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사랑 진희 -

2006.05.15 23:02

이 상옥 조회 수:883



" 내 사랑 진희 "  


활주로 끝에서 이륙을 기다리던 여객기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점점 속도를 높이던 비행기가 그 큰 몸집을 조금씩 앞으로 내밀더니,
드디어 요란한 폭음과 함께 플로리다의 습기 가득한
여름 하늘을 향해 높이 치솟기 시작했다.
비행장 주변의 고속도로에는 장난감 같은 자그마한 차들이 마치
개미처럼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플로리다 주 올란도 시의 다운타운 고층건물과 넓다란 호수,
그리고 그 위를 하얀 새 서너 마리가
평화스럽게 날아가는 모습이 보이고,
저 멀리 쾌적한 동네에는 기역자의 페어웨이와 그린 주위의
모래 벙커들이 보이는 멋진 골프장도 눈에 들어왔다.
또 그 동네 옆으로 길게 뻗은 사차선 인터스테이
4번 고속도로의 북쪽 차선은 통행차량이 한산했지만
남행 차량들은 벌써 어린이들의 유료 위락 시설인
"디즈니 월드" 입구서부터 아주 긴 차량의 행렬이 이어져 있었다.
무심코 "매직 킹덤"에 눈을 주던 금석은 문득
오래 전 아내 미영과 어린아이들이 함께 했던
플로리다 "디즈니 월드" 휴가의 추억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흔들며 쓴웃음을 지어야 했다.
인간들이 만들고 공유하는 추억이란
현실적인 진실을 바탕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일까?
세월이 흘러버린 현재와는 전혀 관계없이 달콤하기도 하고
쓰라린 회한으로 눈을 지그시 감아 버려야 하기 때문인 것이다.


"띵"
이륙 직전의 적색 경고등이 꺼지자
금석은 유리창의 하얀 셰이드를 내리고 비행기 앞쪽
비즈니스 클래스 앞 의자 뒤편에 접혀져 있는 식탁을 폈다.
그는 이륙할 때 의자 아래 놔 두었던
자신의 램탑 피씨를 꺼내 식탁을 펴서 그 위에 얹고 뚜껑을 열었다.
때마침 비즈니스 클래스를 담당한 여승무원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마실 것 드릴까요?"
"그냥 찬물 한 병만 줄래요?"
"네, 여기 있습니다."
그녀는 새하얀 유리컵에 얼음을 가득 담고
조용히 물을 따라준 다음 나머지 반쯤 남은 플라스틱 물병을
식탁에 조심스레 놔주고
뒷좌석으로 사라졌다.
釜??오늘 아침 컴퓨터에 입력한 고객회사 부사장과 맺은 계약서를 찾아내어
습관대로 리뷰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믿을수 있는 회사지만 간혹 인간적인 실수라던가 구두로 한
계약 내용이 더러 고쳐져 있지 않은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Mr.Brook과는 벌써 오랫동안 거래를 해 왔기 때문에 처음 만났을 때
한번 실수를 한 이후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 요즈음 말로
정말 코드가 잘 맞는 거래 파트너였다.
역시 꼼꼼한 그의 성격대로 아주 깨끗하고 깔끔하게 작성한 마음에 드는 계약서였다.
금석은 미소를 지으며 컴퓨터를 껐다.
얼핏 시계를 보니 시카고까지 아직도 한 시간 가량이나 남아 있어
그는 베개를 베고 창쪽으로 머리를 둔 채 잠을 청하였다.
스튜어디스가 재빨리 친절하게 담요를 가져다 덮어주었다.


얼마만큼 왔을까 기체의 작은 움직임이 어슴푸레 느껴졌다.
드디어 착륙준비를 한다는 기내 아나운스먼트와 함께
파란 미시간 호수가 눈에 들어왔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호수에는 하얀 돛을 단 요트떼가 바람을 가득 안고 평화스럽게 떠있었고,
씨어즈 타워를 중심으로 호숫가에 아름답게 펼쳐진
시카고 다운타운의 고층 건물들이 마치 그림같이 환상적이였다.
비행기는 서쪽으로 넓직하게 뻗은 I-290(인터 스테이 290번 길) 고속도로에 차들이
주차장처럼 길게 늘어선 그 위를 천천히 날아
오헤어 공항으로 착륙준비를 하고 있었다.
낯익은 풍경들이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아파트와 아담한 동네의 단독 주택들
파아란 잔디 밭 공원과 초록 색 테니스 코트.
호수를 헤엄쳐 가는 오리 떼.
그때 바퀴와 지면의 충돌음이 들렸는가 싶더니
비행기는 천천히 감속을 한 후 터미널을 향해 택시웨이를 달렸다.


금석은 출장을 갈 때 언제나 짐을 간단히 꾸렸다.
짐을 부치고 다시 찾아야 하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기내 반입이 허용되는 백에 최소한 꼭 필요한 숫자만큼의
속옷과 간단한 세면도구, 양복이 든 백,
그리고 몇권의 책을 넣고
노트북 컴퓨터를 어깨에 메면 준비 완료였다.
그렇기 때문에 금석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곧바로
자신의 차가 주차된 공항 파킹랏으로 가는
기차를 타러 갈 수 있었다.

그는 기차 정거장 쪽으로 걸으며 아내 진희의 사무실로 전화를 했다.
"하이 하니! 나 지금 도착했어."
"어마! 당신 일찍 왔네."
"응 여보, 당신이 보고 싶어서 계약서 사인하자마자 공항으로 직행했지 뭐!"
"와우! 하하, 고마워 여보, 나도 당신 보고 싶었어! 그런데 볼일은 잘 봤어요 ? "
"응, 아주 원더풀야 ! 그런데 여보, 숙이 오늘 시합하는 날이지 ? "
"응, 롤링 메도우 하이 스쿨( Rolling Meadow High school )이예요.
지금 공항에서 바로 가면 돼 여보."
"탱큐, 나 숙이 데리고 갈 테니 당신이 피터 책임져요 ! "
"오우 케이, 하니 I love you ! "


금석은 공항기차를 타고 리모트 파킹랏에서 내렸다.
늦여름 오후의 따가운 열기를 느끼며
자신의 차를 찾아 리모트 차 열쇠로 트렁크를 열어
가방과 백을 집어넣고 실내 온도를 적당히 조절한 다음
천천히 미끄러지듯이 공항을 빠져나와
유료 고속도로 게이트에 동전을 던지고는 나는 듯이
숙이의 운동 시합이 열리는 롤링 메도우 하이스쿨로 달려갔다.

차를 파킹시킨 후 고등학교 육상 경기장을 향해 잰걸음으로 달려가니
막 경기가 시작된 모양이었다.
숙이 학교의 마스코트인 오렌지색 머스탱( 미국의 야생마 )이 그려진 깃대 쪽에
포니테일( 말총머리 )을 한 몇명의 소녀선수들이 서 있었고,
다른 선수들은 모두 트랙으로 내려가
지금 막 100미터 달리기 출발신호와 함께
8명의 선수가 마치 잭 레빗(Jack Rabbit: 미국 야생 토끼)처럼 출발점을 뛰어나간
그 선수들을 위해 다른 선수들은 응원의 함성을 하늘 높이 내지르며
열광하고 있었다.
선두는 두 명의 오렌지색(머스탱)저지였다.
그 뒤를 한 명의 하늘색(배저 -오소리)저지가 바짝 뒤따라 달렸다.
순식간에 결승점을 통과하는 선수들과 그들의 수고를 격려하는 다른 선수들.
금석은 그 선수들 무리 가운데 쉽게 동양인의 검은 머리를 한 숙이를 발견했다.
숙이 역시 관중석의 아빠를 알아보고 손을 흔든다.
이미 낯이 익은 트랙선수(육상부 선수)들의
부모와 인사를 한 금석은 다른 부모들처럼 아이들과의 추억을 만들고 있었다.
폴란드에서 이민을 온 Mr.고스키가 바로 옆 스탠드에서 손을 흔들며 아는 체를 한다.
그는 육상 팀의 주장이며 숙이처럼 중장거리 선수인 르네의 아버지였다.
숙이가 말해주는 르네는 공부와 운동을 모두 잘하는 모범생이며 사학의 명문인
스탠포드 대학에 진학하려는 우수한 졸업반 학생이었다.

