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축제

2007.09.30 11:50

김영문 조회 수:743 추천:1

                          타인의 축제


    땀에 흠뻑 젖은 호구 속에서 김준영은 헐떡이는 숨을 가다듬으며 마룻바닥을 차서 앞에 있는 상대와의 거리를 좁혀갔다. 얼굴을 가린 호면의 보호망 속에서 반짝 눈을 빛내며 재클린도 유연하게 도장의 마룻바닥을 돌았다. 열어놓은 창으로는 7월 휴스턴의 폭염이 숨이 막히도록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엄한 관장의 규율에 의해서 에어컨을 쓰지 못하게 되어 있는 도장 안은 불덩어리를 쏟아 붓고 있는 태양 바로 아래 선 것보다도 더 뜨겁게 끓어올랐다.
    얏, 갑자기 날카로운 기합을 넣으며 재클린이 번개같이 뛰어들어 검을 날렸다.
    아!  미처 놀랄 겨를도 주지 않고 그녀의 검이 바람을 가르며 그 앞에 방어자세로 선 준영의 호면 쓴 머리 한 가운데를 내려쳤다. 호되게 머리 위로 떨어지는 충격 속에서 앗! 소리 지르며 준영은 뒤늦게 흐트러졌던 마음을 후딱 모았다. 준영의 검 끝이 부르르 떨었다.
    호면의 보호망 안쪽에서 긴장으로 빛나던 재클린의 눈이 의아한 빛을 띠며 물었다. 평소와 다른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나요?  
    뒤늦게 급히 뒤로 빠지는 준영의 발이 평소처럼 날렵하지 못했다. 어쩐지 허둥거리고 있다고 스스로도 느끼며 준영은 온 정신을 검 끝에 집중하기 위해서 애썼다.
    그러나, 어젯밤 거의 십 오년 만에 뜻밖에 걸려온 동창생 이철훈의 전화. 아니, 너는!  갑자기 가슴이 쿵쾅거리고 뛰기 시작했다. 전화기 저쪽에서 들려오는 철훈의 목소리는 남성적이고 강했던 그답지 않게 가늘고 기운이 없었다.
    “준영아. 나야. 철훈이야. 어떻게 지내고 있어?”
    “철훈이!  네가 웬 일로?”
    집에서 새로 나온 의학 서적을 공부하고 있던 준영은 거의 의자에서 벌떡 일어설 뻔 했다. 전화기 저쪽에서도 이쪽의 충격을 알고 있다는 듯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마침내 주저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준영아, 너는 아직도 나를 미워하고 있겠지?”
    준영은 뛰는 가슴을 누르며 침착해지려고 애썼다. 잠시 침묵하던 철훈이 한숨처럼 힘없이 말했다.
    “준영아, 네가 말을 안 해도 알고 있어. 우린 이제 그런 일이 있기 전으로 되돌아가기는 틀린 거야. 그렇지?”  
    준영은 그저 침묵을 지켰다. 어떤 말이건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으나 아무 말도 생각해낼 수 없었다. 대화는 더 이루어지지 않았고 철훈은 무슨 급한 일로 준영을 꼭 볼 일이 있어서 휴스턴으로 오겠노라고 했다. 도착 시각과 비행기 편을 준영에게 알리고 철훈은 미안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무슨 일일까?
    따닥!  바람을 가르며 날아온 재클린의 검이 허공에서 준영의 검에 부딪쳤다. 그녀는 번개같이 방향을 바꾸어 반 호흡보다도 짧은 순간에 허리를 비틀어 마침 비어 있던 준영의 오른쪽 옆구리를 베어냈다. 그리고는 온몸으로 준영에게 부딪쳐 들어와 검을 맞대고 대치했다. 그 몸은 튀길 듯 긴장하여 여자의 몸 같지 않고 마치 돌덩어리처럼 단단하게 느껴졌다. 준영은 또 들어올지 모를 공격에 대비하여 호흡을 맞추다가 재빨리 뒤로 빠져나오면서 재클린의 목을 가격했다.
    앗!  재클린이 미처 방어하기 전에 준영의 검이 재클린의 오른쪽 어깨와 목 사이를 정확하게 베어냈다. 뒤늦게 펄쩍 뛰어서 뒤로 물러서는 재클린의 눈이 호면 속에서 순간 낭패로 흐려졌다.
    재클린과 시선을 맞춘 채 숨을 고르며 준영은 상대의 움직임을 동물 감각으로 읽었다. 마루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여 거리를 좁혀오는 재클린의 발을 눈가로 보며 준영은 그녀가 시도할 다음 공격의 수를 예측하고 대비했다. 검도장의 독고 관장이 가르친 대로 정확하게 움직이고 있는 재클린의 발은 마치 깃털처럼 가벼워 보였다.
    둥, 둥, 둥.
    대련을 지켜보던 독고 관장이 태극무늬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는 북을 두드렸다.
