쎅스폰 부는 가슴

2007.01.16 05:55

노기제 조회 수:1477 추천:133

     어디 한 번 불어봐. 나이를 말하지 않고 그냥 사촌 언니로 말하고 싶다.  코리아 타운 어느  노인 아파트에서 혼자 사는 이종 사촌 언니가 제법 묵직한 악기를 만진다. 둘째 딸네 작은 손주 녀석이 불던 쎅스폰이란다. 악보대에 악보도 있고 제법 음악도의 모습을 갖췄다. 지금은 대학 졸업반인 손주의 쎅스폰을 사정사정해서 빌려 올 땐, 딸아이 마저도 이천불이나 들여 장만한 아들아이의 악기를 내 놓기 싫어 했다며 목소리가 높아 진다. 중단하고 쓰지도 않으면서 처박아 두면 뭘하느냐고.
        내 요청에 흔쾌히 입술을 다듬으며 악기를 잡는다. 이게 제법 힘이 든다는 설명과 함께 불어 대는  소리가  도레미파도 제대로 끝을 못낸다. 소린 또 왜 그리 큰지 옆방이나 아파트 내에서 불평은 없는지 조심스럽다. 그렇다고 의욕이 넘쳐 자신 있게 시범을 보이는 언니에게 딱히 입빠른 소린 할 수가 없다. 폐활량이 커야 소리가 잘 나올 것 같은데 평생 다른 악기를 불어 본 것도 아니지 않는가 말이다. 게다가 언닌 속된 말로 가방끈이 짧아 악보를 볼 수 있는 실력도 아니다. 그렇다고 나이나 젊은가. 나 자신이 나이를 초월한 생활을 하다보니 굉장히 양보해서 나인 들먹이려 안 했지만, 여자나이 67세면, 아무리 생각 해도 이건 아니다.
        새로 옮겨 간 교회에서 청년 집사에게 레슨을 받는다. 걸어서 다녀야 하는 관계로 집과의 거리가 멀지 않은 교회를 택 했다. 레슨은 물론 교인들 관리 차원으로 새 신자 붙들기 프로그램이다. 하여간 따로 비용이 들지 않으니 언니에겐 절호의 기회다. 그러나 얼마나 갈가. 요즘 노인들이 쉽게 배울 수 있는 크로마하프 클래스도 얼마 못가 파장이다. 잘 따라가는 노인들이 없는 때문이다. 벌써 몇 주가 된 모양인데 도레미파솔라시도가  제대로 이어져 나오지도 못하고 자꾸 끊기면서 씩씩대는 소리가 거칠다.
        야아 언니 제법이다. 근사한데. 나 같음 소리도 못 내겠다. 근데 언닌 소리가  제대로 나오네. 얼마나 했는데? 뭐? 벌써 한 달이 넘었어?
        아주 얄팍한 내 입에 발린 소리에 언닌 딸년들이나 주위 친구들 불평을 늘어 논다. 지들이 못하면 그만이지. 아 글쎄. 나더러 하지도 못 할 걸 뭐 하느냐는 둥, 주책이라는 둥 웃긴다는 둥. 웃기긴 지들이 웃기지. 두고 보라지. 내 꼭 해낼 테니까.
     우선은 언니에게 용기를 주려고 아부성 발언을 하긴 했지만, 사실 나 자신도 속으론 언니, 제발 그만두구려. 차라리 기타나 크로마 하프 같은 손쉬운 악기로 하면 어떨가. 제의하고 싶지만, 손쉬운 악기가 어디 있단 말인가. 나 자신도 20년 넘게 피아노다, 기타다, 가야금이다, 장고다, 드럼이다 ,크로마 하프다 시작은 해 놓고 뭐 하나 제대로 하는게 없는 실정 아닌가. 절대로 쉬운 악기는 없다.
        난 그래도 악보를 볼 줄 아니 악보 읽는 데 시간은 안 버려도 되지만, 언닌 악보도 볼 줄 모르고, 음악이란 캐터고리에 전혀 입문도 못 해본 사람 아닌가. 게다가 민폐까지 끼쳐야 하는데 누가 좀 말려야 될 것 같다. 좋은 연주도 아파트내에선 크게 들을 수 없는 것이 예의인 걸 언닌 아랑곳 하지 않는다.   막무가내  삑삑거리는 소리를 불어 댄다. 물론 제대로 된 음이 나오지도 않는다. 우선 멈추게 하려고 잔뜩 칭찬을 해 주고 바쁘다는 핑계로 방을 나섰다. 혹시라도 아파트 메니저와 맞부딜가 주위를 살피면서.