잠시 후 파아란 잔디밭에 오렌지색의 흙을 깔고
거기에 하얀 트랙을 그려 마치 올림픽 육상 경기장의 꿈을 그린 듯한 운동장에
오렌지색 저지를 입은 선수 4명과 하늘색 저지 4명이 트랙에나왔다.
물론 숙이도 있었다.
바로 숙이가 대표선수의 한사람으로 출전하는 800 야드 트랙경기였다.
키가 거의 비슷한 사프모어 선수 숙이, 주니어 선수 신디
그리고 시니어인 르네와 줄리였다.
출발 신호와 함께 르네를 선두로 오렌지색 선수들과 하늘색 선수들이 거의
비슷한 속도로 트랙을 돌기 시작하였다.

금석은 세상의 다른 부모들처럼 모습도 자신을 꼭 빼어 닮은 데다
독서와 운동까지 자신을 닮은
딸아이를 눈에 넣어 다니고 싶도록 사랑했다.
논리적인 사고방식이라든가 가끔 자기 고집을 세우는 것까지,
뿐만 아니라 그녀는 중거리 육상경기에 두각을 나타낸 것이었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이 물려 준 재능이라 생각하니 숙이가 더욱 사랑스럽다.
그런 숙이에게 졸업반인 르네는 자신의 대를 이을 중거리 대들보 선수로
진한 애정을 쏟고 있었고,
금석도 한때 자신이 군 복무시절 트랙선수 생활을 한 경험이 있어
딸아이에게 많은 조언을 해줄 수가 있었다.
중거리 트랙경기는 한마디로 경기 메네지먼트가 중요하다.
자신의 육체적인 능력을 잘 안배하여 이를테면 지속적인 속도로
7바퀴를 돈 후 마지막 한바퀴에 강한 스퍼트로 나머지 힘을 쏟아 부어야 하는
많은 연습과 경험이 필요한 힘든 경기이기 때문이다.
경험이 부족한 선수들은 처음에는 마구 달려나가 앞서지만 곧 지쳐버려
6번째나 7번째 트랙을 돌 때 제풀에 맥없이 쳐져버리거나 기권을 하기 일쑤였다.

6바퀴째를 돌 때 선두는 노련한 르네와 숙이뿐이었다.
그리고 20야드 뒤를 다른 여섯 명이 지친 듯이 따르고 있었는데,
숙이 학교 선수들과 학부모들은 고함과 함성을 지르며 두 선수를
격려하고 있었다.
금석도 열광하는 고스키 씨를 연신 미소로 바라보며 함께 일어서서
손이 아프도록 박수를 치며 딸아이를 응원했다.
마침내 르네가 테이프를 끊었고 5야드쯤 뒤를 숙이가 들어왔다.
먼저 르네가 숙이를 끌어안고
격려했으며 금석과 고스키 씨도 악수를 하고 기쁨과 환희를 나눴다.
그 날은 숙이 학교 오렌지 머스탱이 일방적으로 같은 디비전의
파란 배저를 물리친 날이였다.

경기가 끝난 후 학부모들이 모두 트랙으로 내려가
오늘경기의 승리에 들떠 있는 딸아이들의
땀을 수건으로 닦아주며 흐뭇한 순간들을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숙아!"
"하이, 아빠!"
숙이가 금석을 향해 달려왔다.
금석은 그냥 눈을 감은 채 말없이 그녀를 끌어안고 있었다.
잠시 후 금석의 품을 빠져나간 숙이가 주섬주섬 책가방과 운동 백을 찾아들자
금석은 얼른 아이의 손에서 무거운 책가방과 운동복이 든
머스탱 로고가 그려진 오렌지색 백을 빼앗아 둘러메고
다른 학부모들에게 인사를 한 후 주차장으로 숙이와 함께 걸어갔다.
"아빠, 나 캐미스트리(화학) A 받았어요."
"와우, 그동안 공부 열심히 했구나. 잘했다, 숙아!"
대견스럽게 쳐다본 딸아이의 얼굴에 언뜻 그늘이 보이는 듯하여
금석은 잠시 가슴이 내려앉으며 의심쩍은 생각이 들었지만,
아마 여자들의 그날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평소 금석은 아이들의 표정이나 행동에 무척 민감했다.
이제 하이 스쿨 사프모어(한국의 고등학교 일학년)인 딸아이와
아직도 천방지축인 주니어 하이 졸업반(한국의 중학교 2학년)
피터에게 마음속으로 빚을 지고 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담하게 장식한 동네 입구를 지나 첫 번째 길을 오른쪽으로 도니
금석의 집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카고 서북 교외지역의 부유한 동네인 그곳은
넓직한 집터에 집집마다 독특한 스타일로 집을 지어 놨다.
전통적인 콜로니얼 스타일부터
마치 신델렐라의 왕자가 사는 성처럼 지은 집까지 다양했으며,
게다가 학군까지 좋아 시카고 지역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멋진 동네였다.
금석은 동네를 천천히 돌아 자신의 집 드라이브 웨이에 들어서서
리모트 스위치로 차고문을 열었다.
아내가 진희가 미소를 짓고 서있었고
아들 피터가 뛰어 나오며 금석의 품에 안겼다.

금석이 자신의 차 트렁크를 리모트 열쇠로 열자
피터가 가방과 백을 들고 집으로 들어갔으며
딸아이는 아내 진희에게 반갑게 인사를 한 후 자신의 가방과 운동 백을 집어 들었다.
금석은 재빨리 딸아이의 운동 백을 대신 들고 미소로 맞이하는
아내의 볼에 살짝 키스를 하였다.
"나, 당신 미치도록 보고 싶었어."
그의 속삭임에 진희는 활짝 웃었다.

저녁 식탁에는 아내가 정성 들여 요리한 저녁이 차려져 있었다.
어린 소녀시절에 부모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온 아내는 한식보다도 양식 요리를 잘했다.
물론 금석도 아이들도 양식을
좋아했지만 아내는 특히 독특한 솜씨로 만든 갈비찜이 일품이었고
별미여서 우리 가족 모두가 좋아했다.
그녀의 갈비찜은 살이 많이 붙은 갈비에 감자와 김치를 썰어 넣고
오랜 시간 조리하면 고기가
푹 익어 부드러웠고 감자와 김치까지
그때쯤에야 맛의 조화를 이루는 맛난 음식이었는데
저녁식탁에 아내는 그 갈비찜을 올려놓았다.
금석은 침을 꿀꺽 삼키며 아내를 향해 윙크를 하였다.
아내는 미소로 답을 하고는 조용히
"그분"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금석은 그런 진희의 모습을 보며 깊은 감사와 행복을 느꼈다.


식사 후 금석은 패밀리 룸 TV의 로컬 뉴스를 보다가 아들 피터를 불렀다.
피터는 학교의 레슬링부에 들어가 열심히 운동을 했지만
금석은 아들이 레슬링 하는 것을 별로 반가워하지 않았다.
몸무게를 항상 잘 유지해야 한다거나 또 가끔은 줄여야 하고,
특히 상대방을 제압하여 비참한
기분이 들도록 폴승을 하는 것이 자신의 스타일이 아니었기 때문인 것이다.
"피터야! 오늘 경기 성적이 어땠니 ? "
피터는 세 번째 경기에서 어이 없이 폴로 졌다며 시무룩해 했다.
"괜찮아, 이 녀석아. 나는 네가 최선을 다한 경기였다면 결과가 중요하진 않단다.
너의 노력을 뛰어 넘는 많은 재주꾼들이
이 세상에는 수두룩하기 때문이거든 ! 그런데 누나는 뭐하니 ? "
"공부하는가 봐요, 아빠."
금석은 저녁을 먹는 내내 말이 없던 숙이 얼굴을 떠올리며 그녀의 방문을 바라보았다.
굳게 닫쳐진 방문이 자신을 막는 듯한 느낌이 들어 가슴이 답답해졌다.