    “그만!”
    검을 내리고 돌아선 둘은 도복을 가다듬은 후 다시 마주보며 입례했다. 준영이 호면을 벗어들고 재클린에게 다가갔다. 그녀도 호면을 벗었다. 긴 머리가 땀에 젖어 엉클어져서 얼굴에 붙어 있었다. 둘 다 땀을 비 오 듯 흘리고 있었다.
    “준영씨, 무슨 일이 있어요?  오늘은 그전하고 다른데요.”
    준영은 땀투성이의 얼굴을 손등으로 훑어내며 계면쩍은 웃음을 입가에 머금었다.
        철훈이 어째서 그렇게 오랜만에 전화를 했고 더구나 갑자기 휴스턴에 오겠다는 것은 무슨 일인지 모를 일이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를 모두 함께 다녀서 형제만큼이나 가까운 동창생이지만 지금은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이름이다. 이민 와서 뉴욕 어디에선가 산다는 이야기는 얼핏 들은 것 같지만 그 이외에는 전혀 아는 소식이 없었다. 그렇게 엄청나게 긴 세월 동안을 단 한 번의 연락도 없이 살았는데 갑자기 전화가 오고 더구나 휴스턴까지 찾아오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엉킨 실타래를 풀길이 없었다.
    “준영씨, 괜찮아요?  무슨 걱정 있나요?”
    재클린이 얼굴에 흘러내리는 땀을 수건으로 닦아내며 근심 띄운 표정으로 준영을 보았다.
    준영과 같이 텍사스 앤더슨 캔서 센터의 언컬러지 (Oncology : 종양학과) 의사인 재클린은 병원에서는 준영과 둘도 없이 마음이 맞는 파트너였고 병원 밖에서도 서로 아끼고 사랑해주는 친구였다. 한국인 어머니와 백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 재클린은 준영을 처음 만날 때부터 그가 자기 어머니의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미 친밀감을 느꼈다. 준영의 권유로 검도를 배우기 시작할 때에도 재클린은 준영이 놀랄 정도로 동양의 철학과 무술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한국말을 배울 기회가 없어져서 준영이나 검도장의 독고 관장과 영어로 밖에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것을 무척 안타까워했다. 재클린은 첫 결혼에서 비극적으로 실패하고 이혼한 후 그 충격을 잊지 못해서 오랫동안 독신으로 지내고 있었다. 마치 그 충격을 복수하듯 맹렬히 연구에 몰두하여 이제는 준영과 함께 휴스턴 앤더슨 캔서 센터의 가장 권위 있는 언컬러지 닥터중의 하나가 되었다.
    재클린이 남자처럼 준영의 어깨를 툭 쳐주며 말했다.
    “오늘 수술 있죠?  들어가서 쉬세요. 준영씨는 오늘 뭔지 평소하고 달라 보여요. 혹시 필요한 일 있으면 전화하세요. 나는 오후 한 시부터 근무예요.”
    “재클린, 감사합니다. 나는 세 시에 수술 들어갈 예정입니다.”
    준영은 땀에 흠뻑 젖어있는 검도 도구들을 챙겨들고 도장을 나왔다.


    준영은 철훈의 눈을 똑바로 볼 수 없어서 땅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자존심 어쩌고 하면서 신경 쓰지 말어. 아버지가 너 머리 좋고 공부 잘하고 모범생이라고 생각 안했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란 말이야.”
    준영의 어깨를 툭 쳐주며 철훈은 마치 아무런 일도 아닌 것처럼 말했다. 부유한 집 외동아들인 철훈은 언제나 거리낌 없이 행동했고 준영은 그런 철훈을 보면서 항상 부러워했었다.
    둘이 모두 같은 대학에 원서를 내고 입시에 합격했는데 준영은 입학금이 걱정이었다. 철훈이 이것을 아버지에게 말씀드리자 철훈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의 입학금을 낼 때 준영의 입학금도 같이 내버린 것이다. 친구끼리이면서도 준영은 철훈의 앞에서 자꾸만 작게 느껴지고 있는 자신을 의식하면서 서먹해 했다. 그런 준영의 마음을 읽었는지 철훈이 씨익 웃었다.        
    “짜샤, 사람이 크게 생각해야 되잖아. 이 정도 가지고 그렇게 꽁하게 생각해가지고 어떻게 큰 사람이 될 수 있겠어?  더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의사가 되면 그 때 아버지에게 갚으면 될 것 아니야. 아니면, 좋은 의사가 되어서 네 의술을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에게 갚아도 되고.”
    철훈은 그러면서 담배를 한 가치 뽑아 물고 새로 산 던힐 라이터로 멋지게 불을 붙였다. 고등학교 때도 담배를 피웠지만 이제 숨을 필요 없이 공개적으로 즐길 수 있는 일이 되었다는 것을 과시라도 하는 것 같이 철훈은 아무데에서나 담배를 꺼내서 불을 붙이곤 했다.
