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집 폐허

2004.08.04 05:47

박경숙 조회 수:449 추천:12

그 여름의 같은 푸르름이라도 고향의 푸른색은 달랐다. 오종종 잎은 매단 작은 나무들과 먼 산의 초록은 내가 사는 이국땅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사철 햇빛이 강한 곳이라 여름이면 오히려 누렇게 타버리는 캘리포니아의 산과, 지친 듯 빛이 바랜 검녹빛 잎을 매단 내 집 발코니 앞 사철나무에 비하면 울컥 정겨움으로 다가오던 그 고향의 빛.

처음엔 고향동네 못미처에 있는 부모님 산소까지만 갔다가 되돌아오기로 한 길이었다. 3년 전 어머니가 떠나시고, 온통 폐가처럼 되었다는 고향집을 선뜻 들어설 용기가 없던 까닭이다. 작년 여름 고국을 방문했을 때도 나는 부모님 산소까지만 갔다가 되짚어 왔다. 조금은 아쉽고 후회스러웠지만, 내 일생을 통틀어 골백번도 더 어머니를 부르며 들어서던 그 집에 이제 부를 이름도 없이 들어 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30년 넘게 고향에서 약국을 경영하고 있는 둘째오빠는 우리 형제간 중 유일하게 고향 토박이가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 집을 물려받고 아버지가 갖고 계시던 고향의 여러 명예직함까지 물려받은 오빠는, 의료파업 후 동네 외과병원 근처로 약국을 옮기고 늘 찡그린 얼굴로 앉아 있다. 언제 보아도 내가 할 일은 이게 아닌데……. 하는 표정이다.

매약 중심이던 고속버스터미널 안 상가에서 몇 년 전까지 약국을 경영하며 비교적 자유롭던 오빠는 이제 조제실을 떠나지 못하는 게 퍽 불행해 보였다. 젊은 시절엔 나팔도 불고 독서광이던 낭만파 오빠는, 이제는 컴퓨터광이 되어 조제실에 앉아 약 짓기보다는 온갖 파일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생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고 있었다.

차라리 어느 제약회사 연구직으로 일생을 보냈더라면 좀 나았을 텐데 싶었다. 세 아들 중 하나는 고향을 지키라는 아버지 말씀에 촌부가 되어버린 오빠. 그가 끄적대던 시 구절들이, 방학을 맞아 고향집을 방문했던 내 손길에 책꽂이 귀퉁이에서 튀어나오기도 했었다. 사람이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생을 보내기도 참 힘든 일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니 얼마 전 세상을 떠난 큰오빠의 일생까지 얼비쳐 왔다.

잘생긴 문학청년이었지만 기업에 들어가 해외 생활이 길었던 큰오빠, 그 바쁜 생활의 여파 때문이었던지 너무 일찍 떠나시고 말았다. 새천년을 맞자마자 큰언니를 보내고, 그 이듬해 어머니가 떠나시고, 이제 큰오빠마저 떠나버린 운이 쇠한 듯한 이 집안 막내인 내 가슴엔 차라리 슬픔마저도 담담해져 가는 느낌이다. 문득 고향집에 들어가 보고 싶어졌다. 얼마나 폐허가 되었는지 그 실상을 보고야 마는 게 차라리 시원할 것 같았다.

터벅터벅 걸어 들어간 골목길, 내 어린 시절의 온갖 추억이 어린 그 옛날의 신작로는 주변의 넓어진 도로에 비하면 이제 좀 넓은 골목길에 불과했다. 옛날에 고등학교 선생님이던 배선생네 일가가 살던 우리 옆집이 갑자기 경로당으로 둔갑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과연 그 집터엔 2층짜리 건물이 세워지고 노인들이 들락거렸다. 배 선생네 고부간은 얼마나 싸워대던지 늘 동네가 시끄러웠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소리를 지르고 다투면 어정쩡 우물대며 돌아서던 배 선생의 키가 큰 모습이 그대로 그 집 앞에 어른거렸다.