설거지를 마친 아내가 한국 참외를 깎아 쟁반에 들고 와 소파에 앉았다.
금석은 가만히 참외 한쪽을 베어 물고 아내의 얼굴을 조용히 쳐다 봤다.
미모를 갖춘 훤칠한 키, 명석한 두뇌.
금석이 하이틴 시절 읽었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란 책의
주인공들인 멜라니와 스칼렛의
장점을 모두 겸비한 더 바랄 것 없는 여인이었다.
"진희, 고마워 ! "
"당신, 왜 그러는데 ? "
"아니, 그냥."
"어유, 또 시작이네, 당신은 출장만 갔다 오면 꼭 보채더라. 후후."
금석은 수줍은 듯 고개를 살짝 돌리고는 눈을 흘기며 미소짓는
그녀의 이 말까지도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아내와 사랑을 나눈 후 잠이 든 아내의 이불을 다독거려준
금석은 천천히 패밀리 룸에 내려왔다.
홈 바에 들어간 그는 스카치위스키에 얼음을 띄운 후
TV의 볼륨을 아주 작게 한 다음 자신이 좋아하는
서부영화 채널을 틀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행복을 천천히 음미하고 싶어졌다.

때마침
창 밖을 보름달이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커튼을 뜷고 들어온 그 환한 빛이 금석을
감상적인 기분에 잠기게 하였다.
금석은 살그머니 창가에 다가가 세상과 자신을 비추고 있는
밝은 달을 쳐다 보았다.
그저 무심히 옛날 이야기의 옥토끼와 계수나무를 찾아보고 싶어져
가만히 흰 구름자락이 스쳐 가는 달을 쳐다보던
금석은 흠칫 뭔가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긴장하며
제켰던 커튼을 놓고 숨을 죽이다가 다시 커튼을 조금 열고
조심스레 살펴보니
뜻밖에도 숙이였다.
금석은 대부분의 부모들처럼 혹시 남자 친구가 찾아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위스키를 얼른 들이킨 후
살그머니 차고 옆문을 통해 뒤뜰로 나가 주위를 살피며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숙이는 혼자였다.
숙이는 뒤뜰 등나무넝쿨이 올려진 포취 기둥에 포니 테일 머리를 기대고
밝은 달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엄마, 나 당신 보고싶어요. 엄마도 저 달 보이지 ? 나처럼 말야. 엄마,
아빠 참 좋은 분인데 왜 엄마, 우리를 버리고 갔죠 ? "
숙이의 그 말을 듣는 순간 금석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갑자기
슬픔과 회한이 가슴을 메우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조용히 패밀리 룸에 들어와
스카치위스키를 얼음도 없이 거푸 두 잔을 마셨지만 왠지
자꾸 주체할수 없이 눈물이 흘러 내렸다.
"엄마, 나 당신 보고싶어요 ! "
조실부모한 금석이 뼈에 사무치도록 가슴속 깊이 새겨둔 말을
자신의 딸아이에게서 듣게 될 줄이야.


금석은 미국에서 천신만고 끝에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한 후
곧바로 자신을 기다리는 미영을 찾아 한국엘 갔다.
지나간 6년 동안 고국은 많이 변했지만 그때까지 자신을 기다려준
미영이 너무 고마웠다.
금석은 그녀와 결혼을 하였고 그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기 위해 미국으로 이주하여
시카고 근교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미영은 자존심이 강하긴 했지만 친구도 많고 매우 활달한 성격을 가진 여자였다.
다른 비슷한 여인들이 겪듯이 이 낯선
미국 생활은 그녀를 편치 못하게 하였다.
문화의 충격이란 가끔 자신을 굽히지 않고
고국의 정체성을 오랫동안 간직하며
타국의 정서를 이해 못할수록 자신의 상처가 깊고 오래가기 마련이다.
이방인들은 곧잘 이 미국의 부란 것이
땅에 널려있는 황금을 주워 담기만 하면 되는 줄 생각하지만
그런 생각은 근본적으로 틀린 생각이다.
미국이란 나라는 공평한 기회를 더 많이 주고 또
새로운 아이디어가 빛을 발하는 게 하지만
특히 산설고 물설은 우리 동양에서 온
남들보다 영어가 서툰 단일 민족 이민자들이
본토박이들처럼 부를 이루려면 그들의 배 이상 일을 해야 하는
한 가지 방법만이 오직 가장 확실한 방법일것이다.

그들 부부도 아메리칸 드림이란 것이 얼마나 힘을 들여야
그 꿈을 이룰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들은 신혼의 단꿈에 빠지기도 전에 맞벌이를 해야 한다거나,
또한 장래를 위해 학교에서 영어와 미국 문화를 배워야 했는데,
미영은 어쩐 일인지 다른 한국 여인들과 달리 영어를 배우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아이들 조차 한국식으로 가르치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아이들에게 더 많은 혼동만 주게 됐고,
그녀는 이 세상이 자꾸 자신을 따돌리는것 같이 생각을 했다.
그녀는 자신의 불만을 금석에게 털어놓았지만
금석 역시 문화적인 충격을 극복해 가며 회사 일을 익히기 위해
스트레스와 고군분투하다 집에 돌아와 아내의 어려움을 듣게 되면
그는 상식을 잊은 채
따뜻한 격려의 말보다 그녀에게 핀잔을 주곤 하였다.
결국 미영은 보이지 않는 문화의 충격에 적응하지 못하였고,
미영의 한국식과 금석의 반쯤 미국적인 사고방식은 늘 충돌을 일으켰다.
그것은 미영에게 현실에 적응하려는 의욕을 빼앗아 버렸고
그녀의 행동은 차츰 드러나게 달라져갔다.
그녀는 밖에도 나가지 않고 컴퓨터 인터넷으로
소일을 하며 꿈과 현실을 오락가락 하였다.
그러다가 결국 갈등은 불거져
어느 날 미영은 세이빙통장에서
예금을 몽땅 찾아 아이들을 놔둔 채
마치 영화의 장면처럼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처음 금석은 사라져 버린 미영이 혹시나 무슨 변고가 생긴 줄 알고
백방으로 찾아 나섰다.
그러나 끝내 미영이 나타나지 않자
그때서야 깨닫고 뒤늦은 후회를 했지만 때는 많이 늦어버려
금석은 졸지에 어린 아이들을 혼자 키워야 했다.
데이케어 센터에서 아이들을 찾아오며 불 꺼진 자신의 집 창을 쳐다볼 때,
그리고 아무도 기다리는 사람이 없는 텅 빈 집의
공허 속으로 발을 들여 놓으며 느끼는 싸늘한 외로움
그건 정말 참을수 없는 슬픈 비극이였다.
금석은 그런때마다 아이들을 끌어안고 울어야 했다.
눈치 빠른 딸아이가 금석의 품에 안겨 "아빠, 걱정 말아요.
아빠 말 잘 들을게."하며 훌쩍거렸고,
그 옆에서 덩달아 풀이 죽어있는 어린 아들 피터를 보면서
금석은 한숨과 함께 눈물을 닦으며
근처의 패스트푸드 식당을 향했었다.


주니어 하이 일 학년생 딸아이가 엄마처럼 빨래를 세탁기에 넣어야 했고,
초등학교 5학년생
아들 피터는 응석도 부려 보지 못한 채 동포 할머니의 손에서 자라야 했다.
금석도 아이들 키우는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밤늦게까지 일을 하였다.
그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하는 시간은 밤 10시 무렵이었다.
그때서야 내니 할머니를 집에 모셔다 드리고 아이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한 다음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보통 밤 12시였다.
하지만 아침 6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아이들을 깨워
학교 갈 준비를 시켜야 하였으며 아침을 먹여
학교에 태워다 주고 자신은 출근을 해야 했다.
다행히 사람 좋은 상사의 배려로 일하는데 아무런 문제는 없었지만
그는 모자라는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해야 했고 더 부지런해야 했다.
주말이 되면 밀려 있는 집안일과 부족했던 아이들과의 시간을 보내야 했기에
금석은 언제나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한 바쁘고 고단한 생활을 해야 했지만,
자신의 생활에 요령과 이력이 날 즈음의 어느 날,
운명의 여신은 그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냈다.