    그날 저녁 집에 들어간 준영은 이 사실을 홀어머니에게 어렵사리 알렸다. 예상했던 대로 준영의 어머니는 침착해지려고 애쓰면서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준영아, 그 어르신께 가서 내가 입학금은 다 마련해 놓았으니 염려 놓으셔도 된다고 말씀 드리거라. 아직 납부 기일이 일주일이나 남아 있고 내가 은행에서 대부를 받을 수 있도록 이미 조치를 해놓았다.”
    말을 마치고 조용히 눈을 감은 어머니의 눈썹이 가늘게 떨렸다고 느끼면서 준영은 죄스러운 마음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런데, 어머니, 철훈이 아버님께서 돈을 저한테 주신 게 아니고 직접 학교에다가 납부해버리신 거예요. 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잠시 침묵하던 어머니가 나지막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고마우신 분이구나. 이왕에 그렇게까지 하신 일인데 그 분 선의에 너무 거역할 수도 없는 일이다. 고맙게 생각하고 공부 열심히 해서 갚도록 하거라. 성실하게 열심히 노력하면서 사는 사람에게는 어김없이 기회가 오게 되는 것이다. 받은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가 틀림없이 보답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네, 어머니.”
    준영은 대답하고 방을 나오면서 어머니 말씀대로 언제인가는 철훈의 아버님과 철훈에게 꼭 은혜를 갚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준영은 그 기회가 먼 훗날 그렇게 참담한 상태로 오게 되리라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진공 속처럼 밀폐된 수술실 안에서 준영과 레지던트 의사 두 명, 수간호사 한 명, 보조 간호사 네 명은 눈빛으로만 의사 전달을 하며 수술 절차에 들어갔다. 실내는 춥다고 느낄 정도로 과다하게 냉방되어 있었다.
    소종양 폐암 부분 절제 수술.
    그렇게 여러 번 해보아서 이제는 눈감고 손으로 만져보기만 해도 절개할 부위와 제거해낼 부분을 가려낼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져 있지만 준영의 심장은 수술실에 들어가면서부터 빠르게 박동했다. 인간의 몸에 칼을 대서 어디건 잘라낸다는 일은 그것을 얼마나 여러 번 해보았느냐하는 완숙의 경험도와는 상관없이 항상 긴장되는 일인 것이다. 더구나 모든 수술은 마치 첫 번째인 것처럼 항상 그전에는 없던 새로운 어떤 것이 있게 마련이고 따라서 수술실에 들어간 의사와 간호사들은 언제나 첫 경험인 것처럼 극도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술 받아야할 환자는 전신 마취가 되어 이제부터 자기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그저 시체처럼 발가벗겨진 채 누워있었다. 다만 실낱같은 선 하나가 삶과 죽음을 경계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리 고결한 인간도 결국 보잘 것 없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해질 때가 온다는 것은 말할 수 없이 두려운 일이다.
    준영이 손을 내밀자 수간호사가 기다렸다는 듯 숙련된 동작으로 수술용 메스를 그의 손에 놓아주었다. 그는 환자의 가슴에 미리 파랗게 마킹이 되어 있는 선을 따라 손에 힘을 주며 절개해 나갔다. 잘라진 선을 따라 빨갛게 피가 흘러나오고 메스가 뼈 위를 지나갈 때마다 울퉁거리며 단단한 느낌이 메스를 통하여 준영의 손끝에 전해져왔다. 수술실 경험을 처음 하는 맨 끝의 두 견습 간호사는 눈만 빼놓고 얼굴을 다 덮은 마스크 속에서 두려움에 떨며 질려 있었다.
    일 분.
    이 분.
    삼 분.
    차갑게 냉방된 수술실 이었지만 준영의 이마에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진공 같은 수술실의 긴장감 속에서 눈으로 의사를 주고받으며 바쁘게 손을 움직여 마침내 절개가 모두 끝났다. 잘라낸 피부와 함께 그 밑에 두툼하게 붙어있는 근육과 지방질을 준영은 힘을 주어 벌려내고 클램프를 끼워 넣었다. 절개된 사이로 불빛을 집어넣고 준영은 안을 드려다 보았다. 자잔한 암 세포는 폐 속 부드러운 조직을 잠식하며 그 안 전체에 어떻게도 해 볼 수 없을 만큼 넓게 퍼져 있었다.
    틀렸다. 떼어내려면 폐를 모두 다 절제해야하는데 이것이 불가능할뿐더러 이 정도 암 세포가 진행되어 있으면 림프 선, 뼈, 간 그리고 몸의 다른 기관에도 모두 전이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준영은 눈짓으로 두 명의 레지던트 의사에게 차례로 안을 드려다 볼 수 있도록 했다. 불빛으로 환하게 비춰진 동굴 같은 폐 속을 드려다 본 그 두 명도 절망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무 것도 해줄 것이 없었다. 이 환자를 죽음으로부터 보호해 줄 수 있는 방법은 아무 것도 없었다.
