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산사에서

2020.12.16 21:36

구연식 조회 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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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산사(山寺)에서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구연식











두 달여 만에 모악산 금산사에 다시 왔다. 그때는 가을이 오는 때였는데 오늘은 첫얼음이 얼며, 첫눈이 오기 시작한다는 소설(小雪)이 지나서인지 조석으로는 제법 쌀쌀하다. 나무들이 푸르름이 많아서 풍성했는데, 지금은 모두 다 옷을 벗어버려 춥고 쓸쓸하여 금산사 경내는 막차를 떠나보낸 시골역 광장처럼 텅 비어 허전하다.




오늘은 계곡의 마실길을 따라 올라가기로 했다. 그 많던 낙엽은 모두 시몬이 밟고 지나갔는지, 나뭇잎은 닳아서 없고 잎자루와 잎맥만 생선 가시처럼 남아있다. 고운님을 떠나보낸 상사화는 설움이 복받쳤는지, 푸르름으로 무장을 하고 겨울을 견디면서 내년 가을까지 고운님을 기다리며 부엉이 소리를 위안 삼아 긴긴밤을 지새운단다.




여울목 작은 웅덩이에는 울돌목이 생겨 나뭇잎 배는 제자리에서 빙빙 돌다가 침몰하니 명량대첩이 떠오른다. 가라앉은 낙엽들은 겨우내 물고기들에게 푹신한 이부자리를 내주고 있다. 철 모르는 송사리인가, 사춘기의 송사리인가 어미 말을 듣지 않고 행인들 구경에 정신이 팔렸다. 그러다가 사람들의 움직이는 모습에 놀라서는 흙탕물을 일으키며 돌 틈으로 머리를 박고 꼬리만 내놓고 숨고 있다.




개천 건너편 언덕에는 오미자 같은 붉은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너무 곱고 먹음직스럽게 보여 징검다리를 조심스럽게 건너가서 확인해 보니, 작은 울타리에서 많이 보았던 남천나무가 그리도 탐스럽고 좋아 보였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자연 그대로 자라고 성장하여 꽃 피울 때인 것을 남천나무가 알려준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조릿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다. 자세히 보니 뱁새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숲을 움켜쥐고 해먹의 그네를 타고 망중한을 즐기더니 인기척을 알아채고 궁수들이 일제히 쏘아 올린 화살처럼 하늘로 날아간다. 망중한을 깨버려서 미안했다.




여름철 물놀이할 때 익사 사고에 대비하여 구명튜브와 구명조끼는 할 일이 없는지 설치대에 철 지난 허수아비처럼 우두커니 걸려 있다. 내년 여름까지 서 있을 테니 지루하고 답답할까 봐 살짝 어루만져주니, 해마다 겨울철에는 그렇게 보냈으니 염려 말라한다. 개울 웅덩이에서 올챙이 떼처럼 모여 물장구를 치던 어린이들의 모습이 아른거리고, 첨벙첨벙하고 뛰어내릴 때 물 튀김이 금방이라도 서 있는 나에게 튀어올 것 같아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서게 된다.




무너진 둑길을 시멘트로 말끔히 보수했는데, 개구쟁이 산토끼와 고라니 새끼가 그사이를 못 참고 걸어가서 발자국이 뚜렷하다. 나처럼 할 일 없이 이것저것 뒤적거려 보는 사람에게는 볼 때마다 투정거리가 되겠다. 원래는 산토끼와 고라니 길을 인간이 빼앗아서 자기들이 주인임을 표시한 징표인지도 모른다. 한여름 숲과 계곡에는 대목장날 사람들처럼 위락시설을 모두 차지하여 얄밉기까지 했는데, 오늘은 개미새끼 한 마리 없으니 위락시설을 사용하고픈 욕구도 없어진다. 태양도 가을을 타는지 작열했던 햇볕은 온데간데없고 졸다 나온 얼굴로 배시시 비치고 있다.




몇 백 년쯤 되어 보이는 느티나무 밑둥에는 고목이 되어서 검버섯이 피어있다. 생명의 혼처럼 마지막 하나 남은 새순 가지에 고목은 유언처럼 속삭이는데 찬바람이 휘청거리며 훼방을 놓고 날아간다. 뿌리는 눈 속에서 언 발이 부은 것처럼 금방 터질 것 같은 옹이가 이리저리 불거져 마지막 삶을 향해 안간힘을 쓰는 몸부림으로 보였다.




전생에 무슨 업보가 그리도 많은지 어느 불자는 찬바람에 당근처럼 언 손으로 보리수나무 옆 불탑에서 가끔 불어오는 황토 먼지를 뒤집어쓰며 염주를 굴리면서 염불(念佛)로 속죄하며 기원하고 있다. 그 사람에게는 나는 몰염치한 인간이나 문외한으로 비칠까 봐 발자국 소리를 죽여 멀리 돌아서 갔다.




보제루 앞 목련은 찬란한 봄의 꽃피움을 기다리기 위하여 꽃봉오리마다 솜털로 무장을 하여 겨울을 대비하고, 개천가 버들강아지는 어미개가 돌봐주지 않아도 벌써 겨울 털갈이를 하여 작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 준다. 개천 바닥 갈대들은 갈대꽃으로 솜이불을 만들어 들짐승 날짐승 모두 와서 추위를 녹이고 가란다.




천하무적 프랑스의 영웅 나폴레옹은 전통의 강자 영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대륙 봉쇄령을 내리고 러시아를 침공했으나, 동장군(冬將軍)의 위세는 유럽 절대자의 무릎을 꿇게 하여 말고삐를 돌리게 했던 참혹한 전쟁사가 있다. 아마도 늦가을은 동장군과 싸워 이길 전쟁 준비에 모든 생물체는 겨우살이에 대비하고 있다.




자연의 섭리는 절대자의 계시 속에 모든 생명체의 개별 칩(chip)에 저장된 각자의 생명이 작동하면서 질서와 조화 속에 자연의 섭리를 유지하는가보다. 어쩌면 인간도 우주 속에서 먼지보다도 더 작은 존재로 절대자가 주신 칩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지구상 모든 생명체에게 겨울은 자기보다는 종족보존을 위해서 가슴팍에 난 깃털을 뽑아서 둥우리를 만들고, 마지막 남은 한 방울의 젖까지 짜내어 오직 자손을 위해 먹이면서 때로는 이웃에게도 온정을 베푸는 헌신적인 숭고한 계절임을 보았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나 학림(學林)도 자손과 이웃과 사회를 위해 작은 불쏘시개로 겨울의 온돌을 지펴야겠다.




해우소(解憂所)에서 내 육신의 노폐물을 쏟아내고 해탈교(解脫橋)를 건너면서 영혼을 씻어내니 내일은 어떨망정 오늘은 육체와 영혼이 새롭게 태어난 기분이다. 다가올 겨울에는 몸과 마음은 더욱 더 가지런히 다듬어 새봄에 고운 싹을 틔울 때까지 고이고이 간직해야겠다.

(2020.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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