그날 금석은 로칼 비즈니스 캄퍼런즈에 참석하였다.
아이들을 챙기느라 전화를 많이 써야 했던
금석은 캄퍼런스가 진행되는 동안은 셀폰을 쓸 수가 없어
차안에 두려 생각한 것이 그만 사무실
책상 서랍에 두고 와서 어쩔 수 없이
호텔 공중전화를 사용하고 돌아서는데,
낯익은 얼굴이 그를 향해 웃고 있었다.
"이게 누구야 ! 하이 진희 하우아 유 ? "
"아이 엠 파인 유우 골드 스톤 ! "
그녀는 대학 동창인 진희였다.
때마침 진희는 캄퍼런스가 열리는 호텔의 재정 감사를 하러 왔다가
쌜폰 전원이 나가는 바람에 본사에 전화를 하려고
공중 전화부스에 왔다가 금석의 뒷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그녀는 대학에서 재정학을 전공하였고 계리사가 되었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녀는
모든 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굴지의 재정 감리회사에 입사했으며,
그를 따라 다녔던 주류의 백인 부잣집 바람둥이 아들과
호화로운 결혼식을 올려 또 한번 동기들을 떠들썩하게 만든 여인이었다.
당시 금석에게는 한국에서 그만을 기다리는 미영이 있었고
어린 나이때 미국에 와서 자란 겉은 노랗고 속은 하얀 바나나들에게
정서상 별로 흥미가 없어서 그녀를 마치 닭 뭐 쳐다보듯 했었지만,
이미 오래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예상치 않은 장소에서 그녀를 만나니 참으로 반가웠다.
뜻밖에도 그녀는 그의 대학 때 별명인 골드 스톤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괜찮다면 잠시 커피한잔 어때 ? "
" Why Not ! "
그녀는 금석의 제안을 선뜻 응하였다.
금석은 결혼한 부인과 커피를 마신다는 것이 조금은
께름직했으나 막상 호텔 식당에서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금석을 맞이해 주는 그녀를 보고 오랜만에
밝은 표정이 됐다.
"오래 기다렸어요, 진희씨 ? "
"아아뇨, 골드 스톤님 ! "
금석이 다시 본 그녀는 미모만 갖춘 게 아니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겸비한 재주꾼이었다.
순진한 처녀시절 바람둥이의 거짓구애를 진심으로
받아들인 결과는 일순간
그녀의 삶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인간의 본성은 바뀌기가 참 어려운가보다.
사기꾼처럼 태어나 부모의 그릇된 자녀교육과
무관심으로 많은 나날을 수십 명의 여자들 품속에 보낸 남자가
결혼 후 한순간 정신을 차린 듯 보였지만,
진희가 임신을 하자 그는 다시 옛 버릇이 도져
새로운 여자를 찾아 부나방처럼 날아다녔다.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는 것을 철석같이 믿으며
바람둥이 남편의 행동에 변화가 오기를 기다렸던
그녀는 결국 자연 유산을 하고 말았으며 그후
그녀는 끝없이 삶에 의문을 던지며 방황하기 시작하였다 한다.
게으르고 나태하며 권태로운 생활이 계속되던 어느 날,
그 날도 할 일 없이 너절한 삼류 가쉽 잡지를 뒤적이는데,
한때 자신의 우상인 어느 유명인의 삶 속에 끼여 들려했던
한 여인의 통속적인 고백에 눈이 갔다 한다.
"나는 이제 진실한 삶을 살고 싶다 ! "는 그 외침을 듣는 순간,
그녀 자신 속에서도 그와 같은 외침이 신음처럼 터져 나왔다.
화려한 겉과 달리 자신의 영혼이 얼마나 초라한지 깨달은 진희는
다음날 즉시 바람둥이 남편과의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옛 회사에 취직하여 열심히 살아가는 중이란
사실을 금석에게 털어놓았다.
그녀의 고백을 들으며 마음이 열린 금석 역시 자신의
지난한 삶을 간단히 그녀에게 고백하였다.
그들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낀 그들은
식사를 마치고 더 긴 저녁시간을 같이 보내기로 하였다.

그날은 금요일이였다.
여름방학이였기 때문에 내니 할머니는 아침부터 와 계셨다.
할머니는 가끔 주무시기도 하며 정이 듬뿍 든
금석의 아이들을 친손주처럼 대해 주셨다.
금석은 그런 할머니가 더 없이 고마웠다.
"할머니, 나 오늘 늦을 테니까 좀 주무시고 가세요."
"그래, 이 서방. 애들 걱정말고 천천히 와."
"고마워요, 할머니."
전화를 끊은 금석은 오랫 동안 자신 안에 짓눌러온
자신의 이야기를 그녀에게 털어놓고 싶었다.
그들은 호텔을 떠나 진희의 랙서스 SUV를 타고
막연히 머릿속 길을 따라 드라이브를 했다.
진희는 I-90 고속도로를 타다가 Fox River 강변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차를 몰았다.
둘은 말이 없었지만 같이 함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했다.
한참을 달리던 그들 앞에 저멀리
불빛이 반짝이는 건물이 보였다.
진희가 그 곳에 차를 세웠다.
호텔이였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듯이 차에서 내려 체크인을 하고
곧바로 아래층 바로 내려가 술을 찾았다.
금석은 술을 잘 못했으나 그 날만큼은 어쩐지 잔뜩 취하고 싶었다.
그리고 저 여자 품에 안겨 어린아이처럼 마구 울고 싶었다.
( '진희는 나의 고통과 아픔을 받아줄 거야.' )
바텐더에게 스카치위스키 두 잔을 청한 금석은 한 잔을
진희에게 권한 후 자신의 잔을 단숨에 들이키고는
계속해서 서너 잔을 마시는 폭음을 계속했다.
진희는 그런 금석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차츰차츰 위 속이 짜릿해지더니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금석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진희를 쳐다보았다.
"진희, 내 이야기 좀 들어줄래?"
진희는 뭐든지 들어줄 수 있다는 눈빛으로 금석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금석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곳은 자신의 분위기를 맞춰줄 환경이 아니었다.
금석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더니
일어나서 진희를 데리고 호텔 밖 호숫가로 내려갔다.
진희는 금석이 이끄는 대로 따라 나왔다.


그들은 호숫가의 산책로를 걷기 시작했다.
여기 저기 밤 낚시꾼들의 불빛이 보였다.
넓직한 호수에도 군데군데 항해등을 켠 낚싯배가 떠있었고,
잔디밭의 작은 나무사이엔 반딧불이 초록색 빛을 날리고 다녔다.
그런가 하면 호텔 옆 호숫가에 만들어 놓은 작은
모래사장에는 비치볼 네트가 엉성하게 쳐져 있었다.
그곳에는 흩어져 있는 플라스틱 조그마한 배와 노,
어린이용 비치볼과 모래삽도 보였고,
아이들이 낮에 놀다 놔둔 모래가 든 버켓이 굴러 있었다.
길과 모래사장 사이에는 튼튼한 콘크리트로 벤치를 만들어 놓았는데,
호수 오른쪽 늪지대의 무성한 갈대와 부들 또 조금 깊은 곳에서
이제 막 봉오리를 맺고 피어오르는
수련을 볼 수 있게 해놨다.

이미 여러 군데 벤치에는 데이트 중인 남녀들이 조용히 속삭이기도 하고
때로는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였다.
그 소리를 들으며 그들도 그중 빈 벤치에 앉았다.
저 멀리 호수 반대편의 호텔 앞 밝은 불빛 아래
야외 수영장의 와글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별이 반짝이는 한여름 밤의 경치를 해치지는 못하였다.
정말 자연이 만들어준 로맨틱한 밤이었다.
잔잔한 미풍에 진희의 머리카락이 살며시 금석의 얼굴을 간질거렸으며,
하늘에는 북두칠성과 카시오페아좌 그리고 정북쪽 바로 위에
북극성이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듯했다.