    스스로의 무력감에 항거하듯 이상하게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키며 준영은 얼마나 도움이 될지 확신이 없었지만 아주 나빠 보이는 부분들을 몇 군데 제거해냈다. 이 정도라도 떼어내서 다만 몇 개월이라도 생명이 연장될 수 있다면 수술은 성공한 셈이다.
    날카로운 메스로 잘라낸 암 덩어리를 준영이 훠셉츠로 폐 속에서 끄집어내자 견습 간호원이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스테인리스 용기를 내밀었다. 피가 떨어지고 있는 제거물을 받아내는 손이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준영은 눈짓으로 레지던트 의사 둘 중의 한 명에게 절개 부분을 다시 닫으라고 명령했다. 잠시 봉합 과정을 지켜보다가 준영은 수술 장갑을 벗어서 휴지통에 던져 넣고 수술실을 나왔다. 잘 버티면 4 개월. 이제 이 환자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넉넉한 분량의 진통제를 계속 몸속으로 흘려 넣어서 고통 없이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길 뿐이다. 누군가의 남편, 아버지, 아들. 누군가의 가장 사랑하는 친구. 꿈과 이상이 힘차게 날갯짓하며 창공으로 날아오르던 도전하는 인간. 그러나 이제 모두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모두 사라지고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이것이 온당한 일인가?  이렇게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없어져버려도 되는가?
    준영은 수술실에서 나와서 옆방에 들려 세면대에 물을 틀고 비누를 많이 쓰면서 손을 닦았다. 그리고 이층 카페테리아로 가서 큰 컵으로 커피를 한 잔 주문했다. 창문가로 가서 밖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준영은 뜨거운 커피를 두 손으로 감싸듯 들고 아끼며 조금씩 마시기 시작했다. 창문 밖 정원 언뜻 눈 간 곳에는 다람쥐 한 마리가 유연한 동작으로 뛰다가 멈춰 서서 주위를 살피며 안전을 확인하고 있었다.


    다람쥐는 수직으로 서 있는 나무를 타고 잽싼 동작으로 힘도 안들이며 포르르 뛰어 올라갔다.
    “어마, 다람쥐예요. 준영씨, 저걸 좀 봐요.”
    이수연이 호들갑스럽게 준영의 소매를 잡아 흔들며 말했다.
    준영이 의과 대학 3학년일 때 수연은 의과 대학 건물과 마주보고 있는 건물의 문과 대학 영문학과에 신입생으로 들어왔다. 수연은 여럿 속에 섞여 있어도 얼른 눈에 띄는 수려한 미모를 가진 여학생이었다. 누구건 한번 수연에게 눈을 주면 마음 설레며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게다가 성격 또한 수더분하고 겸손해서 그녀는 순식간에 캠퍼스 안에서 모두가 사랑하는 인기 최고의 여학생이 되었다. 그런데 도무지 알다가도 모를 노릇인 것이 주위의 멋진 남학생들을 모두 놓아두고 수연은 조용하고 선이 가늘고 가난하고 실로 보잘 것 없는 준영에게 관심을 보이며 접근해왔다. 수연은 준영을 마치 강아지처럼 쫄쫄거리며 잘 따라다녔고 준영이 읽으라고 적어주는 책은 모두 사서 읽으며 준영의 정신세계에 맞추기 위한 노력도 기울였다.
    “수연아, 나 좀 가만 내버려둘 수 없니?  숲 속에 다람쥐가 있는 것이 무엇이 그렇게 신기하다는 말이냐?”
    읽던 책으로 얼굴을 덮고 풀밭에 누워 잠을 청하던 준영이 졸리운 목소리를 냈다. 수연이 몸으로 달려들며 말했다.
    “그렇게 재미없게 낮잠만 자겠다고 그럴 거예요, 정말?  사람이 좀 낭만이 있어야하는 거 아니에요?”
    뭉클하며 전신에 느껴지는 수연의 무르익은 몸에 준영은 흠칫 놀랐다. 그리고 갑자기 끌어안고 뒹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나른하게 감싸오던 낮잠은 후딱 달아나 버리고 준영은 본능적으로 죄의식을 느끼며 수연의 몸을 물리치고 서둘러 일어나 앉았다.
    “너 좀 까불지 않을 수 없니?  다 큰 처녀가 아무데서나 그렇게 철없는 짓 하면 되겠어?”
    “후, 후, 준영씨. 우리 오늘 저녁에 맥주 마시러 갈래요?”
    살살 눈웃음을 치며 준영을 보고 있는 수연의 자태는 아무리 돌덩어리 같은 심장을 가진 남자라도 물리칠 수 없도록 요염했다.
