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디가 죽어

2009.01.04 04:42

노기제 조회 수:772 추천:160

20081110                윈디가 죽어

        “이봐, 클 났어. 빨리 빨리”

        아침 잠이 달콤하다.  그 달콤함에 흥건히 젖어 있는 나를 깨우는 소리다. 벌써 산책에서 돌아 왔나. 일어나기 싫은데. 분명 오늘은 휴일이니 허둥 댈 필요가 없다. 특별한 나들이 계획이 없는 날엔 남편은 윈디를 데리고 동네 뒷 산에 오른다. 아침 운동으론 안성 맞춤인 거리다. 한 시간 반 정도 걸을 수 있고 좀 더 오래 걷고 싶으면 얼마든지 걸을 수 있는, 도심에 위치한 헐리웃 산이다. 한인 타운이 가깝고, 공기도 맑고, 언제든 운동 삼아 집에서 부터 걸어 갈 수 있는 바로 내 소유처럼 느껴지는 산이다.

        정월생인 윈디는 생일이 되면 열 한 살이 된다. 워낙 어려서 부터 산행을 함께 했고 우리가 속해 있는 산악회 명예 회원이기도 하다. 한 달에 두 번 정도 있는 산행에 빠짐 없이 참가하며 회원들이 걷는 거리보다 두배 이상을 걷곤 한다. 앞서 걷는 아빠따라 가다가 뒤에 가는 엄마를 데리러 다시 돌아오고, 또 앞에 가는 아빠한테 갔다가 뒤에 처진 엄마를 기다려 주고, 더 뒤에 처진 다른 회원들에게 까지 냅다 달려 내려가 응원해 가며 함께 올라오고.

        인간의 말을 못하는 강아지라도, 누구하나 윈디의 따뜻한 마음 씀씀이를 느끼지 못하는 회원은 없다. 오히려 바싹 마른 우리 인간들의 가슴에 행동으로 사랑을 전해 주는 셈이다. 묵묵히 걷기만 하던 산악회 회원들도 한 마디씩 고마움을 전한다. 어쩜 그리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깊으냐며 특별한 회원으로 인정을 한다. 그러던 윈디가 열살을 넘기며 산행을 힘들어 하게 되고, 아빠와 함께 뒷 산 산책으로만 운동을 대신 하고 있다.

        아침 산행에서 돌아오며 나의 단잠을 깨우는 남편의 목소리가 떨린다. 큰일 났다는 소리에도 별 반응이 없는 내게 “윈디가 죽어” 라며 서둘러 동물 병원 응급실 전화번호를 찾으란다. 전화번호부를 들추는 남편의 손이 떨린다. 제대로 읽지도 찾지도 못하는 모습이다. 재빨리 윈디가 다니는 병원에 전화를 한다. 물론 일요일이니 의사가 있을리 없지만 위급상태라면 연락하라는 전화번호를 녹음 해 둔 것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평소엔 차분하고 흔들림 없는 남편의 생소한 모습에 놀라면서 내가 대신 찬찬히 응급실을 찾아 간다. 윈디는 죽은 듯 축 늘어진 채, 아빠 품에 안겨 있고 남편의 셔츠는 온통 피 투덩이다.
        코요테한테 물려 갔단다. 바로 옆에서 따라 걷다가 순식간에 냅다 뛰어가더니, 코요테를 쫒아 간 것이다. 코요테란 놈, 사람에겐 공격을 안 하지만, 강아지 정도야 한 입이다. 게다가 스스로 쫒아 온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를 그냥 놔 둘리 없다. 죽은 놈이라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산 속을  한 시간이 넘도록 헤멨단다. 코요테가 갔음직한 산 속을 오르고 내리고 간혹 토끼를 물고 가는 코요테를 봤다는 행인들의 말을 따라 큰소리로 강아지 이름을 부르며 간접적으로 코요테에게 겁을 주어 뜯어 먹지 못하도록 했단다.

        천사가 따로 없다. 토끼로 보인 우리 강아지 물고 가는 코요테가 도망간, 방향을 가르쳐 준 그 멕시칸 부부가 바로 천사였다.  위에서 내려 갈 수도, 아래에서 올라 갈 수도 없이 빽빽한 덤불 숲을 죽을 힘을 다해 헤치며 긁히며 샅샅히 뒤진 끝에 죽어 있는 윈디를 발견하곤 안고 내려 오는 길이 얼마나 힘들고 멀었을까

        수건으로 싸서 안고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계속 윈디를 부르고 있는 남편을 옆 자리로 밀고 내가 운전대를 잡았다. 그리곤 평상시대로 말을 시킨다. 윈디야, 눈 좀 떠봐. 많이 아프지? 엄마랑 아빠랑 지금 병원에 가고 있으니까 윈디 금방 괜찮아 질꺼야. 윈디야, 놀랬지? 이젠 괜찮아. 아빠가 코요테 쫒아 버리고 윈디 데려 왔으니까 이젠 깨어나도 돼. 어서 눈 좀 떠봐. 윈디, 윈디, 우리 이쁜 윈디 착하지? 자아, 눈 좀 떠 보세요.

        기적이다. 힘 들이며 눈동자가 움직인다. 가까스로 눈을 뜨려 애는 써 보는데 잘 안 된다. 아, 살았다. 안 죽었어. 윈디 안 죽었어. 옳지. 착하지. 우리 윈디. 그렇게 애 쓰면서 깨어 있어야 해. 정신 놓으면 안 돼. 병원에 다 왔으니까. 윈디야, 살아줘서 고맙다. 아빠두 엄마두 이렇게 윈디랑 헤어질 순 없거든. 그제야 막고 있던 눈물샘이 슬며시 열린다. 뜨겁다. 감사의 눈물이다.

        전쟁이다, 사고다, 재난이다, 여러가지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사람들의 심정을 헤아리게 된다. 어찌 살꺼나. 함께 가고 싶은 숨 막히는 아픔들을 어떻게 견딜꺼나. 지나간 날 일찌기 내 곁을 떠난 할머니, 할아버지, 큰 오빠, 아빠, 엄마, 내 식구들과, 내가 시집 가서 내 곁을 떠나신 시아버님, 시누님, 아주버님, 남편의 식구들.

        이런 슬픔, 아린 고통, 없는 세상은 없을까. 두렵지도 무섭지도 않은 죽음이지만, 분명 피하고 싶은 건 이별이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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