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진아, 수진아 (제 8 회)

2014.10.26 07:35

김영문 조회 수:23

                          수진아, 수진아 (제 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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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수진의 아성을 탈출해서 나온 후 한참 동안 나는 이상한 해방감을 느끼며 꽤 즐겁게 산다고 생각했다. 처음 3개월 정도는 새로 얻은 직장 일에 적응하기 위해서 바쁘게 살면서 윤수진을 거의 잊다시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4개월쯤으로 접어들면서 나는 슬금슬금 녀석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하고 전화를 한 번 해볼까하는 생각도 했다. 내가 어디로 이사 간다고 말을 하지 않고 나왔으므로 내가 먼저 전화하기 전에는 수진이가 나에게 연락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전화하지 않았다. 윤수진도 중요하지만 우선 나는 새로 근무하기 시작한 이 회사에서의 업무에 손을 익히고 내 위치를 잘 찾아서 견고하게 만드는 것이 더 급한 일이라고 스스로 핑계를 대면서 자기 정당화를 했다. 마치 고향 떠난 녀석이 성공하기 전에는 절대 고향 땅에 발을 드려놓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그런 심리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서 회사와 가까운 다운타운에 아파트를 얻고 타고 다니던 차도 팔아버리고 전철을 타고 출퇴근하기 시작했다. 매일 저녁마다 퇴근하여 전철을 타고 가까운 역에서 내려 십분 정도 걸어서 아파트에 돌아와 짤랑거리며 열쇠를 꺼내 아파트 문을 따고 들어가면 혼자 있다는 그 호젓한 느낌에 뭔가 감상에 젖어 또 그 놈의 글이라도 쓰고 싶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나는 글을 쓰지 않았다. 그런 시도를 아예 처음부터 안하기로 작정했다. 그 대신 나는 하루하루 이 뉴욕에서의 일상생활에 충실하고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듯이 직장 일에 진지하게 매달려서 열심히 매일의 시간을 메꿔나가는 길을 택하기로 했다. 월요일에서 금요일 까지는 주말을 기다리면서 살고 주말이 되면 특별히 하는 일도 없이 게으름을 피우며 빈둥빈둥 시간 보내고 다시 월요일을 맞이하는 그런 보통의 일상을 살기로 한 것이다. 검정 홀대바지 반항아 시절에 그렇게 경멸하던 그 일상의 생활이 사실은 진짜 사람 사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살면서 얼마간 시간이 지나고 권태기가 오면 재미없는 생활의 체 바퀴를 벗어나기 위해서 휴가를 간답시고 답습하던 생활의 테두리를 벗어난 곳에 가서 일상의 바깥쪽에 있는 생활을 며칠 해보다가 다시 돌아와서는 또 똑같은 생활이 이어지고. 이렇게 몇 번인가를 하다보면 드디어 은퇴할 때가 되어 마치 쇠사슬에 묶여 있다가 해방되는 느낌으로 직장을 완전히 떠나게 되겠지. 수십 년을 똑 같이 같은 직장에 묶여서 사는 사이에 저도 모르게 나이 들어 소위 정년퇴직이라는 형식으로 그 체 바퀴를 떠나서 갑자기 생활의 양상이 바뀌어 방향 감각을 잃고 헤매는 노인들을 우리 주위에서 많이 보지 않는가. 나는 검정 홀대바지 시절의 모든 것을 잊고 그 다수의 대열에 합세하여 나도 그렇게 살기로 작정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자학이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 이상의 생을 살 능력을 가지지 못한 자가 선택할 유일한 타협의 길이기도 한 것이다. 