은색 철제로 새로 갈아붙인 고향집의 커다란 대문을 들어서니 올해 대학을 졸업한 조카가 화강암으로 된 댓돌에 오두마니 앉아 있다. 바싹 마른 모습이 제 아빠의 청년시절을 연상케 하는데, 둘째오빠의 둘째아들인 이 아이가 다시 고향집을 오래 지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우리 형제간의 어린 시절 일화를 전설처럼 꿰고 있는 조카는 요즘 젊은 아이들답지 않게 과거와 전통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서가로 쓰던 사랑방은 문이 열린 채 텅 비어 있고 거기 있던 책장은 마당 추녀 밑에 세워져 있었다. 안채 부엌 창문 앞에 놓인 평상에 비닐 돗자리로 덮인 것이 있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그것이 모두 책이란다. 얼마 전 약국에 관리약사를 잠깐 들였는데 도시에서 온 여자라 방을 내주느라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 관리약사가 이젠 떠났는데도 책 정리를 하지 않고 방치한 것이 못마땅해 나는 그저 입술을 실룩해 보였다.

출가외인이 이젠 무슨 할 말이 있단 말인가.

지난 날 윤기가 흐르던 툇마루엔 웬 비닐 장판이 깔리고 대부분의 시간을 약국에서 보내는 올케가 그저 편리한 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살며시 장지문을 열고 들어간 안방엔 자개장식이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어머니의 낡은 경대가 그대로 있었다.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어머니의 장롱과 뒤 대청마루에 아버지가 늘 앉으시던 팔걸이의자, 찬방 그릇장엔 아버지가 애용하시던 백색 본차이나 커피 잔이 얌전히 포개져 있다. 그러나 안채에 딸린 세 개의 방엔 방마다 조카의 책이며 CD, 잡동사니가 창고처럼 어질러져 있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그 방은 이제 제 아빠를 닮아 컴퓨터광인 조카의 작업실이 되어 버리고, 오빠네는 아래채 양한옥 절충식 건물에 그대로 머물고 있었다. 하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오빠네 부부가 불쑥 안채로 옮기기도 그런 모양이었다.

어머니의 체취가 물씬 묻어나올 것 같은 부엌엔 올케가 삶아 놓은 감자 몇 알이 접시에 담겨 식탁에 놓인 채 작은 플라스틱 소쿠리로 덮여 있었다. 나는 그 감자를 한입 베어 물며 슬리퍼를 끌고 뒤뜰로 걸어갔다. 입 안에서 쫀득거리는 감자 맛은 찌개에 넣어 끓이면 금방 부서져 버리는 미국 감자와는 확실히 다른 맛이 있었다. 어린 시절 삶은 감자를 좋아하는 나를 보며, 우리 딸 이담에 강원도 감자바위로 시집보내야겠다고 하시던 아버지…….

폐허의 실상은 뒤뜰에서 더 심하게 다가왔다. 지난날 장을 달일 때만 장작을 때 사용하던 가마솥이 걸린 옥외 아궁이엔 이끼가 끼고, 뒤뜰을 거의 차지한 넓은 장독대엔 거친 먼지가 앉아 있었다. 나는 이런 폐허를 미리 예견이나 한 것이었을까. 지난 98년 어머니가 멀쩡히 살아계실 무렵 ‘방 한칸’이란 제목으로 중편소설을 썼는데 폐허가 되어가는 고향집에 대해, 시대에 대해 풀어나갔다. 마지막엔 그 안에서도 희망을 발견하는 것으로 끝을 냈지만 이 현실의 폐허 어디에서 희망을 찾아야 하는 것일까.

담담한 슬픔이 다시 가슴을 적셔왔다. 돌아 나온 앞뜰에도 폐허의 흔적은 무성했다. 문득 박경리 선생의 토지에 나오는 평사리 집 폐허가 떠올랐다. 지난날 아버지가 장미를 정성껏 가꾸시던 화단은 팽개쳐진 채 잡풀이 돋고, 윗 표면이 절구통처럼 파인 네모난 장식 돌만 대문 옆에 그대로 서 있었다. 어린 시절 언니와 꽃잎을 찧으며 소꿉장난을 하던 곳, 그 옆에 눈사람을 만들어 세워놓고 사진도 찍던 곳이다.