        그리곤 한 육개월을 내 삶에 휘 둘리며 언니에겐 연락도 못 했었다. 해가 바뀌고  새해 인사도 할 겸 찾아 갔더니 아니 이게 어찌 된 걸가? 쎅스폰, 악보대, 악보등 여전히 의젓한 모습으로 방을 차지하고 있다. 언제나 당찬 언니 웃음소리에 약간은 긴장하며 슬적 한마디 건네 본다. 연습 많이 했수? 어디 한 번 감상 좀 해 볼까. 난 그냥 해 보는 소리로 인사를 한 것 뿐인데. 야아, 나 무시하지마. 지금은 교회에서 앙콜까지 받는 귀하신 몸이란 걸 알아야 돼.
        찬송가를 주문하면 찬송가를, 민요를 주문하면 민요를. 악보가 몇 장인지 모르게  악보대에 쌓여있다. 그동안 큰 딸네 손녀에게 특강을 받아 손수 콩나물 대가리 그려 가며 악보 읽는 법도 익혔단다. 그 순간 난 한겨울 얼음이 둥둥 떠 있는 바닷물에 발가 벗은 내 육신을 냅다 던져 넣었다. 정신차려 이 인간아. 너 뭐하고 있는거야.
        나이가 어쩌니 저쩌니  들먹이며 나 자신에게 어떤 핑계를 댔던가. 아님, 일손 놓고 쉬다 보니 머리에 녹이 슬었나 보다며 주저 앉았었나. 갱년기 장애로 고생이 심해서 모든 의욕 다 상실 했나 보다고 바보 처럼 멍한 표정 지으며 이해 받으려 했는데.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거라고 언니가 내게 보여 준다. 너는 야아, 나이도 젊은 게 왜 그 모양이니? 하면 뭐든 잘 하면서 왜 벌써 그렇게 쪼그라 드냐?  해 내겠다고 다부지게 맘만 먹으면 뭔 못하니? 너야 아직 나이도 젊겠다, 나 처럼 악보까지 따로 배울 필요도 없겠다. 일 안하니 시간 있겠다. 뭣 때문에 그렇게 추욱 쳐져서 시간만 죽이냐.
        그러게. 언니 말이 다 맞네. 나 정말 왜 이렇게 사나 몰라. 얼음물에 빠트려 동사하기 직전 끌어 올린 내 육신. 이젠 머리가 다시 빠릿빠릿 돌아 갈 수 있으려나. 특히 아무 의욕도 남아 있지 않던 내 가슴, 이젠 좀 옛날 처럼, 뭐든 해 보겠다고 덤벼들던 억센 가슴이 되어 주면 좋겠다.  그래서 언니가 들려 주는 쎅스폰 연주를  난 가슴으로 먼저 연주하고 싶다. 이어서 못 다 한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나씩 다시 내 가슴에 끌어 들이자.
        피아노에 쌓인 먼지가  짜증스럽다. 기타 교본은 어디로 숨어 버렸나.  거실 모퉁이에 서 있는 가야금의 키가 꽤 길어 보인다. 아래층에서 잠자고 있는 장고를 흘깃 확인 했다. 자리만 잔뜩 차지한 드럼 식구들이 스틱을 조심스레 건네 준다. 도대체 합창단엔 왜 안 나오세요?  기어코 이유를 알아야겠다는 듯 뒤 따라 오며 쏘아 대는 질문이 다시금 귓전을 울린다.

                                                                        2007-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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