자살의 길을 택해서 스스로를 이 세상에서 원천적으로 제거해버리는 방법 이외에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거의 모두가 그런 능력을 가지지 못해서 그 이상의 생을 살지 못하고 있으므로 그 절대 다수의 무리에 합류하는 것이 부끄러울 것도 없고 비통해할 일도 아닌 것이다. 젊고 힘찬 시절에 가졌던 꿈과 이상의 날개를 잃고 그 아래쪽의 길을 택해서 살고 있는 사람이 어찌 나하나 뿐이겠는가. 나는 그렇게 자위하기로 했다. 자기가 가진 능력에 눈높이를 맞추어야 한다는 것은 씁쓰름하긴 했지만 외면해서는 안 되는 현실적 판단인 것이다. 한 발 다가서면 한 발 멀어지는 그 망할 놈의 목표점을 허망하게 일생 좇으면서 살 수는 없지 않겠는가. 걸어서 좇아가도, 숨 가쁘게 뛰어도 항상 그렇게 멀리 허공에만 떠있는 꿈인데 미친 것처럼 좇아다니기만 하다가는 마침내 김현석이처럼 허기진 배를 끌어안고 남의 집 하숙방에서 싸늘한 시체가 되어 버리는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
  퇴근 후 전철역 앞에서 사들고 온 햄버거를 비좁은 아파트의 작은 식탁 위에서 먹던 어느 날, 나는 문득 자살해서 이 세상에서 없어진 현석이 녀석 생각이 나자 가슴을 울멍이며 먹던 햄버거를 내려놓았다. 꿈은 그 것을 좇는 사람에게 틀림없이 현실이 되어 찾아온다고 했지만 그것은 자기의 능력에 맞는 꿈을 좇을 때에만 그렇다는 단서가 붙어야 하는 것이다.
  뒤치다꺼리할 사람이 없이 시체가 되어버린 김현석이 죽은 후에도 받았을 저주서린 욕지기를 생각하면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하숙집 주인이 현자가 아니라면 분명 저주했을 것이다. 아, 자살하려면 나가서 죽지 재수 없게 하필 남의 집 하숙방에서 죽을게 뭐란 말이람. 아무쪼록, 아무쪼록 그 주인이 따뜻한 인정을 가진 사람이었기를 나는 간절히 바랐다. 외롭게 가는 영혼에 한 마디 동정의 말을 해주지는 못할지언정 저주는 하지 않았기를 나는 간절히 바랐다.

  내가 근무하기 시작한 회사, EXPRESS SERVICE INTERNATIONAL에는 여러 인종으로 구성된 사십 여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었는데 한국계 직원은 나 이외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 뉴욕은 멜팅 팟 (MELTING POT)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여러 인종이
섞여서 살고 있다는 뜻이겠지만 그 것은 현실과 전연 다른 표현이다. 세계 구석구석에서 이민 온 온갖 인종이 모여서 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용광로에 들어간 쇠가 녹아서 섞이듯이 그렇게 섞여서 산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서로 다른 인종과 서로 다른 문화와 서로 다른 언어는 서로 다른 경계를 가지고 서로에게서 동떨어져서 따로 따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틀림없는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관습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먹는 음식이 다르고 언어가 다른 사람들이 마치 형제가 되듯이 순식간에 경계심 없고 부담감 없이 섞여서 살 수는 없는 것이다. 따로 따로 떨어져서 서로 의심스러운 눈으로 감시하고 살면서 마치 그렇지 않은 듯 눈이 마주치면 미소할 수 있게 되려면 실로 잽싸게 가식의 예법을 터득해야한다.
