아졌다 하면서 계속 따라오고 있다. 그대로 가다가는 잡힐 것 같아서 방앗간 앞에서 홱 옆으로 몸을 돌렸다. 내 뒤를 쫓아오던 불덩어리는 똑바로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풍촌 쪽으로 휙 날아갔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형님네 가족들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도깨비였는가 보다고 했다. 그날은 형님네 집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 일찍 불덩이가 솟았던 곳에 이르러 보니 지푸라기를 태운 재와 밥과 나물과 과일조각이 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전날 밤에 뉘 집에서 고사를 지내지 않았나 생각된다. 불덩어리는 덜 꺼진 짚불의 재였을 것이다.

  그 이야기를 어른들한테 했더니 곧이듣는 사람이 없었다. 그 뒤로부터 숲정이 옆을 지나려면 몹시 두려웠다. 비가 오는 초저녁이나 밤에는 그곳을 혼자서는 가지 못했다.

  그 뒤 나는 전주에서 학교를 다녔고, 조상 대대로 살아온 북면 보림리 가정 마을로 왔으며, 입암면에 있는 직장을 시작으로, 여기저기 많은 곳에서 근무하면서도 그곳을 찾아갈 계기는 없었다.

  70년이 지났어도 숲정이와의 아픈 기억은 머리에 생생한 채, 여행길 차창에 기대어 70년 전에 나를 놀라게 한 고향마을 숲정이. 도깨비의 정체를 알게 해준 숲정이. 눈을 감아도 환히 떠오르는 고향마을 숲정이. 그 옛날 함께 뛰놀던 동무들과 마을 골목골목을 떠올리며, 지금은 그 마을이 얼마나 변했을까? 코로나 19가 조금 수그러들면 꼭 한 번 찾아가 보련다.  

                                                  (2020.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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