    둘의 관계는 더욱 무르익었고 준영이 4 학년이 되었을 때 마침내 그들은 학교 근처의 여관에서 그 동안 자제해 왔던 젊은 욕망을 불태웠다. 분명히 첫 경험인데 수연은 밤새도록 준영에게 집요하게 매달렸다. 자유분방하게 터져 나오는 수연의 신음소리에 놀라서 준영은 옆방에서 듣지 않을까 땀을 뻘뻘 흘리며 수연의 입을 틀어막아 주어야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준영과 수연은 두어 주일에 한 번씩은 남의 눈을 피하여 둘만의 장소를 찾아서 저희들끼리만 아는 비밀을 키워나갔다. 준영의 품속에서 남자를 알게 된 수연은 갑자기 성숙하고 더욱 눈부시게 아름다워졌다. 그리고 비밀의 횟수가 거듭될수록 수연은 점점 더 그칠 줄 모르고 준영의 몸을 갈망했다. 그녀의 그 암흑 속 같은 욕망은 길이를 알 수 없는 동굴 같이 꾸불꾸불 한없이 이어져 갔다. 이따금 준영은 수연이 가진 과도한 욕구를 걱정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일순간일 뿐 그도 역시 항거할 수 없는 쾌락 속으로 순식간에 휘말려들어 수연과 함께 불타오르곤 했다.
    준영은 마침내 어머니에게 수연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어느 날 수연을 데리고 가서 인사를 드리게 했다. 수려한 용모와 수더분한 성격 때문에 준영은 어머니가 대환영할 줄 알았다. 그런데 수연을 보는 순간 어머니의 눈빛이 흐려졌다. 어머니는 조용조용한 어조로 윗사람의 위엄과 예를 지키며 대화를 이어나갔지만 준영은 어쩐지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것처럼 불안했다.
    수연이 가고 난 후 준영은 어머니에게 물어보았다.
    “어머니, 어쩐지 마음에 안 들어 하시는 것 같던데 무슨 일이죠?”
    어머니는 조용하게 앉아서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말했다.
    “글쎄다, 내가 보기에는 너하고 어울릴 것 같지가 않구나.”
        어머니는 굳은 얼굴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준영도 역시 무거운 표정이 되어 입을 다물었다.  어머니는 수연에게서 무엇을 보았기에 그렇게 한순간에 거절해 버리시는 것일까?


    철훈은 문과 대학에 입학하여 일학년을 마치고 입대했다. 한 학기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학교를 다닌 준영이 4 학년 마지막 학기를 거의 끝내고 있을 때 철훈이 제대하여 돌아왔다. 다음 학기부터 복학할 계획이라면서 빈둥거리며 준영의 의과 대학에 찾아오곤 하던 철훈은 어느 날 준영과 수연과 함께 자기 집으로 놀러가기로 했다.
    “어머나, 이게 철훈씨가 사는 집이란 말이에요?”
    수연은 끝없는 것처럼 이어진 기와가 얹힌 돌담을 둘러보며 눈을 휘둥그랗게 떴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울창한 수목과 손질이 잘되어 있는 파란 잔디가 마치 고궁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철훈의 아버지 앞에 조심스럽게 쪼그리고 앉은 수연을 철훈이 소개했다.
    “아버지, 준영이의 여자 친구 이수연이에요. 준영이와 아마 곧 결혼할 사이인 것 같아요.”
    수연이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눈을 내리 깔고 약하게 부정했다.
    “아니, 아직은 아니에요. 아직은 그런 얘기가 없었어요.”
    처음 보는 순간부터 아버지의 눈이 수연의 예쁜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수연은 얼굴이 빨개져서 어쩔 줄 모르며 아버지의 눈을 피하려 했고 철훈은 그런 아버지의 눈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그리고 무언인가가 잘못되어 갈 것 같은 두려운 예감을 느끼며 준영의 눈치를 살폈다. 준영 역시 예상 못했던 불안감을 느끼며 당황해 하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시간이 지나면서 준영과 수연의 사이는 눈에 보이는 이유 없이 서먹하게 변해갔고 더구나 둘도 없는 단짝 철훈 마저도 어쩐지 소원한 관계로 멀어져가기 시작했다.
    준영은 대학을 졸업한 후 군 입대 대신에 택한 2년 동안의 무의촌 봉사를 위하여 강원도 월곡리라는 곳으로 떠났다. 그 긴 2년의 무의촌 봉사 기간 동안에 준영은 철훈에게서 단 두 통의 실로 간단하게 안부를 묻는 편지 밖에 받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수연에게서는 한 통의 서신도 오지 않았다.
    무의촌 봉사를 마치고 준영이 서울에 왔을 때 철훈과 수연은 결혼하여 그 아버지의 대궐같이 큰 집에서 같이 살고 있었다.


