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댁이 보여준 사랑

2021.11.11 19:32

노기제 조회 수: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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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5                                                  경주댁이 보여준 사랑

                                                                                             노기제(통관사)

 

   아직은 할 수 있는데. 나이 제한으로 은퇴를 당하는 한국 실정과는 달리, 여기 미국에서 은퇴란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다.  양심선언 하듯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에 생각을 해 봐도 아직은 자신 있게 일한다. 매일의 처방전 처리하는 숫자를 보면 동료 약사들보다 항상 두 배가 넘는다, 때론 두 배 반, 혹은 세 배가 되기도 한다.

   남편의 직장생활을 어깨너머로 관찰한 나의 평가다. 그러나 숫자로 표기되는 것이 또 있다. 나이. 아무리 능력이 월등하고 얼굴이 동안이라 지나칠 수 있다 해도 인적사항에 나와 있는 속일 수 없는 나이란 숫자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은퇴를 결정한 남편이다. 본인이 원해서가 아닌 떠밀려서 은퇴자가 되었지만, 우리 부부는 즐기자 마음먹었다. 일터가 모자라 안타까운 젊은이들에게 양보한 결과를 뿌듯하게 생각하자. 책임감으로 혼신을 다해 일하던 남편의 빈자리로 인해 곧 혼수상태가 될, 일터 걱정일랑 차갑게 떨쳐 버려야 한다,

   수퍼맨인양 자기만이 그곳을 구할 수 있다는 착각일랑 버리도록 내가 남편을 일깨워줘야 한다, “Everybody is replaceable” 누구든지 대체 가능하단 말을 모르는 내 남편. 어찌보면 미련퉁이 답답이로 보여서 내 속이 까맣게 타기도 했지만, 하늘의 눈으로 보면 사랑스럽고 대견한 캐릭터로 구분될 수도 있을 듯하다.

   둘째 꼰대로 자리매김 된 남편이 속한 고교동창산우회가 있다. 이번 산행은 남편의 은퇴를 축하해주는 파티를 연다고 나를 초대했다. 에구구. 그 산행들 따라나서지 못한지 몇 년인데? 한창 호기 있게 잘 따라다니던 내가, 떨어지는 스피드와 체력으로 포기한 팀이다. 자칫 민폐끼치는 상황이 발생할 우려로 자진 하차했었는데 이제 어찌 함께 산행을?? 안될 말이다.

   평상시보다 늦게 모이고 산행은 간단하게 일찍 끝낸다. 시발점 파킹장 공원에서 파티가 진행될 예정이란다. 간단한 산행이라도 혹여 불편한 상황이 생기지나 않을지 살짝 걱정했다. 남편을 위해서 후배들이 펼쳐 주는 따스한 마음의 밥상이다. 고마운 마음에 신나서 함께 한다.

   자식 없이 49년 살아온 우리 부부 결혼 세월에 내가 남편에게, 또는 남편이 내게 베풀었던 밥상 외에 누군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위해 펼쳐지는 축하의 밥상은 처음이다. 가볍게 선후배가 모여 은퇴하는 회원 한 명을 축하한다는 단순한 파티의 제목이 아니다. 게다가 돈으로 해결되는 식당에서의 밥상이 아니다.

   마음씨 고운 경주댁의 사랑이 펼쳐진 거다. 친정 어머님과 정성껏 가꾼 텃밭에서 재료를 얻고 언젠가의 산행 때 바로 이곳에서 주워 모은 도토리가 맛깔스런 도토리묵으로 변신했다. 구순이신 어머님의 도움으로 상다리 몇 개라도 부러질 만큼 푸짐한 밥상이다. 남편의 12년 후배의 와이프다. 알고보니 나와 띠동갑 개띠. 더 친근감이 밀려든다. 더 고마움이 커진다. 누구에게나 퍼주는 마음, 가득한 사랑이라도 우리 부부에겐 하늘이 주신 특별한 사랑이었다.

   처음 받아보는 따뜻한 마음 탓에 어찌 보답을 해야하나 궁리를 해 본다. 곁에서 거들던 다른 후배가 들려주는 말. 은퇴한다고 누구에게나 이렇게 해드리는 거 절대 아니거든요. 워낙 우리들을 잘 챙겨주시는 특별한 선배님이라 이런 상을 차리는 거죠. 남편의 히말라야산행 때, 경주댁 부부가 동행했던 일화를 전해 들었다. 산행 선배로서 당연히 베푸는 배려하는 마음이지만, 내가 알지 못했던 남편의 후배 챙기기 따뜻함이 새삼 뿌듯하게 느껴지며, 칭찬하고 싶은 심정으로 남편 얼굴을 본다. 그래도 경주댁에게 큰 고마움 전하고 싶다.                                                                                                                                                      20211111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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