  이 위대한 미국에서는 인종 차별에 대해서 입 벌려 말하는 것이 금기처럼 되어 있다. 아무도 진정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인종에 대한 견해나 편견을 진심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가식의 달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라고 부르짖어야 했던 것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연한 사실이라면 마치 새로운 발견이나 한 것처럼 문서에 기록하며 떠들어대지 않았겠지.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으로 더 타당한 판단이라는 증거가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지 않은가. 가장 흔히 나타나는 차별은 인종에 대한 차별이다. 피부 색깔에 따른 차별이다. 흰색일수록 높은 인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백인은 높고 흑인은 낮은 인종이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흑인들 사이에도 피부 색깔이 연한 흑인과 진하게 검은 흑인 사이에는 차별이 있다니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나같이 색깔이 노란 동양인은 어디쯤에 서는 것일까? 모두 궁금하게 생각하지만 아무도 이런 말을 밖으로 나타내서 하지 않는다. 대개의 동양인은 흑인에 대해서 나쁜 편견을 가지고 있고 자연히 흑인 쪽에 거리를 두고 백인 쪽에 더 가까이 소속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백인은 우월하다. 그 것은 유색 인종인 우리가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슬픈 사실이기도 하다. 우리는 스스로 자발적으로 백인을 우대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 높은 대우를 받은 백인은 자기가 우월하다는 것을 우리 같은 유색 인종을 통해서 확인하고  흐뭇하게 그 우월성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외모가 백인 비슷하게 생긴 혼혈은 가급적이면 백인 쪽으로 붙어서 백인 행세를 하며 살기를 원한다. 중남미 국가처럼 혼혈이 많이 있는 나라에서는 같은 나라 사람이면서도 백인 혈통이 많이 섞인 사람과 토종 사이에 사회적 지위가 엄격하게 차이 있고 생활도 분리되어서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한국에서처럼 재벌과 가난한 사람이 분리되어 사는 것과는 또 다른 종류의 격리된 생활이다. 가난한 사람도 돈을 벌면 재벌이 될 수 있고 또 사회의 상층으로 진출할 수 있지만 이 인종에 의한 격리는 죽을 때 까지 넘지 못하는 침범 불가능의 선이다.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백인과 결혼한 대다수의 아시아인 또는 다른 비백인 여자는 백인 사회에서 백인 행세를 하며 살기를 원한다. 대개의 그들은 자기가 속해있던 비백인 집단을 경멸하고 자기는 백인과의 결혼과 동시에 그 속에서 빠져 나왔다고 생각하며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겉으로야 그렇지 않다고 얼버무리며 뭐라고 딴 소리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이런 모든 것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백인은 진정 위대한 모양이다. 그리고 우리 아시아인은 자기가 미처 느끼지 못하면서 백인을 특별 대우해주는데 앞장서줌으로써 그들의 특별한 위치를 재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해내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는 인종차별의 씨앗을 우리 스스로가 뿌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가슴 아픈 인종 차별은 타 인종에게서 오지 않는다. 그 것은 동족에게서 오는 인종차별이다. 백인에게 비굴하고 필요 이상으로 친절을 베풀면서 동족에게는 매정스러운 사람을 볼 때마다 나는 얼굴이 뜨거워지며 가슴이 답답해진다.    

  새로 일하기 시작한 직장에서 4개월쯤 근무하고 5개월로 접어들었을 때 나는 뜻밖의 끔찍한 사건을 바로 내 곁에서 목격하게 되었다. 이것은 윤수진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하고 전화를 한 번 해봐야 하겠다고 생각할 때쯤에 생긴 일이었다.
  같은 부서 바로 옆 책상에서 일하는 필리핀계 매니 베카리아라는 직원과 이따금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면서 그는 귀찮을 정도로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 매니 베카리아가 엄청나게 큰일을 저지르고 만 것이었다. 상황을 짐작해보니 내가 이 회사에서 일을 시작하기 훨씬 전부터 이 매니의 마음속에서는 부글거리며 사고를 저지를 증오심이 바로 폭발 직전까지 끓어오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매니는 백인에 대해서 꽤 배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도 몹시 비우호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나이도 지긋한 오십 줄에 들어섰을 것 같은데 미국의 역사를 들추며 비난할 때는 젊은 사람의 열정을 보이며 맹렬하기가 짝이 없었다. 필리핀이 미국의 식민지였다는 사실도 마치 우리 한국 사람이 일본에 가지고 있는 증오감처럼 골 깊게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백인의 유색 인종에 대한 착취, 노예화, 그리고 유색 문화의 파괴 등에서부터 시작해서 이 친구가 입을 열면 미국의 영토 확장, 무력 정책 등 끝날 줄 모르는 비판과 질타가 줄줄이 이어졌다.
  “매니, 그렇게 대놓고 미국을 까뭉개면 FBI 요원이 체포해 갈지도 몰라. 조심해.”