    AMERICAN AIRLINES FLIGHT NO. 127
    FROM NEW YORK CITY
    SCHEDULED ARRIVAL TIME 6:55PM

    휴스턴 공항의 전광 문자를 읽은 후 준영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6시 30분. 아직도 25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준영은 대기실 벤치에 앉아서 숨을 가다듬었다. 철훈이 전화가 왔을 때 ‘철훈아, 너의 처 수연도 같이 오니?’ 하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 이름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철훈은 그에 대해 자진해서 언급하지 않은 채 전화를 끊어버리고 말았다. 머릿속으로 계산해 보니 거의 십 오년 동안을 연락 한 번 없이 살아온 셈이 되었다. 준영이 무의촌 봉사에서 돌아와 둘이 결혼해서 가정을 꾸미고 살고 있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의 그 분노감은 이제 가고 없다. 그 때 느꼈던 배신감과 절망감, 그리고 어두운 한쪽에서 파괴적으로 타오르던 복수의 의지, 그 모든 것은 다 세월과 함께 희석되어 씻겨 내려가고 없다. 이렇게 긴 세월이 지나간 이제 그 모든 것은 그저 부질없는 한 순간의 과거이었을 뿐이다.
    준영은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담담해지려고 애썼다. 그런데, 그렇게 다 잊고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이처럼 가슴 두근거리며 바늘로 심장을 찔러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고 있는 것은 어쩐 일인가?
    7시 10분. 공항 근무원이 와서 닫혀있던 출구를 열어놓았다.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일어나서 출구 쪽으로 몰려들었다.
    잠시 후 첫 번째 승객이 출구를 통해서 나왔다. 준영도 의자에서 일어나 그 자리에 서서 출구 쪽을 보며 나오는 사람들을 눈으로 확인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기다린 후 승객이 거의 다 나왔을 때 쯤 해서 마침내 철훈이 나타났다. 준영은 자기도 모르게 긴장하며 두 손을 깍지 끼어 마주 잡았다. 급히 눈으로 주위를 훑었지만 수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철훈은 혼자서 온 모양이었다. 그에게서는 부잣집 외동아들의 호방한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고 어쩐지 초라하고 쫓기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의 몸은 몹시 야위어 있었다.
    “철훈아!”
    준영은 철훈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갔다. 철훈이 준영을 발견하고 멈칫 섰다가 어쩐지 어색한 웃음을 띠우며 걸어왔다.
    “놀랐지?  갑자기 전화를 하지 않나, 이렇게 불쑥 나타나지를 않나 말이야.”
    철훈이 쉰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리고 자신 없는 사람처럼 곁눈으로 준영을 훑어보았다.
    “너는 그냥 그대로 변하지 않았구나. 모습이 옛날 그대로야.”
    준영은 철훈의 손을 찾아 잡고 악수를 한 후 두 팔을 벌려 그를 부둥켜안았다.
    “물론 놀랐다. 헤아려 보니 자그마치 십 오년 가까이 되었어. 혼자 왔니?”    준영은 팔 안에 느껴지는 철훈의 몸이 뼈 꼬챙이처럼 메말라 있는 것에 흠칫 놀라면서 팔을 풀었다. 그리고 얼른 철훈의 손에서 여행 가방을 빼앗아 들었다.
    “혼자야. 이수연에게도 알리지 않고 그냥 나와 버렸어. 너에게는 큰 죄를 짓고 살았으면서도 이렇게 내가 너를 필요로 하는 일이 생기니까 염체불구하고 찾아왔어. 몹시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니?”
    철훈은 쉰 목소리로 온몸을 쥐어짜서 힘을 들이는 것처럼 말했다. 자기의 아내를 마치 관계없는 여자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이 성까지 붙인 이름으로 지칭해서 부르고 있었다. 준영은 철훈을 차에 태우고 공항을 빠져나와 집으로 가는 하이웨이로 올라섰다. 어쩐지 철훈에 대한 예감이 어두웠다.
    “너에게 잘못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을 때였어. 너무 철없이, 이기적으로 행동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크게 잘못된 후였다는 말이야. 빨리 재산을 상속받기 위해서 나는 아버지의 꼭두각시처럼 살았어. 그리고 아버지는 수연을 집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나에게 결혼을 강요했어.”
    일정한 간격으로 서있는 가로등이 달리는 차 안으로 빨려들어 왔다가는 뒤로 사라지곤 했다.
    “준영아, 나는 네가 다시 마음을 열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어. 나는 너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빌고 싶어.”
    철훈은 처절한 얼굴로 차창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세상 물정 모르고 잘못 살아온 인생이었어.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그 많던 재산도 결국은 다 내가 탕진해 버렸어. 나는 지금 직업도 없고 돈도 없는 구제 불능의 거지가 되어 있는 거야.”
    힘들여서 말을 마친 철훈의 얼굴이 벌개지더니 참을 수 없는 기침을 해댔다. 준영의 머릿속으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우고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철훈은 갑자기 왜 내가 필요해졌다는 것일까?  운전대를 잡고 있는 손에 파르르 경련이 왔다.
