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자 필요하세요?

2008.02.10 02:33

노기제 조회 수:964 추천:164

08년0107                      사회자 필요하세요?

        해마다 끝자락이 다가오면 술렁이며 배달되는 각종 연말 파티 초대장이다. 상황에 따라 참석 하고 싶기도 하고 때론 전혀 관심을 안 두기도 한다. 학연인 동창회 모임을 가장 우선으로 여기는 내겐 관련된 모임이 여럿 된다.
        취미가 다양한 만큼 모임의 숫자가 높아진다. 그러나 참석 여부는 해마다 다르다. 어느 해는 한 곳에도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 가봤자 라는 결과를 진단했으면 조용히 칩거하는 편이다. 간혹 동기들이 옆구리 쿡쿡 찔러가며 모이자를 종용하면 마지못해 가지만, 언제나 뒷맛은 가봤자 로 명중이다.
        어느 해엔 참석했다가 무지 기분이 나빠서 돌아온 적이 있다. 적잖은 수고비 주고 모셔 온 사회자의 무례한 발언 때문이다. 박수를 안친 저 여자 어쩌구 하는데 피가 거꾸로 돈다는 걸 경험했다. 그 때 난 생각했다. 총동창회는 이런 식으로 꼭 연말파티를 해야 되는 걸가. 오랜만에 만나는 동창들끼리 푸근해야 하고, 재미있어야 하고, 참여의식이 고취돼야 하는데 이런 식으로라면 얼굴 찌푸리고, 회비 낸 것 아까워 지고, 다시는 참석 말아야겠다는 결심마저 하게 된다.
        내가 해도 얼마든지 잘할 것 같은 생각이다. 그 때부터 호시탐탐 기회를 봐 왔지만 누구하나 전문 사회자를 배제하고 동창끼리 해보자는 시도를 하지 못한다. 겁나는 거다. 그나마도 더 못하면 다음 해 파티에 지장이 크기 때문이다. 맘대로들 하셔. 난 안 간다.
        그런 마음먹은 지 8년이 지났다. 절호의 기회가 왔다. 연말 파티가 아닌 대보름 잔치를 열고 연로하신 선배님들 회비 없이 모신다며 사회자로 봉사할 동창들은 연락 바란다는 광고가 이멜로 왔다. 어찌할까  망설이다 응모를 하고 단일 후보라 덜컥 사회자로 결정이 됐다.
        하면 된다. 번번이 기분 안 좋아져서 돌아 나오던 그런 파티를 기억해 보며, 바로 그 점을 고쳐서 시도하면 된다. 합창단 모임에서 게임 진행하던 단원을 찾아가 선물공세 하며 잠간 지도를 받았다.
        가슴 떨리는 일이다. 내가 한 번도 안 해 본 일이기 때문이다. 말을 줄이자. 사회자가 말이 많으면 청중이 짜증을 낸다. 잘난 척 하지 말자. 청중에게 더 많은 시간을 할애 한다. 그들이 주인임을 느끼게 해 준다. 동창이란 한 울타리 안에서 보낸 시간이 공동의 화제가 되어야 공감을 불러 낼 수 있다. 참석한 모두에게 한 마디라도 말 할 기회를 준다. 누구든 참여했다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도록. 생각은 그럴 듯 했는데 막상 마이크 잡고 진행 해보니 하나도 생각이 안 난다. 준비 했던 것들 십분의 일도 못했다. 청중의 호응도 내 기대만큼 따라 주지 않는다. 아하, 이렇구나.
        파티 후 평가는 전문 사회자 보다 훨씬 참신하고 좋았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사회였다. 한마디로 제법이다란 평점이다. 동창이니까 좋게 봐준 거려니 일단은 안심했다. 초봄에 선을 보이고 연말 파티에 다시 마이크를 잡았으니
괜한 점수를 준 것만은 아니었나 보다. 결국 연말엔 두 곳 동창회 사회를 맡았으니 가슴 떨며, 책 구입 해다 열심히 공부한 결과가  A 플러스다.
        잘난 척 하고 싶어진다. 참석했던 외부 사람에게 러브콜도 받았다. 어느 선배님은 전문 MC로 인정하고 자격증을 주겠노라신다. 용돈 궁할 때 한 탕 뛰고 벌어 쓰라신다. 감사한 말씀이다. 불평 한마디 들리지 않으니 너무 감사하다. 그러다 보니 교만해진다. 저 보고 또 하라고요? 이제 젊고 발랄한 후배 물색해서 시키세요.
        그런가? 내 진심이 말하는 건 뭘까? 진짜 힘든 건 사실이다. 지치고 진 빠지고 주저앉고 싶기도 했다. 도중에 찬 물 한잔 건네주는 친구가 그리 고마울 수가 없다. 너무 열심히 하지 말고 댄스타임으로 돌려. 어느 동문 배우자는 어머 정말 수고가 많으세요. 힘드시죠?
        용기 주고, 걱정 해 주고, 사랑 받고 있음에 행복한 순간들이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 낼 것인가. 아닌 것 같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동창회에 일조한다는 생각을 한다. 돈으로 돕지 못하면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부분에 그마저도 손사래를 치는 본심은 뭐란 말인가. 분명 교만이다.
        혹 나처럼 자진해서 하겠다는 동문이 나타나면 양보는 해야 한다. 그런 상황도 아닌데 겨우 세 번 하고 귀하신 몸 대접하라는 은근한 기대로 사양하는, 추한 꼴은 없어야겠다. 이것도 봉사가 아닌가. 거액을 지불하고 사회자 모시기가 일반인데, 그 비용만큼 내가 자진해서 봉사 하면, 동창회를 이끄는 임원들은 일하기가 수월해 질 것이다. 참여하는 동창들에게도 무언의 본보기가 될 것이고. 봉사한다고 생각하면 나도 행복하다. 내가 뭔가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이 무지무지 나를 신나게 한다. 이제부턴 다른 책을 구해서 공부해야겠다. 어디 사회자 필요하신가요?

                                                                010708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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