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난로 앞에서

2020.12.05 12:08

윤근택 조회 수: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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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난로 앞에서

- 일백세 번째, 일백네 번째 이야기 -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103.

외손주녀석 으뜸이와 이 나무난롯가에서 나눈 노변담화(爐邊談話)가 어느덧 103화에까지 닿았다.

이번에는 녀석한테 느닷없는 질문을 던진다. “으뜸아, 우리나라에는 나라에 재산세를 내는 나무도 있다?”

그러자 녀석은 놀라는 기색을 하며 되묻는다.

“한아버지, 사람도 아닌 나무가 나라에 세금을 바쳐?”

이 할애비는 젊은 날 경북 예천에 소재한 예천전화국에 잠시 근무할 적에 가봤던 감천면 천향리 석평마을 ‘석송령(石松靈)’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석송령(石松靈)’은 나이 600여 세 되며 동서로 32m가량 가지 뻗어 있고, 높이가 10m, 둘레 가 4.2m. 그 그늘면적만 하여도 324평 되는 반송(盤松)의 이름이다. 1927년 그 마을 부자 이수목(李秀睦) 할아버지가 그 마을을 지켜주는 그 소나무에다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마을이름 ‘석평리’에서 ‘석’이란 성(姓)을 따고,‘영혼이 있는 소나무’란 뜻으로 ‘송령’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러고는 관공서에 가서 그 나무한테 자신의 토지 5,588㎡ 상속신고를 하였다. 그때부터 석송령은 해마다 꼬박꼬박 재산세를 납부하고 있다. 물론 나무가 직접 세금을 내러 갈 수는 없기에 마을사람들이 대행한다. 지난 2010년 기준 그 재산세가 5,540원.

이 할애비의 이야기를 여기까지 듣고 있던 녀석이 다시 의아해한다.

“한아버지, 그 이수목 할아버지는 왜 그 소나무한테 재산을 물러주셨대?”

아주 좋은 질문! 녀석의 평소 말버릇대로면 ‘good question !’

“으뜸아, 그 부자 할아버지는 불행하게도 재산을 물려줄 자식이 없었대. 그 많은 토지를 마을사람들한테 공동관리토록 물려주자니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고 해. 자칫, 서로 다투는 등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여겼던가 봐. 해서, 마을을 지키며 그늘을 지어주어 당신을 늘 위로해주는 이 소나무한테 땅을 물려주기로 마음을 먹었대. ”

외손주녀석 으뜸이는 총명하기 이를 데 없다.

“한아버지, 그 할아버지는 참으로 현명하셨던 거 같애. 그 이후의 사정은 ‘아니 보아도 비디오’인 걸! 그 마을은 석송령 덕분에 명승지가 되었을 것이고 마을사람들이 화목하게 지낼 테고... .”

맞는 말이다. 나라에서는 석송령을 천연기념물 제294호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으며, 마을 사람들이 힘 모아 그 석송령 소유의 땅을 관리하고 있다. 논,밭을 합쳐 10,000㎡에 달하고, 이 땅은 공동화장실·노인회관·특산품전시관 등을 갖추고 임대함으로써 다달 소득이 생겨난다. 그 소득으로 지역 학생들한테 장학금을 지급한다고 한다.

나무난로 맞은편 접의자에 앉은 외손주녀석 으뜸이는 이 할애비의 이야기가 여기까지 이르자, 감탄사를 연발한다.

“ 이수목 할아버지, ‘탁월한 선택’이었어! 석송령, 팟팅(파이팅)!”

한편, 그러고서는 이내 구두쇠 같은, 수전노 같은 이 외할애비한테 의심의 눈길을 보여 온다.

“한아버지, 근데(그런데) 한아버지는 아들이 없잖아. 으뜸이는 외삼촌이 하나도 없고. 으뜸이 엄마랑 이모 둘뿐인데, 설마 유산을 ... .”

맹랑한 녀석 같으니라고!

나무난로 불문을 열고 소나무 장작을 하나 더 집어넣는다. 송진 내음을 물씬 일으키며 장작은 잘도 탄다. 녀석이 조금 전 자기가 뱉은 말로 인하여 겸연쩍은 듯 볼이 이내 발그레해진다.