금석은 진희의 아름다운 얼굴과 그녀의 향수 냄새에 오랜 동안 잊고 지내던
여인의 다정스러운 향기와
끓어 오르는 욕정을 느끼며 숨을 천천히 가다듬고
조용히 자신이 격은 지난 일년간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분노와 증오로 시작하여 고달픈 인생의 슬픔과 회한,
사랑하는 아이들에 대한 연민의 이야기였고,
에미 없이 키우는 불쌍한 아이들의 기특하고 초라한 모습을 말하다
드디어 그는 진희에게 기대어
참고 참았던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진희, 난 정말 힘들었었어."
진희는 엄마처럼 금석을 자신의 품에 안고 말없이 그의 등을 두드리며 위로했다.
"금석씨, 정말 수고했어. 난 당신 심정 잘 알아요."
금석은 서럽게 엉엉 울고 말았다.

이제 밤이 깊었다.
보름달은 어느덧 하늘 높이 떠서 휘엉청 세상을 비추었다.
노란 달맞이꽃 대궁이 쑤욱 자라는 그 호숫가 산책로를
금석과 진희는 마치 백년을 함께 살아온 부부처럼 깔깔거리며
어깨동무를 하고 휘청휘청 호텔로 돌아왔다.

그날 이후,
금석의 표정은 아주 명랑하고 밝았으며 주위 사람들에게
인생의 새로운 꿈을 간직한 사나이의 전형적인 모습을 느끼게 했다.
진희 역시 혼자 사는 아파트에 귀가하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그리고 마주하는 이웃들에게 예전과
다른 그녀의 밝은 미소를 전하였다.
인생이란 이렇게 남남이 만나 조건 없이 믿음을 주며
서로를 격려하는 말 한마디에
자신의 장래를 장미빛으로 물들이며 살수있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금석의 아이들도 아빠에게 대략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눈치채고
금석이 귀가하지 않는 날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고,
아빠의 데이트에 대해서도 묻지를 않았다.


그해 가을 어느 금요일 아침,
금석은 곱게 정장 차림을 한 후 주머니 속의 다이어 반지를 확인하고는
거울 앞에 서서 다시 한 번 자신의 옷차림을 점검한 다음 회사에 출근했다.
어제 금석은 진희에게
시카고 다운타운 잔 핸칵 빌딩 96층에 위치한
미시간 호수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멋진 레스토랑으로 불러내는 전화를 했었다.
그는 그녀에게 양복을 입고 간다고 운을 뗀 다음
"저녁 7시야."라며 시간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킨 후 전화를 끊었다.
교외지역 회사에 다니는 금석은 전철을 탄 다음 러시아워를 뚫고
서둘러 다운타운에 가야 하지만,
본사가 다운타운에 위치한 진희는 버스를 타면 바로 10분 거리쯤에
잔 핸칵 빌딩이 있었다.
미리 예약을 한 잔 핸칵 96층 식당에는 검은색 이브닝드레스를 곱게 차려입고
구슬백을 든 진희가 먼저 와서 금석을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시간보다 5분쯤 일찍 도착한 금석이 두리번거리자
그의 모습을 발견한 진희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금석은 고혹적인 자태로 자신을 맞이해 주는 진희에게 미리 준비해 간
붉은 장미다발을 안겨준 다음 그녀의 볼에 살그머니 키스를 했다.
또다시 그녀의 향기에 아득한 느낌을 받으며 자리에 앉았지만
금석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입술이 메말랐다.
늘씬한 키, 검고 긴 머리, 지성적인 눈매, 오똑한 코,
그리고 금석의 영혼까지 빨아들이는 듯한 입술.
금석은 넋나간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 속에는 사랑에 굶주린 자신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러자 금석은 짧게 얕은 숨을 뱉고 말았다.
그녀의 모습은 황홀했다.
금석은 잠시 눈을 돌려 붉게 석양이 물든
미시간 호수를 바라보며 심호흡을 하였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눈을 돌려 그녀의 미소짓는 얼굴을 조용히,
오랫동안 바라봤다.

( '아, 이런 땐 무슨 말부터 어떻게 해야 하나 ! ' )
자신이 해야 할말을 잊은 채 금석은 가만히 그녀의 눈동자만 들여다보았다.
진희도 그런 분위기를 예견하고 있었는지 입술이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
금석은 만지작거리던 성냥곽을 테이블에 놓고
찬 얼음물을 한잔 들이킨 다음,
그녀의 손을 잡으며 천천히 그녀에게 구혼을 했다.

"사랑하는 진희, 나와 결혼해 줘 ! "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프로포즈를 받고
진희는 멍하니 금석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곧 환희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금석씨, 나도 당신 없으면 못살아. 당신과 결혼하고 말고 ! . "
금석은 주머니에서 다이아몬드 반지를 꺼냈다.
손이 떨렸다.
반지를 내밀자 진희의 떨리는 손이 그에게로 가까이 왔다.
금석은 그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운 후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의식치 않고 그녀의 입술에 긴긴 키스를 했다.
그녀의 발그레 상기된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했다.

그들은 크리스탈 잔에 적색 포도주를 따라서 테라스로 나가
석양에 곱게 물든 미시간 호수를 바라보며 잔을 부딪쳤다.
"진희, 나는 하느님이 주신 나의 모든 것을 바쳐
당신을 죽을 때까지 사랑할 테야."
둘은 서로의 팔을 감아 한 모금씩 포도주를 마시며 축배를 들었다.
"금석씨, 앞으로 내 인생에 당신만이 오직 내 남편이에요."
진희는 금석의 품에 살며시 안겼다.
금석은 포도주 잔을 옆 테이블에 놓고
그녀를 끌어 당겨 마치 클라크 케이블과 비비안 리 같은
클래식한 키스를 하였다.
진희는 숨이 막혔다.

저 멀리 창 밖에는 하얀 돛을 단 요트들이 석양에 물든 호수 위에
아름답게 그림처럼 떠있었다.
호수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받으며
금석은 그녀의 귀에 다시 이렇게 속삭였다.
"진희, 고마워. 내 사랑을 받아줘서……. 나 죽도록 당신만 사랑할거야."
진희는 가만히 고개를 금석의 가슴에 기댔다.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러나 그것은 행복에 겨운 눈물이었다.
눈물 한 방울이 금석의 손등에 떨어졌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금석의 아이들에게 어떻게 충격 없이
진희가 아이들의 새엄마가 되는가
하는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토요일이였다.
금석은 아침을 먹으며 아이들에게 솔직히 자신의 재혼과
새 엄마에 대해 이야기를 한 후 아이들의 생각을 들어봤다.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아빠의 재혼을 찬성하며
흥분과 기대로 빨리 새엄마를 보고 싶어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금석은 다음날 그러니까 바로 일요일 저녁에
조용한 식당에서 진희와 아이들의 만남을 마련하였다.
금석의 예상대로 진희도 아이들도 처음 만났음에도
낯설어 하지 않고 서로를 좋아했다.
아이들은 진희의 지성적이며 따뜻한 인상을 좋아했고,
진희는 아이들의 때묻지 않은
맑은 영혼에 홀딱해 반해 버린것이였다.


그후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진희의 부모님들과 두 사람의 대학동기,
그리고 회사의 아주 친한 친구들의 축복 속에
금석의 교회에서 조촐하게 치렀고,
신혼여행은 아이들과 함께 추운 12월말을
자마이카 네그릴로 다녀왔다.


언제나 침울하고 무거운 기운이 가득 했던 금석의 집에 따뜻한 온기와
미소, 그리고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진희의 헌신적인 모습을 볼 때마다
금석은 진희의 사랑을 가슴속 깊이 간직하며
자신의 운명을 주관 하는 " 그분 "께 감사하고
진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 일편 단심 "이 돼도록 기원 했다.