  내가 말할라치면 다소 두렵기는 한지 슬금슬금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잠시 목소리를 죽였다가 잠깐 사이에 다시 흥분하여 떠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말이야 단 하루도 전쟁을 하지 않는 날이 없는 나라야. 알겠어? 단 하루도 말이야. 그러면서도 또 단 하루도 자기 본토에서는 전쟁을 해보지 않은 나라이기도 해. 남북 전쟁? 그건 내전이야. 다른 나라와의 전쟁이 아니란 말이야. 펄 하버는 멀리 떨어진 섬인데다가 미국이 공격을 받은 전쟁이야. 전쟁의 장소를 미국이 선택할 수가 없었던 유일한 전쟁이라는 말이야. 자기 본토의 땅 덩어리는 가만 놔두고 다른 나라에 가서 그 나라 다 때려 부수면서 매일 전쟁을 하고 있다는 말이야. 말로는 민주주의를 위해서, 핍박받는 국민을 위해서 싸워주는 거라고 말하지만 진짜 그럴까? 자기 이익이 없는데 순수하게 도움을 주기 위한 마음으로 전쟁에 나서줄까? 세력 확장의 야욕이 없는데도 엄청난 돈과 인명을 쏟아 넣으면서 전쟁을 해줄까? 중동에 기름이 나지 않았다면 그래도 과연 미국이 중동에 가서 그 나라 국민을 구원하기 위한 전쟁을 했을까? 의심스러워. 매우 의심스럽다는 말이야.”
  매니는 오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데 가족도 없는지 퇴근할 때면 근처의 바에 가서 맥주 한 잔하고 가자고 거의 매일 치근댔다. 내가 응하지 않을라치면 저 혼자서 바에 가서 술을 마시다 들어가는 눈치였다.  
  한번은 그렇게 매일 늦게 들어가면 집에 있는 와이프가 불평하지 않느냐고 물어보니 매니는 이상스럽도록 발끈해서 소리 질렀다.
  “내가 집에서 무슨 문제가 있던 네가 무슨 상관이야? 왜 그따위 더러운 소리를 끄집어내?”
  나는 무심코 물었다가 뜻밖의 강한 반응을 받고 훔칠 놀라서 그 다음에는 그의 가족에 대해서는 두 번 다시 거론하지 않기로 했다. 도대체 집에서 와이프가 불평하지 않느냐고 물어본 것이 어째서 더러운 소리에 속하는 것인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런대로 묻어두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우연히 그가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원인을 알게 되었다. 퇴근 후 맥주 한 잔 하자고 청하는 것을 결국은 거절 못하고 회사 앞 스탠드바에 같이 앉았다. 맥주가 두 병 비워질 때쯤에 매니는 지갑을 꺼내서 내 코앞에 사진을 한 장 내밀었다. 그 사진에는 상당한 미인이 있었다.
  “매니, 이게 네 부인이냐? 미인이다. 네 실력이 대단한 모양이구나.”
  칭찬을 해줬는데 매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가 이 사진을 왜 아직도 가지고 다니는지 나도 모르겠어. 이 년은 매춘부 같은 년이야. 필리핀에서 나는 공무원이었어. 꽤 힘 있는 자리에 있어서 봉급보다 많은 뒷 수입을 챙기고 있었거든. 봉급도 많았고 말이야. 그러다가 좀 더 잘 살아보고 싶기도 했고 하나 있는 딸에게 좋은 교육도 시키겠다는 생각으로 미국으로 왔지. 필리핀에서 꿍쳐 가지고 온 돈으로 도너츠 가게를 사서 운영하기 시작했어. 장사도 잘 됐어. 한 삼 년 잘 살았지. 딸아이도 문제없이 여기 학교생활에 적응하고 영어에도 익숙해지기 시작하고 말이야.”
  말하다말고 매니는 또 벌컥거리며 맥주를 마셨다. 뭔가 꽤 흥분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뭐야? 그런데 도너츠 가게는 어쩌고 이런 직장에 들어와 있는 거야?”