104.


녀석은 지난 번 이야기 ‘석송령’처럼 아주 특별한 나무가 더 없느냐고 묻는다. 녀석은 아예 이 할애비의 이야기 주머니를 ‘탈탈’ 털려든다.

“으뜸아, 너도 잘 알다시피, 이 할애비는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청주에 소재한 국립 충북대 농과대학 임학과를 졸업하지 않았니? 보은의 속리산과 제천의 월악산 국립공원에 가보지 않았겠니? 더군다나 월악산 국립공원 전체가 모교 임학과 연습림인 걸!”

그러자 녀석이 무슨 뜸을 그렇게 들이느냐고 한다.

이 할애비는 잠시 눈을 지긋이 감는다.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에 자리한 속리산을 잊지 못하며, 그곳에 있는 법주사를 잊지 못하고, 12굽이 말티고개를 잊지 못한다. 이 할애비는 녀석의 외할머니이자 내 아내인 이가 아닌 첫사랑의 아가씨를 그곳 속리산에서 만났으니까.

“한아버지, 무슨 생각에 잠겨 있어? 얼른 아주 특별한 나무 이야기 들려줘.”

“응응,‘정이품(正二品)’은 요즘으로 따져 장관급에 해당하는 조선시대의 벼슬이거든. 그런데 어떤 소나무가 왕으로부터 ‘정이품’ 품계를 하사받았다면?”

녀석은 귀를 쫑긋 세우고 이 할애비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 이 할애비는 다음과 같은 요지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상판리 17-3에 위치하며, 수고 14.5m, 흉고둘레 477cm, 수령 약 600년의 소나무로서 1962년 12월 3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정이품송.

왕위에 오른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좌를 차지한 세조. 세조는 그 죗값을 치르려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평생토록 지독한 피부병과 악몽에 시달렸다고 한다. 세조는 재위 10년 음력 2월에 요양차 온양·청원을 거쳐 보은 속리산에 이른다. 약수로 유명한 속리산 법주사의 복천암에 가려고 가마를 타고 가고 있었다. 그때 타고 있던 가마가 이 소나무 아래를 지나게 되었는데, 소나무 가지에 임금이 탄 가마가 걸려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이를 본 임금이 “연(輦) 걸린다” 하고 꾸짖으니 소나무가 가지를 번쩍 들어 일행이 모두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세조 일행이 돌아올 적에는 난데없이 비가 쏟아져 이 소나무 아래서 비를 피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세조는 이 소나무의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정이품 벼슬을 내렸고, 그래서 이 소나무를 후세 사람들은 정이품 소나무라 부르게 되었다.

여기까지 듣고 있던 외손주녀석은 의외의 반응이다.

“한아버지, 동화치고는 아주 유치한 동화야! 지어낸 이야기 같은 걸! ”

고놈 참으로 맹랑하다.

“으뜸아, 그렇더라도 이미 위에서 이야기하였듯, 그 소나무는 그제나 이제나 위풍당당하니 정이품의 품계가 어울리지 않니?”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한다.

“그건 그려(그래).”

녀석은 내가 대학 재학 4년 동안 줄곧 들었던 “그건 그려.”하는 충청북도 사람들의 말투로 이야기를 깔끔하게 마감할 줄이야!

또 다시 산골 외딴 농막에는 어둠이 찾아들고, 나무난롯불은 사위어 가고... .

참고사항(일설)]


정이품송에 얽힌 세령부부의 전설(퍼옴)

전하는 소문에 의하면 세조가 지나가는데 정이품송 아래서 동남동녀 두 명이 놀고 있어, 그들의 부모이름을 묻자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마골로 도망을 가길래 그냥 지나쳤는데 아무래도 마음이 걸려 다음날 찾아보았으나, 그들의 부모와 함께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세조는 본인의 외손자임을 직감하고 정2품 품계를 적은 문서를 현재의 정이품송 아래에 놓고 왔는데 그들은 끝내 찾아가지 않았으며, 후에 발견한 어느 사람에 의하여 '왕이 소나무에게 정이품의 품계를 내렸다'고 전하였다고 한다.

-운학 박경동-


(다음 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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