"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라고 했던가 ?
이제 금석의 집에 경사가 겹쳤다.
먼저 아내 진희가 재정담당 매니저로 승진했고,
성실한 금석도 영업 부사장으로 승진을 한것이다.
그들은 집도 더 크고 좋은 부자 동네로 이사를 했으며,
차도 고급 차로 바꾸며 꿈에 그리던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하게 된 것이였다.
게다가 딸아이 숙이가 에이 학점을 받아오며
아이비리그 진학을 꿈꾸게 되었다.
그렇게 이세상 모든 일들이 장미빛으로만 보였던 그때 부터
오래전 천천히 잉태됐던
문제의 씨앗들이 싹을 티우기 시작한 모양이였다.
바로 딸아이 숙이가 샤프모어에 올라가
사춘기 소녀의 혼란한 정서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며
친엄마에 대한 그리움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오늘 저녁 금석이 본 것이다.
엄마를 애타게 부르짖는 본능의 소리를 들은
금석은 순간 어쩔줄 몰라 하며 당황해야 했다.

자신이 조실부모하여 어린 시절 끝없이 허공에
자신의 부모님을 애타게 부르고 살던
금석은 자신의 아이들에게는 이런 슬픔을 물려주지 않고
좋은 부모가 될 것을 다짐했었다.
그는 아이들을 끔찍이 사랑해 주는 부모 노릇이 꿈이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자신의 딸아이가
지금 자신의 친엄마를 애절하게 찾고 있는 것이다.
진희와의 결혼은 행복만 가져다 줄줄 알았다.
숙이가 진희의 따뜻하고 자상함 속에서
친엄마를 찾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금석은 숙이가 친엄마를 그리워하는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었다.
다만 진작에 아이들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괴로웠던 것이다.
당연히 딸아이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고,
미영과 자신이 아이들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저지른,
고약한 어른들의 횡포가 미울 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도
문화의 차이 였는지도 모른다.
미영과 자신의 대화의 기술이 부족 했거나,
(. 왜 우린 그때 진실한 대화를 해보려 노력하지 않았을까 ? . )
금석은 이 생각 저 생각 회한에 졎어 마음만 무거워 졌다.
아이들은 착하며 사랑스러운데,
미영이가 가족을 버리고 달아나는 바람에…….
아냐, 그녀의 몇 차례 경고를 못 알아들은 자신에게 더 책임이 있을 거야.
그러나 아무리 그럴망정
제가 낳은 아이들을 버리고 떠나는
여인이 이 세상에 미영이 말고 또 있을까?
금석은 처음 진희를
만난 날처럼 마구 술잔을 기울이면서 폭음을 하며 눈물을 삼켰다.

그때 제 방으로 가려던 숙이는 술을 잘하지 않는
아빠가 혼자서 바에 앉아 폭음을 하는
모습을 보고 걱정이 되어 아빠 곁으로 왔다.
"아빠, 웬일이세요? 술 너무 많이 드시는 것 같아요."
"숙아, 아빠가 너무 괴롭단다."
"왜 아빠 ? "
"네가 너의 친엄마를 그리워하는 모습이 내 가슴에 사무치는구나.
숙아, 그건 네 잘못이 아니란다.
너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네 엄마를
그리워하는 것이 절대 나쁜 짓이 아니라니까, 숙아."
금석의 말에 숙이는 고개를 떨구었다.
딸아이의 조용한 모습에 더없이 서러워진
금석은 재빨리 위스키를 한잔 더 비우고는
숙이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하였다.

"숙아, 네 엄마 소식 있으면 내게 좀 다오.
다른 뜻은 없고 네 엄마도 얼마나 너희들이 보고 싶겠니.
내겐 새엄마가 있으니까 내 걱정말고……. 난
너희들이 엄마와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주고 싶단다."
"아빠, 정말이세요 ? "
"그래, 이 녀석아."
"그래도 새 엄마가 마음에 걸려서……. "
말끝을 흐리는 딸아이를 금석은 가볍게 안았다.
"너희 새엄마는 훌륭한 분이란다."
"알아요, 아빠."
딸아이는 금석의 품에서 고개를 빼어 금석을 올려다보았다.
숙이의 눈이 눈물로 빛나고 있었다.
"나 엄마 전화번호 알고 있어요, 아빠. "
"다행이구나.……그런데 전화하는 것은 좀 잔인한 방법이니까 주소는 없니 ? "
"아빠, 잠시만 기다리세요. 내가 방에 가서 이-메일 주소 갔다 드릴께."
"고마워, 숙아."
딸아이는 자기 방에서 미영의 이-메일 주소를 갖다주었다.
"엄마는 엘에이 근교 타운 하우스에 사시며 어느 무역회사 비서로 일하고 계시대요."
"숙아, 고마워. 이제 그만 들어가 자거라."
"굿나잇, 아빠."
숙이는 아빠를 끌어안고 아빠 볼에 키스를 하며 인사를 한 후 제 방으로 사라졌다.


또 한잔을 마시는 순간 자다가 깬 진희가
남편의 수상한 행동을 보고는 얼른 침실에서 내려와
금석의 술병과 잔을 빼앗았다.
그녀는 심상치 않은 금석을 쳐다보고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여보, 왜 그래 ?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수 ? "
"아냐, 여보. 내 사랑하는 진희 아씨 ! 나 오늘 그냥 취하고 싶다오."
"왜 여보, 말해봐. 무슨 일이야 ? 무슨 일 있는 거지, 응 ? "
금석은 그녀에게 숙이에 대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미영에게 편지해야
할 문제를 진희에게 설명하며 이해를 구했다.
잠시 심각한 표정을 짓던 진희는 금석의 잔에 남아 있던 위스키를 가져가
조용히 마시며
"당신 그 여자에게 미련이 남은 건 아니죠?"
금석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진희를 바라보았다.
"여보, 당신이 날 좋아한 것이 내 성실한 마음 때문이었다면서 ?
진희, 난 이 세상에서 오직
당신 하나뿐이에요."
금석이 울먹이며 말하자 진희는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금석을 꾸짖었다.
"어마, 뭐 이런 남자가 있어,
그 소리에 울상을 지으면 난 어떡해. 이 바보 남자야!
여기 위스키 한 잔 더 줘."

금석이 머뭇거리며 한잔을 따라주자
진희는 얼른 홀짝 마시고는 금석을 끌어안았다.
"여보, 날 사랑한다면 내가 달아나지 않도록 꼭 좀 안아 줘."
금석은 그녀의 따뜻하고 진실된 마음을 찬찬히 바라보며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진희, 당신의 아름다운 마음씨 ,,,,,,,
나 정말 당신 없으면 못 살아. 고마워 내 사랑하는 여왕님."


미영에게 !

벌써 4년이나 흘러 버렸네.
숙이가 전해준 소식에 의하면 당신도 이제 홀로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이 되어 참 반가웠다오.
그 세월동안 우리의 공식적인 신분이 달라져 버렸소.
물론 영어로는 엑스와이프지만 그렇다고
숙이와 피터의 친엄마란 사실엔 변함이 없구려.
우리 당시 기분과 감정일랑은 잠시 접어두고,
어떻게 하면 우리의 아이들이
장래의 꿈을 잘 이룰 수 있을까 하는 이야기부터 하고 싶소.
우리 어른들의 잘못으로 엄마와 아빠가 헤어졌지만,
현행법에서 말하는 것처럼 내가 당신과
아이들을 만나고 못 만나게 할 권한은 없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은 당연히 자신들의 엄마를 찾아볼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란 뜻이라오.
그래서 말인데 적당한 기회를 만들어
당신이 여기 시카고를 찾아와 아이들을 만나줬으면 해요.
현재 나는 재혼을 하여 새 아내와 잘살고 있지만,
당신이 호텔을 구하는 것보다 편하게 우리 집에서
묵으며 당신의 멋진 요리 솜씨로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주며
당신만의 추억을 아이들과 만들기 바란다오.
물론 우리 둘은 다른 곳에 있을께.
그러니 아무런 부담 갖지 말고 오구려.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사랑하는 아이들을 위해서 말야.
그렇게 오랫동안 우리 아이들이 자라 우리들 품을 떠날 때까지
사랑합시다.
만약 내게 전화하기가 쑥스럽다면 숙이와 의논해도 돼요.
빠른 시일 안에 당신의 계획을 듣고 싶어요.
숙이 엄마!
항상 건강해야 해.
그럼 오늘은 이만 줄인다.
바이 !

