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살기

2006.02.10 20:38

정해정 조회 수:526 추천:6

  하늘이 한 길이나 높아지고 찬바람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가수인 늙은 매미는 자신이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되는 날이 가까워 옴을 몸으로 어렴풋이 느낍니다.
  매미는 한 잎씩 낙엽을 떨구어 내고 있는 자작나무 가지에 겨우 몸을 지탱하고 앉아 있습니다. 툭 불거진 눈알에 눈물이 고이는지 자꾸만 닦아냅니다.
  "매미 할아버지! 매미 할아버지!"
  가을 한 철을 살려고 멀리서 온 젊은 귀뚜라미가 불렀습니다. 귀뚜라미는 항상 진한 갈색 양복을 단정하게 입고 자기 키 보다 한 배 반이나 되는 더듬이를 잘 손질하고 살아가는 아주 멋쟁이랍니다.
  "오. 귀뚤이! 자네가 올 줄 알고 그 날 을 기다리고 있었다네. 이리 가까이 오게나."
  매미는 기운이 다 빠져 숨이 찬 목소리였지만 점잖은 노인네답게 아주 차분하게 말했습니다. 매미는 파란 하늘에 떠 있는 햇솜 같은 흰 구름을 멍 하니 한참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귀뚜라미에게 돌립니다.  
  "나는 단 보름을 살기 위해 오 년을 땅 속에서 기다려서 번데기가 되었다네."
  이야기를 시작한 매미는 마치 꺼져 가는 촛불이 마지막에 반짝 하고 살아나듯이 잠깐 생기가 돕니다.
  "어느 날 말야...땅거미가 질 무렵이었지. 불이 난 하늘처럼 노을이 온 세상을 덮었을 때. 등이 스믈스믈 하는 게야."
  매미는 일생일대의 기적이라도 나타난 듯 흥분합니다.
  "등이 일자로 쫘악 갈라지는 느낌... 그 속에서, 그 속에서 말야 뭐가 나왔 는 줄 아나?"
  매미는 갑자기 목소리가 높아집니다.
  "하아! 날개야. 날개...... 그때 어찌나 가슴이 벅차고 신기하던지......"
  매미는 그 때를 회상하는지 잠시 눈을 감습니다. 매미의 흥분한 소리에 낮에 해만 바라보고 있던 얼굴이 넓적한 해바라기가 고개를 숙이려다 흘끔 쳐다봅니다.
  "단 보름을 살려고..."
  그러나 매미의 말소리는 보름을 살다가 간다는 것이 아쉽다거나 후회 롭 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귀뚤이. 자네를 기다린 것은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어서 였네. 나는 어제 의 추억에 매달린다거나 허황된 내일의 꿈을 바라고 살지는 않았지. 어제의 내일이 바로 오늘이고 내일의 어제가 바로 오늘인게야."
  매미는 또 눈이 흐려지는지 커다랗게 눈꺼풀을 몇 번 꿈벅입니다.
  "세상에는 오늘을 헤프게 사는 이들이 너무나 많아. 하아. 많고 말고."
   귀뚜라미는 살이 통통한 허벅다리를 움직여 자세를 바로 잡습니다.
  "나는 오늘만을 위해서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네. 내일을 기다리며 세월을 허송하기에는 내 인생이 너무나 소중한 게야. 그러니까 멈춤 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웠지."
  바람이 살짝 지나갔습니다. 연한 바람인데도 늙은 매미한테는 오싹 한기가 느껴집니다.
  "악보도 없이 그냥 가슴이 터져 라고 노래를 불렀어.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당장 벼락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그냥 가슴이 터져라 하고......"
  젊고 총명한 귀뚜라미는 이 세상을 떠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가수 매미가 측은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그에게서 쏟아지는 알 수 없는 아름다운 빛을 봅니다.
  "그래요. 매미 할아버지. 저도 이 가을 한철만 짧게 살다 갈 것이지만 , 사는 동안이라도 오늘을 헤프게 살고 싶지는 않아요."
  귀뚜라미 도 매미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매미 할아버지는 밝은 대 낮에 나무 그늘에서 노래를 하셨죠? 그러나 나는 해가 지면 풀섶 보다 사람 가까이서 노래를 부르죠. 쓸쓸한 가을밤에 말예요. 그것도 슬프디 슬픈 목소리로......"
  "그래. 그래. 나도 안다 네. 가을밤 귀뚤이 노래 소리는 세상 사람의 애 간장을 녹이는 소리지."
  "매미 할아버지. 하루살이는 단 하루를 살기 위해 이 년을 기다린대요. 하루살이에 비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축복을 너무 많이 받은 셈이죠."
  오히려 젊은 귀뚜라미가 늙은 매미를 위로합니다. 매미는 어느덧 자신의 몸에서 기운이 슬슬 빠져나가는 것을 느낍니다.
  "귀뚤이 땅거미가 지고 있네. 어서 서둘러 이 한 철을 살아야할 거처를 마련해야지 않겠나? 내 걱정말고 어서 가게나."
  귀뚜라미는 그래도 매미가 걱정이 되는지 머뭇머뭇 뒤돌아보고는 폴짝폴짝 뛰어 어둠 속으로 사라집니다.
  귀뚜라미를 보내고 난 늙은 가수 매미는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흙 위에 눕습니다. 낙엽이 된 자작나무 이파리 하나가 지나가던 바람에 팔랑팔랑 내려와 매미를 덮어줍니다.
  매미는 가만히 눈을 감습니다. 저 깊고도 깊은 벼랑 아래로 한없이 떨어  지는 것도 같아 금세 편하고 곤한 잠 속으로 스르르 빠져듭니다.