  매니는 맥주병을 쾅 소리나게 내려놓고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탁자를 쏘아보았다. 눈에 증오가 있었다. 그리고 말했다.
  “이 매춘부 년이 바람이 난거야. 가게에 자주 와서 커피 시켜 마시면서 잡담하고 농담하던 손님하고 말이야. 내 눈앞에서, 바로 내 눈앞에서 말이야. 망할 년.”
  나는 아무 말 안하고 듣고만 하고 있었다. 무슨 말이든 내가 입을 열면 이 매니가 폭발할 것처럼 보였다.
  “몇 번을 설득해보려고 애썼지. 마음을 돌이키려고 말이야. 이 바람기 있는 년의 귀에는 내 말이 들어가지 않는 거야. 그래서 홧김에 몇 대 때렸어. 즉각 경찰에 전화를 하더니 나를 수갑 채워서 경찰서로 끌려들어가게 만든 거야. 하루 밤을 자고 풀려나긴 했어. 그 다음 부터 나는 아내가 무서워지기 시작했어. 그러고 이 년은 그 바람나서 붙은 손님 새끼하고 합작해서 순식간에 이혼 신청을 해버린 거야. 있던 것 다 뺐기고 쫓겨났지. 맨 몸으로 말이야. 내 딸아이도 엄마 편이야. 약한 엄마를 왜 때렸냐는 거야. 미국에서 살면 미국식으로 해야 한다는 거야. 이건 배신이야.”
  매니는 또 맥주병을 들어 꿀꺽거리며 마셨다.
  “그 년이 같이 붙어먹은 새끼는 사기꾼 같이 생긴 백인 뚜쟁이야. 단물 다 빨아먹고 나면 차버릴 것이 빤한데 이 년이 그걸 모르는 거야. 빈정거리면서 번들거리는 눈으로 나를 보던 그 백인 녀석의 표정을 나는 잊을 수 없어. 이건 배신이야. 배신에는 복수가 따라야 해.”
  어느 사이에 매니는 만취되어 있었다. 술기운이 섞여서 눈이 이글거리고 타올랐다.
  “매니, 가자. 더 이상 마시면 안 되겠어. 너 이러다가 무슨 사고라도 치를 것 같다.”    
  나는 매니를 바에서 끌고나와 택시에 태웠다. 택시 안으로 밀려들어가면서 매니는 눈알을 번득이며 말했다.
  “나를 똑똑히 보고 있어. 언젠가는 복수를 하고 말테니까. 이대로 그냥 끝나게 되지는 않을 거야. 똑똑히 보고 있으란 말이야. 알겠어?”
  나는 아무 말 안하고 택시 문을 닫아 주었다. 어쩐지 가슴이 답답한 느낌이었다. 표독스럽게 부릅뜬 매니의 눈을 보며 나는 그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겠다는 불길한 느낌을 가졌다.
  매니를 태운 택시가 멀어져가는 것을 보고 나는 돌아섰다.
  그런 일이 있은지 두 주일이 지난 월요일 매니는 출근을 하지 않았다. 나는 이상하게 어두운 예감이 들어 하루 종일 매니의 텅빈 책상을 이따금 곁눈으로 보며 지났다.
  화요일에도 매니는 나타나지 않았다. 수요일에도 매니의 책상은 비어 있었다.
  목요일 출근하니 어쩐지 분위기가 뒤숭숭하고 직원들이 몇 명씩 모여 수군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같은 과의 직원에게 물었더니 그는 내게 신문을 내밀어주면서 말했다.  
  “매니가 죽었어.”
  “뭐? 매니가 죽었다고?”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는 어쩐지 예견했던 일이 벌어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마지막 보았을 때 술에 만취되어 눈알을 이글거리며 증오 담긴 말을 뱉어내던 매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신문기사에는 매니 베카리아가 이혼한 자기 처와 그 보이후렌드 백인 남자를 권총으로 쏴서 죽이고 자기도 이마에 한 방의 총을 쏴서 자살했다고 씌어져 있었다. 맙소사. 증오심을 품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그렇게 독한 마음으로 죽음을 향한 복수심을 품고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더 잘 살아보겠다고 미국으로 왔다가 비극으로 생을 끝내버린 것이다. 살아서 뒤에 남은 딸이 몇 살인지는 모르지만 그 딸의 머릿속에 죽을 때까지 인각되어 있을 이 사건은 또 하나의 희생자를 만들어 낸 셈이었다.