- 숙이와 피터의 아빠가 -


미영의 답장은 정확하게 일주일 후 딸아이의 이-메일주소로 왔다.



금석 씨!

갑자기 당신에게 이렇게 존댓말을 하는 것이 멋쩍고 이상하군요.
그러나 당신 말처럼
우리는
이미 남남이 돼버린 마당에 서로 지켜야 될 예의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요.
그렇기는 해도 당신이
숙이와 피터의 친아버지인 사실처럼 나도 그 아이들의 변함 없는 친엄마니까 !
지난날 우리들의 감정이 앞서서 저지른 실수일랑은 이제 당신 말처럼 잊기로 하고,
나를 이렇게 아이들을 만날 수 있도록 배려해준
당신의 호의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이들을 보고 싶은 마음으로 말을 하자면
당신의 편지를 받고 바로 그 다음날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하여 나도 내가 근무하는 회사의 허락을 받아
9월 첫주 노동절 연휴에
4박5일 일정으로 아이들을 보고 왔으면 하는
내 사정을 이해해 주기 바래요.
난 그곳 사정을 잘 모르니
당신의 선처를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당신 가족들의 건강을 기원하며.

- 미영 -


"여보! 아이들 엄마에게 편지가 왔어요."
저녁을 먹고 난 후 금석은 아내에게 멋쩍어 하며
딸아이가 프린트해준 미영의 편지를 건넸다.
이제 아이들의 친엄마이며 사랑하는 남편의 옛 아내가 나타나
이 집에서 나흘 밤을 자고 가게 생겨버린
사실이 별로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녀는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사실만이 남았다.
진희는 금석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금석은 민망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진희의 손을 잡고,
애절한 표정이 되어 그녀의 얼굴을 조용히 쳐다보고만 있다가
천천히 진희에게 말하였다.
"진희! 이런 일이 있을 때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사람은 당신이예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하는 아이들을 위해
당신이 감당해야할 몫이 가장 크단 뜻이야.
한 여인으로 감정을 추스리기 쉽지 않다는 뜻이지."
"내가 당신에게 할 수 있는 일이란 변함 없이
당신만이 이 세상에서 나의 모든 것을 차지하고
오직 내 사랑을 받고 살아갈 단 한사람 내 사랑하는
아내란 사실을 고백하는 것일 거야."
진희는 가만히 금석의 품에 안겨 버렸다.
이 세상에 단 한 남자, 다시 태어나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란 이 남자 말고 또 다른 사람을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던 진희였다.
금석은 사랑하는 아내의 마음을 헤아리고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아버렸다.
"사랑해, 여보."
"어어, 당신 왜 그래. 감기 걸렸나? 훌쩍거리긴."
그녀는 금석의 옆구리를 꼭 꼬집어 버렸다
"아야" 하며 비명을 지른 금석은 어느새 히죽 웃었다.
"어머나! 금방 웃어버리네. 에이, 조금 싱겁다."


금석은 아이들에게 깔끔한 정장을 입히고 자신도
신사복으로 곱게 차려 입었다.
그리고 아내의 차 트렁크에 간단한 옷가지와 세면도구 가방을 챙겨 실은 다음
아내에게 다가간 금석은 진심으로
그녀에게 감사의 키스를 한 다음 쌜폰을 그녀 손에 쥐어주며
두 시간 후쯤에 주유소로 자신을 태우러 오라고 하였다.
진희는 걱정 말라며 금석을 살짝 포옹하였다.
금석은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을 자신의 차에 태우고 공항으로 가기 위해 고속도로로 급히 진입했다.


엘에이 발 유나이티드 767기는 정확한 시간에 도착했다.
씨큐리티 지역 앞 라비에서 모니터로 비행기 도착시간을 읽고 난 금석은,
장미 꽃다발을 든 아이들을 데리고
방금 도착한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들이 벌써 간단한 가방을 끌고 나오는 길목에 서서
미영을 기다렸다.
잠시 후 저만치 까만 투피스에 빨간 웃옷을 입은 낯익은 미영이
가방을 끌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금석이 손가락으로 미영을 가리키자 아이들은 엄마에게로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보고 금석은 또다시 눈시울이 젖어오는 걸 참아야 했다.
미영이 두 아이들을 끌어안고 우는 모습을 보자
금석도 주머니에서 수건을 꺼내 얼른 눈물을 닦아 내고 말았다.
피터가 미영의 가방을 끌고 왔다.
피터의 팔짱을 끼고 걸어오던 미영이 금석 앞에 섰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오랫동안 포옹을 하고 서있었다.
금석은 참았던 눈물이 흘렀다.
미영도 흐느꼈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미안해."
"나도 미안해. 이제는 모두 지나가 버린 일들인데 뭐.
잠시만 기다려. 내가 차 가져올게."

미영과 아이들을 터미널 앞에서 기다리게 하고
금석은 복잡한 감정에서 헤어나기 위해 재빨리
파킹랏으로 걸어가 자신의 차를 몰고 터미널로 갔다.
4년이 조금 넘었지만 미영의 모습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현재 근무하는 무역회사에서 컴퓨터로
혼자서 여러 사람 몫의 일을 감당하고 있어 보수도 많이 받아
얼마 전 타운 하우스도 장만하고
그런 대로 혼자 불편 없이 살아가고 있다고 하였다.
물론 금석의 현재 생활과는 비교할 수가 없겠지만
그래도 잘 적응하며 살고 있다니 금석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미영은 만감이 교차하는
눈치였지만 그들은 말이 없었다.

금석도 공항에서 미영을 만났을 때는 아이를 보고 싶어하는
미영의 모정을 충분히 이해하여
안쓰러운 마음이 앞서 자신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지만,
4년 전 일을 떠올려 보니 미영에 대한
증오와 분노가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굳어진 자신의 표정이 무겁게 차안의 분위기를 압도하는 느낌을 받은
금석은 어쩌면 당시 미영이
그런 이성을 잃은 행동의 전적인 책임이
자신에게 있었을 거라는 추론을 해보며
또다시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과
미영의 바보짓을 당연히 용서해야 한다는 결심을 해야 했다.

금석은 미영에게도 낯이 익은 옛 동네를 지나며
오른손으로 살그머니 미영의 왼손을 잡았다.
"미안해, 지난날 저지른 내 허물을 용서해 줘."
금석이 미영의 얼굴을 쳐다보자
그녀는 갑자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마구 울기 시작했다.
미영이 운전을 하고 있는 금석에게 기대어 어린아이처럼 울자
금석은 얼른 동네 근처 공원으로 차를 돌려 버렸다.

미영이 울음을 그치지 않자 아이들도 침울해졌다.
차안의 분위기를 살핀
금석은 미영이 자신의
집에 도착하기 전에 둘 사이의 감정을 충분히 조절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결혼해서
12년 동안이나 살을 맞대고 살았으며 만나서 결혼하기 전까지 사귄 8년.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할 동안
매일매일 얼굴을 마주하며 만든 추억들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남남으로 돌아설 수가 있다는 말인가 !
그러나 이성적인 지금의 아내 진희가 마음이 흔들렸던 모습이 선명하게
금석의 머리에 떠올랐다.
그들은 공원 어린이 놀이터 근처에 차를 세우고 아이들을 차에 놔둔 채
호수가로 이어진 산책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저만치 아이들이 안 보이는 나무그늘 아래 벤치가 놓여져 있고,
근처에는 시의 공공 시설국에서 조성한 꽃밭에 새빨간 사루비아가
붉게 타고 있는 쉼터에서,
금석은 아직도 울먹거리는 미영을 감싸안고 멍하니
구름이 지나가는 파란 하늘을 쳐다보았다.
연민의 정이 스며들었지만 그때마다
진희의 검은 눈동자가 가만히 자신을 쳐다보는 듯이 느껴졌다.
"숙이 엄마 ! 이제 울지마.
당신 말처럼 우리는 정말 남남이 돼버렸어."
그 말에 미영은 더 설게 소리내며 울었다.