    “철훈아, 괜찮니?”
    대답 없이 창밖에 눈을 주고 있는 철훈의 얼굴에 희미하게 자학적인 미소가 떠오른 것을 준영이 곁눈으로 놓치지 않고 감지해냈다.
    “준영아, 나를 미워하지 말고 도와 줘. 나는 너의 도움이 필요해. 그래도 우리는 한 때 친구였지 않아?”
    철훈이 나직이 혼잣말하는 것처럼 속삭였다. 그것은 차라리 호소와 같은 것이었다.
    “철훈아. 나는 다 지나간 일이라고 생각하려고 애쓰고 있어. 이제 모든 것은 다 지나간 부질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고 말이야. 너를 미워했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워버리고 싶어.”
    “준영아, 고마워.”
    준영은 하이웨이에서 벗어나 집으로 가는 낯익은 도로로 들어섰다. 맞은편에 있는 맥도날드의 환한 형광 간판이 사위를 낮처럼 밝게 비추고 있었다.
    “이제 나는 네가 미워할 가치도 없는 쓰레기가 되어 버렸어.”
    차가 맥도날드의 환한 불빛 앞을 지나가면서 잠시 드러난 철훈의 얼굴은 섬뜩하도록 창백했다.
    “이수연은 네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너의 뒤를 추적하기 시작했어. 네가 볼티모어의 죤스 홉킨스 대학 의과에 편입학한 후 수석 졸업하고 대학원 진학, 인턴, 레지던트, 이 모든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을 용케도 알아내서 모두 기록해두고 있었지.”
    준영의 심장이 심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 때 그 시절의 아쉬웠던 추억이 가슴이 미어지도록 되살아났다. 내 손을 떠난 한 마리의 작은 새. 분노와 좌절감으로 어둠 속에서 신음하고 울며 살던 그 긴 세월.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고 준영은 차의 속도를 줄이다가 정지했다. 차 안의 작은 공간 속에서 둘은 서로 저마다의 생각에 잠기어 침묵했다. 파랑 불로 바뀌고 차가 출발하면서 철훈이 희미하게 자조를 띄우고 말했다.
    “수연은 네가 오늘 까지 결혼을 안 하고 독신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준영씨는 아직도 결혼을 안 하고 독신으로 살고 있다. 왜 그는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일까?  수연의 일기장에 그렇게 씌어져 있더군.”
    간신히 말을 마친 철훈은 참을 수 없는 기침을 터뜨렸다. 다급히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찾아 입을 막고 철훈은 자지러질 것처럼 한참 동안 기침을 해댔다. 하얀 손수건에 빨갛게 피가 묻어나왔다. 준영은 그것을 보고 긴장했다. 철훈이 피 묻은 손수건을 손에 들고 허탈한 얼굴로 앞을 내다보았다.
    “한 보름 전에 뉴욕에 있는 의사에게서 진단을 받았어. 폐암이라는군. 감기 기운이 떨어지지 않아서 왔다니까 아니라는 거야. 빨리 큰 병원에 가보라고 말하면서 심각한 상황이라고 했어.”
    폐암!  철훈이가!  준영은 갑자기 머릿속으로 피가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심장의 고동이 빨라졌다.
    철훈이 이야기하는 사이에 차는 집 앞에 도착했다. 준영은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의식하지 못하면서 습관적으로 버튼을 눌러 차고 문을 열고 널찍한 드라이브웨이로 들어서다가 멈추었다.
    폐암!  환자가 증세를 느낄 때는 이미 치료의 적기를 놓쳐버리게 되는 불치의 병. 자연과 생명의 법칙을 위반하고 미친 것처럼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퍼지고 또 죽어 없어질 줄 모르는 기형 세포의 군단 악성 종양.
    “그 의사는 또 다른 무슨 이야기를 하지 않았나?”
    빨라지는 숨결 사이로 준영이 물었다. 텅 빈 차고 안으로 헤드라이트의 불빛이 쏟아져 들어가고 있었다.
    “그 의사는 몹시 나쁜 상황이라고 했어. 작은 암세포가 폐 속에 많이 퍼져 있다고 했어.”
    소 세포 악성 종양 (SMALL CELL CARCINOMA). 순식간에 진행되고 혈액을 타고 온몸으로 전이되는 급성 폐암이다. 진단 후 생존 가능 기간 2 개월에서 6 개월. 며칠 전에 집도했던 환자도 이런 폐암이었다.
    준영은 아무 말 없이 후진 기어를 넣고 차를 뒤로 뺐다. 버튼을 눌러서 열었던 차고 문을 다시 닫았다.
    “철훈아. 내가 일하는 병원으로 가자. 내일까지 기다릴 수 없을 것 같아. 내가 더 검사를 해봐야 되겠다.”
    준영은 앤더슨 캔서 센터로 차를 몰았다.