  가수 매미의 장례식 날이 왔습니다.
  많은 곤충들과 들꽃들이 모였습니다. 모든 곤충들과 들꽃들은 입을 다문 채 슬퍼했고, 할미꽃은 등을 구부리고 한쪽 가에 서 있구요, 얼굴이 넓적한 해바라기도 보입니다.
  귀뚜라미는 갈색 옷을 단정하게 입고, 키보다 한배 반이나 긴 더듬이를 살살 움직이며 제일 앞자리에 앉아 누구보다도 더 슬픈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가장 오래 살아온 자작나무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매미를 떠나 보내는 '조사'를 읽습니다.  

   가수매미의 영전에 드립니다.
   우리 곁을 떠난 매미는.
   오늘을 충실하게 살다간 '가수' 였습니다.
   맑은 이슬만 먹고, 청빈하게 살았던 깨끗한 '시인'이었습니다.
   다른 곤충들처럼 집을 짓지 않고, 나무 그늘에서만 살았던 욕심 없는 '철     학자'였습니다.
   그리고 오 년을 기다려 보름을 열심히 살다가 허물을 벗고 미련 없이 빈     마음으로 떠날 줄도 알았으니 진정한 '수도자'였습니다.
   우리는 이제 흙으로 돌아가는 매미의 노래 소리는 사라졌지만, 그 소리를     가슴깊이 간직할 것입니다.
   매미의 아들, 손자, 며느리의 합창 소리가 온 누리에 영원히 이어지리라     믿습니다.
   땅속 깊은 곳에서 우리들이 다시 만날 때까지 영혼의 안식을 누리십시오.
                 모든 자연을 대표해서 자작나무가 드립니다.

  물을 끼얹듯 조용한 가운데 매미의 장례식이 끝났습니다.
  하늘도 자작나무의 슬픈 조사를 들은 듯 땅 가까이에 잿빛 구름을 내려  보냈습니다.
  잿빛 구름은 가을을 재촉하는 차가운 빗방울로 변해 한 방울, 두 방울씩 뚝뚝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모두들 서둘러 뿔뿔이 흩어지고, 홀로 남아 슬피 울고있는 귀뚜라미의 눈물이 차가운 빗방울에 섞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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