삼일 간의 연휴로 보통 때면 산책이나 조깅하는 사람들로 제법 붐비는 길이었지만,
오늘은 사람들이 드물었다.
가끔 걷고 있는 사람들이 울고 있는
미영과 금석을 무슨 깊은 사연이 있는 줄 짐작하고,
그들의 감정과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 저만치에서 돌아가며 흘긋흘긋 쳐다보곤 했다.
이제 설움이 잦아든 미영을 금석은 벤치에 앉힌 다음 주머니에서 냅킨을 꺼내
미영에게 건네며 조용히 입을 뗐다.
"여보, 우리는 이 현실적인 충격을 최소한으로 해야 될 것 같아.
내 말은 우리 둘 사이의 감정을
생부모와 친자식들의 장래를 위해 현명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뜻이지.
그 이유는 당신이 아이들을
사랑하듯이 나도 아이들을 사랑해요."
미영은 살그머니 자신의 머리를 금석에게 기대었다.
"지나간 과거를 우리는 더 이상 생각하지 맙시다.
그냥 우리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또다시
아이들에게 멋진 추억을 만들어 줍시다.
우리 집에서 머무는 4박5일 동안 당신이
그동안 해주고 싶었던 일 중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해줘. 숙이 엄마."
"알았어요. 역시 당신은 멋진 분이었어요. 금석 씨."
금석은 잠시 멈칫하여 미영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젠 아주 많이 늦었어, 미영아.
나도 당신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지만 당신도 우리를
축복해줬으면 좋겠다."
미영은 대답 대신 금석의 품에 안겨 소리 없이 울고만 있었다.
물론 금석은 미영의 회한의 눈물을 이해하지만,
이제는 정말 너무 늦었고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지 않은가.
금석은 어쩔 수 없이 미영에게 잔인하게 행동해야 했다.
마음이 무거웠다.
잠시 후 미영은 화장을 고친 후 울어버린 자신의 눈을 짙은 선글라스로 가렸다.
"나 아이들이 보이는 곳까지 당신 팔짱 좀 끼고 가도 돼 ? "
"응. 이리 와, 미영아."
그들은 마치 그 옛날 덕수궁 돌담길을 걷던 연인들처럼
늦여름 태양아래 푸른 잔디 위를 시원한 바람과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천천히 아이들이 있는 차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와우, 이게 당신 집이야 ? 고대광실이네."
"응"
금석은 응접실에 걸려있는 진희와의 결혼사진과
집안 곳곳마다 진하게 묻어있는 진희의 모습을
대해야 하는 미영의 혼란스러움,
그리고 미영이 겪어야 할 그런 고통에서 빨리 해방되게 하기 위해
문 앞에서 숙이에게 말하였다.
"숙아, 네가 엄마에게 우리 집을 안내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미영에게 집과 자신의 차 열쇠를 건네주었다.
"숙이 엄마, 장도 봐 놨으니까 이제부터 앞으로
닷새 동안은 당신이 이 집 주인이야.
혹시 연락할 일이 생기면 여기 쌜폰 번호로 날 불러줘.
힘들겠지만 아이들을 위해 제발 현실적인
감정을 좀 참아주기 바래요."
차열쇠를 받아쥔 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금석은 숙이를 불렀다.
"숙아, 이리 온."
"네에, 아빠.“
잠시 동안 딸아이를 꼭 안고 있던 금석은 숙이의 귀에 속삭였다.
"엄마를 네가 좀 행복하게 해드려라."
"알았어요, 아빠. 아이 러브 유 데디."
"탱큐, 데디."
"그래, 피터야. 엄마하고 멋진 추억 만들기 바래."
아이들이 미영과 함께 집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금석은 잰걸음으로 동네 입구 네거리에 있는
주유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자신의 은색 랙서스 SUV에서 지루한 시간을 신문을 뒤적이며 기다리든 진희는,
저만치 정장 차림의 금석이 눈에 띄자 얼른 읽던
신문을 접어두고 차에서 내려 금석에게 달려갔다.
금석은 마치 혼자서 저 멀고 험한 길을 달려온 아이가
엄마 품에 안기듯이 진희의 품속에 안기고 싶었다.
"여보, 나 참 힘들었어."
금석의 말에 진희는 금석을 포옹하며 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알아요, 당신은 잘 참을 수 있었을 거야."
그렇게 금석은 진희에게 오랫동안 안겼다.

둘은 오래 전 그때처럼 I-90 고속도로 북쪽으로 차를 몰았다.
그들은 2년 반 전에 로맨틱한 하루를 보냈던 그 호텔을 향해 달려갔다.
진희는 흘긋 금석을 바라보았다.
말이 없는 금석의 표정으로 짐작컨대 갈등의 순간들을 많이
넘어온 듯 보였다.
금석은 불과 한 시간 전의 일들이 벌써 까마득히 먼 꿈속 이야기처럼
아득해져 감을 느끼며
말없이 조용히 운전하고 있는 아내 진희의 옆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창 밖의 어른 키만큼 자란 옥수수 밭에 눈을 주었다.
금석은 과연 우리 인간들의 인연이란 그 누구의 작품일까,
하는 생각을 해 봤지만 역시 만물의
창조주만이 알 수 있는 '불가사의'라고 거듭거듭 생각했다.
자신이 미영을 만나 별탈 없이
두 아이를 낳고 열심히 살았다면 물질적인 부야 어찌됐던 그런 대로
남들처럼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경험한 미영은 똑똑했고 다른 여자들처럼 허영심도 좀 있으며
감정적이긴 하지만 본성적으로
성격에 결함이 있는 여자는 아니었다.
그런 여인이 어떻게 아이들과 금석을 버리고 떠났을까 ?
정말 불가사의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미영이 떠남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이성적이며
완벽한, 이상형의 여인 진희를 새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인연의 설계를 도대체 누가 한단 말인가 ?
그때 자신의 품에 안겨 흐느끼던 미영의 슬픔과 후회의 모습이 클로즈업 돼왔다.
하지만 곧 진희의 이지적이며
사랑스러운 얼굴, 넓은 옥수수밭,
길가 차에 치어 죽은 동물 곁에 앉아있던 까마귀들,
그리고 방금 지나친 늪지의 암 오리 한 마리가 다 큰 새끼 떼들을 거느리고 다니는
모습이 현실로 분명하게 떠오르자
금석은 혼잣말로 '최소한 저런 오리만도 못한 인간이 될 수는 없잖아.'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다시 그 옛날 병든 자신을 업고 다니며 고생을 한
돌아가신 엄마와 마지막 트랙을 힘있게 달리는 딸아이 숙이의 모습,
상대 선수를 교묘하게 엎어 치며 폴승을 거두는 아들 피터가 떠올랐고,
제 순서를 찾기 위해 환등기를 빠르게 돌린 것처럼
여러 가지 장면들이 금석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왜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 ?
그리고 우리의 인생이란 ?
문득 그런 생각들을 하며 운전 중인 아내를 쳐다본 순간,
금석은 본능적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거야, 진희 ! "라며
큰소리로 외쳤다.
선글라스를 쓴 진희가 가만히 금석을 쳐다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그녀의 뒤편으로 저 멀리 조그마한
농가가 등성이에 보였고,
넓다란 옥수수 밭과 드문드문 초록빛의 콩밭이 펼쳐져 있었으며
그 위를 파아란 하늘에 흰구름이 두둥실 지나가고 있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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