  회사 안에서 마치 큰 일이 일어난 듯 떠들어대던 이 사건은 불과 이틀이 지나고 주말을 맞은 후 월요일이 되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망각의 사건이 되어버렸다. 매니 베카리아의 빈 책상에는 다른 직원이 배치되어 매니가 서랍에 남기고 간 사물을 부산스럽게 쓸어내어 휴지통에 버리고 있었다.

                                 (15)

  돈 없고 특별히 자랑할 만한 것이 없는 나 같은 독신 남자가 혼자서 살아가는 데에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식사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고 또 하나는 성욕을 처리하는 일이다. 돈은 이 두 가지 문제를 거뜬히 해결해 줄 수 있지만 나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골치를 앓으면서 시달리고 있는 군상중의 하나가 되어 있었다. 매일 햄버거만 먹고 살 수 없어서 이따금 34번가에 있는 한식집을 찾아가 설렁탕이나 갈비를 걸신들린 듯 먹고 오지만 그 것도 차가 없이 사는 나에게는 꽤 먼 거리를 걸어서 가야하는 불편 때문에 자주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윤수진이 샬리스인가 어디에서 살면서 한식 음식은 구경도 못하다가 뉴욕으로 이사 왔을 때 곰탕집에서 게걸들린 듯 김치 깍두기를 먹어대던 것을 생각하며 나는 속으로 웃었다. 변경된 문화와 생활환경에 동화하는 데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이놈의 완고한 식성이 아닌가 생각한다.
  게다가 성욕을 처리하는 것은 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도색 잡지를 보며 자위행위를 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원천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정신을 지배하는 도덕률보다는 육체를 지배하는 쾌락의 동력이 더 강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노릇이지만 인정해야하는 현실인 것이다. 천사의 말보다는 사탄의 속삭임이 더 달콤하게 들리는 것이다.
  회사에서 퇴근해서 써브웨이에서 내려 아파트까지 항상 똑같은 길을 걸어 다니는 동안 그 길 중간쯤에 있는 싸구려 술집을 알게 되었다. 내가 그 앞을 걸어지나가는 바로 그 때쯤에 일하는 사람이 나와 발레 파킹의 표지판을 길에 내놓곤 했는데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손을 흔들고 눈인사를 주고받았었다. 몇 번 그러던 녀석이 어느 날 싱글거리고 웃으며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자기 이름이 에딜이라고 소개하며 들어와서 맥주 한 잔하라고 하는 것이다. 호기심에 따라 들어간 술집 안은 아직 영업을 시작하지 않아서 탁자 위에 의자를 거꾸로 올려놓은 황량한 모습이었다.
  에딜은 카운터 뒤로 가서 맥주를 두 병 꺼내서 하나를 나에게 주고 자기도 하나를 들고 꿀꺽거리며 마셨다. 그러더니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자기는 쿠바에서 쪽배를 타고 불법으로 들어온 이민자라고 자랑하듯 떠벌렸다. 그러나 이제 곧 영주권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 술집 주인도 쿠바에서 이민 온 사람이고 일하는 사람들도 모두 쿠바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했다.