오빠는 고향집을 지키기 싫은 것일까. 근면하시던 부모님의 성정을 전혀 닮지 않은 오빠는 책과 컴퓨터 속에서 이상을 찾는 비현실주의자인지도 몰랐다. 그런 기질은 사실 나에게도 있었다. 곱게 키워 세상의 척박함을 잘 이기지 못하는 우리 형제간들에게 난무하는 그 이상주의는 이 시대에 우리의 생을 몹시 힘들게 했다.

가만히 마당을 둘러보니 곳곳에 잡초가 지천이었다. 아직도 댓돌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조카가 좀 무안한 듯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얘야! 너는 이 집 아래채에서 태어났지만 나는 안방에서 태어났단다. 내 인생의 역사가 깊은 이집이 이러하니 좀 섭하구나.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을 꿀꺽 삼키며 나는 조카에게 빙그레 웃어보였다. 세대는 다르지만 자신들의 생가에서 교환하는 조카와 고모의 눈길에 알지 못할 서글픔이 어렸다.

지난날엔 얼마나 많은 손님들이 드나들던 집이던가. 워낙 손님치레가 많으셨던 아버지 덕에 우리 집 딸들은 과일을 깎고 차를 끓이는 데 이골이 나 있었다. 이제는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집, 이집의 딸인 나마저도 지난여름엔 들르지 않고 떠나버리지 않았던가.

생의 일화가 전설이 되기도 잠깐이었다. 내 머릿속엔 훤한 우리 형제간 성장의 기억들을 말로만 들어온 조카는 군데군데 틀린 얘기들을 엮어내며 그 전설을 즐기고 있는 듯 했다.

거의 60년 전 아버지가 이 집을 처음 사셨을 때도 집은 그렇게 폐허에 가까웠다고 했다. 웬 과부가 혼자 살던 집이었는데, 집을 건사할 남자가 없던 탓인지 마당엔 잡풀이 무성해 뱀이 기어 나올 것만 같았단다. 부모님이 한생을 다 사시며 가꾸고 가꾸어온 집, 이제 다시 폐허기에 들었다. 하긴 연이어 농사를 지으면 땅도 산성화 돼 한동안은 그 땅을 버려두어야 한단다. 그래야만 그 땅에 다시 생성의 기운의 쌓인다고 말이다. 어쩌면 이집도 그런 휴식기에 들어야할 때인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의 일생 내내 너무 분주했던 집, 어머니는 올케에게 집을 물려주며 말씀하셨다고 했다.

얘야! 너 집 간수 잘해라. 이 집이 세 번 빛날 운이 있다하더라. 한번은 너희 아버지 때문에 빛났으니 아직 자손 중에 집을 빛낼 일이 두 번이나 남았다.

올케는 언젠가 그 말을 반복하며 은근히 자손복락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대부분 도시로 떠나가 버린 집안에서 지방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집에 오두마니 않은 조카, 그 애와 나는 어느새 고향집의 폐허를 남모르게 음미하고 있었다. 분명 폐허엔 희망이 숨어 있었다. 우리가 모르는 미래 속에.

중년에 미국으로 떠나 강산도 더 변할 만큼 살다 돌아온 이 집의 딸이 어느 여름 폐허의 고향집을 방문했다는 것은 또 조카의 머릿속에, 아니면 그 아이가 낳을 다음 세대의 자손들에게 또 전설이 될 것인가. 생의 자취가 언젠가는 후대의 핏줄 속에 남을 것을 생각하니 문득 삶에 대한 책임감이 느껴졌다.

다시 터벅터벅 골목길을 걸어 고향집 그늘을 빠져나왔다. 내 생의 전설을 찍으며, 폐허 속의 희망을 찍으며……. 어느새 슬픔이 물러난 어떤 아늑함이 내 가슴을 훈훈히 채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