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년만의 데이트 신청

2004.12.24 21:40

조만연.조옥동 조회 수:210 추천:7

                          41년만의 데이트 신청

                                                                                                                            조만연
                                                      
  지난 주말 사무실로 발신인이 써있지 않은 편지 한 통이 배달되었다.  그런 경우가 별로 없는 터라 다소 궁금증을 가지고 뜯어보니 뜻밖의 내용이 써 있었다.  자신이 옛날 창경원 미팅 때 사라져 버린 그 여학생이라는 것이었다.  까맣게 잊고있었던 얼굴도, 이름도 모르던 그 미지의 파트너가 이제서야 나에게 소식을 전해 오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며칠 전 있었던 어느 출판기념회에서 나를 보았다고 했다.  사회를 보던 나의 이름을 보고 긴가민가하였으나 동석했던 옆 사람에게서 나의 신상명세를 듣고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녀도 그 동안 나를 한번 만나고 싶어했노라고 써있었다.  불현듯 그날의 어이없는 해프닝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요즈음은 젊은이들이 미팅을 손쉽게 할 수 있고 데이트도 공개적으로 하고 있지만 우리가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미팅은 별 난 학생이나 하는 것으로 여기는 시절이었다.  
  
  1963년 가을, 아주 대규모 단체미팅이 이루어졌다.  아마도 한국 역사상 최초이자 최대의 대학생미팅이 아닐까 생각된다.  내가 다니던 대학교와 E여대가 그룹이나 단과대학도 아니고 대학교 대 대학교의 전체 집단미팅을 마련한 것이다.  419 학생의거, 516 군사쿠데타, 학보병 입대 등으로 데이트는커녕 미팅 한번 못하고 졸업을 몇 달 앞 둔 나는 학창시절 마지막 낭만의 꿈을 안고 이 미팅에 참가하기로 하였다.  금액이 얼마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각 단과대학의 준비위원으로부터 티켓을 샀다.  행사 당일 오후 5시경 미팅장소인 창경원에 도착하니 정문 입구는 천여명이 넘는 두 대학교의 남녀학생들로 마치 장터와 흡사하였다.  1번에서 50번, 51번에서 100번, --- 이런 식으로 일련번호를 붙혀 놓은 높다란 푯말 아래서 자기번호와 동일한 번호를 가진 파트너를 만나도록 되어있었다.  하지만 그런 계획은 출발부터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학생들이 순진(?)해서 선뜻 그 푯말에 가서 설 용기가 없었고 또 섰다해도 자기번호를 보이지 않은 채 상대방에 대한 눈치작전만 펼치는 바람에 자기 파트너가 누군지 도대체 알 길이 없어 웅성대기만 했을 뿐 짝을 찾기가 매우 어려운 노릇이었다.  개중에 재빠른 학생들은 즉석에서 짝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흐르고 어두워져 가로등이 켜질 무렵 나는 파트너 찾기를 단념하고 그냥 혼자서 창경원 안으로 들어갔다.    
  
  창경원 안은 파트너를 구한 학생보다도 그렇지 못한 학생들이 더 많아서 남학생은 남학생끼리, 여학생은 여학생끼리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많은 수의 학생들은 헛 탕을 치고 아쉬움을 삼긴 체 귀가하기도 했다.  그렇게 창경원 안을 얼마쯤 돌았을 때 마주 지나치던 일단의 무리 중 하나가 나에게 다가왔다.  E여대에 다니는 바로 밑 여동생이었다.  여동생은 용케도 파트너를 만났는지 친구와 함께 남학생 두명이 곁에 서있었다. "아니, 오빠는 아직도 파트너를 못 구했어?"  "야. 이렇게 복잡하고 캄캄한 데서 어떻게 찾을 수 있겠니.  이왕 들어왔으니 한 바퀴 돌아서 그냥 가야겠다." 파트너를 만나지 못한 것이 동생의 탓이라도 되는 양 볼 멘 소리를 터뜨리니 여동생은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잠깐 여기 있어봐. 조금 전 내 후배가 혼자 지나가더라구---" 말을 마치자 오던 길로 되돌아가더니 잠시 후 한 여학생을 데리고 왔다.  " 오빠, 인사해. 같은 과 1년 아래인데 얘도 파트너를 만나지 못했다고 하니까 두 사람이 잘 해 봐" 동생은 그렇게 말하고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일행과 사라져버렸다.  나는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당황스럽고 조금 쑥스러웠으나 이만해도 다행이라 여기며 "상대 경제과에 다니는 조만연입니다." 간단히 내 소개를 하였는데 불빛을 등지고 있는 그 여학생의 얼굴은 윤곽만 어렴프시 보일 뿐이었다.  그래서 밝은 곳에서 정식으로 인사도 나누고 저녁식사도 할 겸 부근에 있는 연못(춘당지) 가운데 세워진 전각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마악 전각으로 들어가는 다리입구에 와서 잘 따라오나 뒤돌아보니 아뿔사 그 여학생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보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찾을 수가 없었다.  수많은 남녀학생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어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아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이런. 얼굴이라도 잘 봐둘걸---") 주의성 없는 실수를 후회하며 혹시 그녀라도 나를 알아볼 수 있을까 하여 한참을 두리번거렸으나 헛수고였다.  나는 그곳에서 십여분을 그러고 서 있다가 심한 낭패감을 안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여동생에게 그 사실을 말했더니 "그래? 나도 같은 과 후배인줄만 알지 이름도 어느 고교출신인지도 잘 몰라" 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래도 나는 파트너를 살펴주지 못한 결례를 사과하고 싶어 여동생을 통해 그녀를 수소문했지만 학년도 다르고 수강시간도 틀려 만나기가 쉽지 않다며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흐지부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41년이 지난 지금 그 여학생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온 것이다.  그 편지의 말미에는 휴대전화 번호와 함께 다음과 같이 써 있었다.  "그날 인사도 없이 가서 죄송했어요.  만나서 사과 드리고 싶어요.  들어보시면 왜 그랬는지 이해하시리라 믿어요.  금년이 가기 전에 꼭 뵙고 싶습니다.  그 때 불발로 끝난 데이트를 이제라도 대신하고 싶군요.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12월 5일   안XX 드림."  나는 그 편지에서 내가 그녀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고 그녀가 스스로 간 것을 알게되어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미안한 마음은 단번에 없어졌지만 왜 그녀가 그래야 했는지 몹시 궁금해졌다. 그녀에게 연락을 해야 할 것인가? 아니 몇 십년 지난 일을 새삼 들춰본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녀는 어떤 사람이며 어째서 만나자고 하는 것일까? 나는 연말이 다된 마당에 느닷없이 찾아온 이 일로 많은 생각을 하게되었다. 새해를 맞기 전 매듭져야 할 문제가 또 하나 추가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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