  내가 이 에딜이라는 친구와 말하고 있는 사이에 저 안쪽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던 내실에서 화장을 짙게 한 여자가 나와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보더니 쌔글거리고 웃으며 와서 내 옆의 스탠드 의자에 앉았다. 짙은 화장 뒤에는 뜻밖에도 앳된 얼굴이 숨어 있었다. 화장품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결코 싫지 않은 냄새였다. 전신의 세포가 스물거리며 살아 일어나더니 잠깐 사이에 아우성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자는 아마 이 집에 들어온 첫 번째 동양계 손님이 틀림없을 것 같은 나에게 흥미롭다는 듯 추파를 던지며 그 굴곡지고 풍만한 몸으로 은근하게 나를 밀어붙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맥주병을 들고 꿀꺽거리며 마셨다. 빈속에 갑자기 들어간 알코올이 위력을 발휘하며 내 정신을 혼란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본의 아니게 아랫도리가 뿌듯하게 부풀어 올라왔다. 야하게 자극하는 화장품 냄새와 언뜻언뜻 보일 듯 말 듯 한 깊이 파인 옷 속의 젖가슴 계곡에 도취되어 맥주 두 병을 마시고 나는 아쉬운 작별을 했다. 이름은 알리시아라고 했다. 나는 술값과 팁으로 이십 불짜리를 하나 꺼내어 카운터에 놓고 알리시아의 허리를 한 번 안아보고 밖으로 나왔다.
  에딜이 따라 나오며 나에게 물었다.
  “너 이름이 뭐야?”
  “챨스.”
  “챠이니스?”
  “아니. 코리안이야.”
  “또 와. 자주 와. 오우케이?”
  이렇게 해서 이 술집 사람들과 알게 되어 퇴근하는 길에 이따금 들려서 잡담을 하면서 쿠바 이민자들의 사는 모습을 좀 알게 되었다.
  미국의 마이아미에서 쿠바까지는 불과 332 마일 밖에 되지 않는데 쿠바는 공산국가가 되어 미국의 눈의 가시가 되어 있는 것이다. 332 마일은 서울과 부산 거리의 불과 한 배 반 정도의 길이이다. 일거리가 없고 살기 어려운 쿠바에서 거의 매일 쪽배를 타고 위험한 항해를 해서 플로리다 남단 해안으로 불법 이민자가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미국에는 이런 불법 이민자를 다루기 위한 기묘한 법이 있는데 속칭하여 “젖은 발, 마른 발 (WET FOOT, DRY FOOT)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쪽배를 타고 오다가 바다에서 미처 플로리다 해안 땅을 밟기 전에 발각되면 (젖은 발 WET FOOT) 추방당하게 되고 다행히도 발각되지 않고 해안 땅을 밟고 상륙하게 되면 (마른 발 DRY FOOT) 입국이 허가되어 일정기간이 지나면 영주권을 받고 합당한 절차를 밟아 결국 미국 시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귀재의 두뇌에서 나왔는지 모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희한한 법이었다.
  이 술집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거의 모두가 그렇게 쪽배 입국을 했고 운이 좋아 바다에서 발각되지 않고 해안에 상륙한 후에 그 묘한 법에 따라 합법적인 대기 상태에 있거나 그 절차를 끝내고 이미 영주권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영주권을 발급 받고 나면 그 5년 후에는 합법 이민자와 똑같이 미국 시민이 되기 위한 청원을 할 권리가 생기는 것이다. 물론 영어로 하는 시민권 시험과 인터뷰를 거쳐야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영어와 똑같이 로마식 알파벳을 쓰는 스페인어가 모국어인 이들에게는 영어 배우기가 우리 한국 사람이 겪는 것처럼 고통스럽고 힘들지 않은 모양이다. 이들은 우리보다 훨씬 쉽고 빠르게 영어를 익힌다. 물론 그들 중에도 수십 년을 미국에서 살고도 영어를 못하는 멍텅구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나는 이 술집의 알리시아와 친해져서 이따금 퇴근길에 들려서 맥주 한두 잔을 마시고 여자 냄새를 맡으며 잡담을 하다가 나오곤 했다. 팁으로 20불짜리  한 장을 주면 함박꽃만하게 웃으면서 온몸으로 비비고 밀어붙이면서 좋아하는 것이 마치 어린애 같았다. 이 알리시아도 한 반년 전에 쪽배를 타고 쿠바에서 밀입국했는데 운이 좋아서 바다에서 잡히지 않고 플로리다 땅에 발을 디딜 수 있어서 합법 상태가 되어 영주권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아직은 영어가 서툴고 어쩐지 천진스러운 데가 있는데다가 동양 사람과 달리 팔다리가 긴 이국정취가 여간 매력적인 것이 아니었다.
  어느 금요일 오후 퇴근하고 나는 또 바에 들렀다.
  “하이, 에딜.”
  이제 서로 꽤 친해진 에딜과 악수를 하고 카운터 앞의 긴 의자에 앉았다.
  알리시아와 이제 관계가 좀 무르익었다 싶어서 눈 질끈 감고 사탄이 시키는 대로 한 번 바람을 피워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만 했는데도 벌써 나의 아랫도리는 단단하게 팽창해 왔다.
  역시 영업시간이 아닌 술집 안은 불을 켜지 않아 어둡고 조용했다.
  주문하기도 전에 에딜이 맥주를 내놓았다.
  “오늘은 알리시아가 없어.”
  빌어먹을. 하필이면 오늘따라. 나는 실망했지만 겉으로는 짐짓 대단치 않은 것처럼 태연했다. 그런데 에딜이 내뱉은 다음 말에 나는 놀랐다.
  “잡혀갔어. 어제 밤에 손님에게 코케인을 팔다가 들통난 거야. 그 손님이 FBI의 끄나풀이었던 것을 몰랐지.”
  “뭐라고? 코케인?”
  “어제 밤에 경찰이 와서 여기를 발칵 뒤집어 놓았어. 아마 알리시아는 재판을 받고 추방당할 거야.”
  에딜은 일상의 일을 말하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마 이런 일을 심심찮게 당해본 모양이었다.
  “한쪽에서는 추방당하고 한쪽에서는 계속 들어오고 그래. 들어오는 쪽이 추방당하는 쪽보다 더 많아. 알리시아가 걸려 들어갔기 때문에 당분간 우리는 조심해야 돼. 마약 때문에 쌔끼들이 감시하고 있을 테니까 말이야.”
  나는 에딜과 작별하고 술집을 나왔다. 그리고 그것이 그 술집에 들어가는 마지막 날이 되었다. 어쩐지 허전한 마음인 것은 미처 충족되지 못하고 온몸에서 스물거리고 있는 욕망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에 11월 뉴욕의 바람이 매서워지기 시작하는 계절이 되고 내가 윤수진의 집을 나온지 벌써 7개월째가 되어가고 있었다. 윤수진의 집. 나는 속으로 씁스름하게 웃었다. 그래, 윤수진의 집이야. 우리의 집이 아니고 윤수진의 집이야. 거기서 한참 얹혀서 살았지. 나는 자학했다. 그러면서 나는 백화점마다 성급하게 매달아놓기 시작한 크리스마스 장식을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는 사람처럼 무덤덤하게 보며 지나다녔다. 작년에도 했고 그 전 해에도 했고 십년 전에도 했던 그 눈에 익은 장식, 귀에 익은 징글벨, 화이트 크리스마스, 빨간 옷의 산타 크로스. 이상하게도 아무도 싫증내지 않고 잘도 웃고 떠들면서 마냥 즐겁다고 하지 않는가. 그 들뜬 군상들을 보는 내 마음은 도리어 차갑게 식어 들어갔다. 허영과 가식의 시장. 진실을 유기하고 위선의 가면을 뒤집어쓴 속물들의 잔치. 나는 아무리해도 그 속에 합류해서 같이 떠들며 웃고 즐거워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외톨이였고 이 세상을 홀로 가는 길손이었다. 그것이 내가 선택한 삶의 방법이었다. 혼자 있을 때가 더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이따금 누군가가 옆에 있었으면 하고 생각할 때도 없지 않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아무와도 의미 있는 대화를 해보지 못하며 7개월을 침묵 속에서 혼자 살아오면서 내 마음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황폐해지고 있었다. 누군가와 마음을 터놓는 공통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 필요했다. 온기를 잃고 차가워지고 있는 마음에 모닥불을 지필 사람이 필요했다. 나로 인하여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옆에서 그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이 따뜻해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윤수진 녀석에게 전화해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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