    “고마워. 그런데 나는 돈도 없고 보험도 없어. 치료비를 어떻게 내야할지 모르겠어.”
    “그런 건 나중에 걱정해도 돼. 도무지 방법이 없으면 극빈자로 처리해서 무료 치료를 받게 할 수도 있어. 그런 건 일단 검사를 해보고 나서 걱정하자.”
    철훈의 눈이 두려움을 담고 애처롭게 매달리며 준영을 보다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준영아, 고마워. 날 좀 도와줘. 나는 무서워.”


    죽음. 그것은 무서운 것이다. 꿈을 가지고 정력적으로 움직이던 인간이 죽어서 소멸된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그리고 그 무서운 일이 어느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틀림없이 오게 된다는 사실은 더욱 무섭다. 어떠한 경우에도 어느 누구에게도 준비된 죽음이라는 것은 없다. 그것은 언제나 예고 없이 오게 되는 것이다. 볼티모어에서 밤을 새우며 공부하던 시절 한국에서 걸려왔던 뜻밖의 전화. 어머니의 교통사고로 인한 죽음. 준영은 그 충격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리고 그 공포의 방문객이 지금 철훈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준영은 철훈을 응급실에 입원시켰다. 응급실 담당 의사와 의논한 후 혈액 검사와 흉곽 엑스레이를 처방했다.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준영은 자기 사무실로 올라가서 가운을 꺼내 입고 근무자 관리 사무실에 전화해서 자기의 근무 상태를 비번에서 근무로 바꾸어 놓았다. 응급실 접수 사무실에 들러서 입원 수속에 필요한 서식 한 벌을 받아들고 준영은 철훈의 침대로 갔다.
    철훈의 팔목에는 환자 태그가 채워져 있고 손등에는 주사 바늘이 꽂혀 있었다. 혈액은 이미 채취해간 모양이었다.
    철훈은 침대에 누워서 공허한 눈으로 천정을 응시하고 있다가 준영을 보자,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거지?, 하고 눈으로 물었다.
    “편안하게 생각하고 좀 누워있어. 아마 최소한 며칠 동안은 이 병원에서 묵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야할 거야. 엑스레이와 혈액 검사 결과가 나오면 모든 것을 알 수 있어.”
    준영은 입원 수속 서류와 볼펜을 철훈에게 주었다.
    “시간 있을 때 이거나 써 놔. 보험에 대해서 물어보는 칸에는 없다고 쓰면 돼. 엑스레이는 찍어갔니?”
    “응. 기계를 가지고 와서 여기서 찍었어.”
    “됐어. 결과가 나왔는지 보고 올 테니까 잠시 기다리고 있어.”
    준영은 당직 의사의 사무실로 갔다. 그는 마침 방금 인화되어 배달되어온 엑스레이 필름을 벽에 부착된 형광판에 꽂고 보고 있었다.
    “준영씨, 마침 잘 오시는군요. 이걸 보십시오.”
    텍사스 토백이인 당직 의사는 심한 억양의 남부 사투리로 말하며 준영에게 엑스레이 필름을 가리켰다. 준영은 형광판 위에서 기괴한 명암을 그리며 빛을 받고 있는 엑스레이 필름을 보고 전율했다. 혹시나 하는 일말의 희망은 사라지고 그 필름은 뉴욕에서 받은 진단을 다만 확인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혈액 검사도 마찬가지였다. 철훈의 몸속에서는 무서운 속도로 전이되고 있는 공격적인 소세포 악성 종양이 잔인하게 그의 종말을 재촉하고 있었다.
    준영은 굳은 얼굴로 밖으로 나왔다. 지금까지 수백 번에 걸쳐서 이런 상황을 경험했다. 암전문의로써 준영은 베테랑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의사로써 뿐만이 아니고 가족으로써의 역할도 동시에 해내야하는 것이다. 준영은 다시 철훈의 응급실 침대로 갔다.
    철훈은 혼미한 상태로 잠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준영은 잠시 서서 처참한 심정으로 내려다보다가 가만히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철훈이 힘없이 눈을 떴다. 피로하고 빛이 없는 눈이 준영을 잠시 응시했다.
    “어때?”
    철훈이 쿨렁쿨렁 기침 사이로 힘없는 목소리를 짜내어 물었다.
    “상태가 좀 나쁜 편이야. 내가 방을 바꿔주겠어. 이 응급실에서 나와서 입원실로 옮기는 거야. 아무래도 며칠 더 머물면서 좀 더 자세한 검사를 해보고 싶어.”
    철훈이 준영의 손을 찾아서 잡고 떨며 힘을 주었다.
    “준영아.”
    “응?”
    “병이 심한 모양이지?”
    “...................”
    “나, 그냥 죽게 내버려두면 안 돼.”
    “알았어.”
    힘없는 눈으로 매달리며 자기를 보고 있는 철훈의 눈을 감당할 길이 없어서 준영은 외면했다.
    “네 처도 네 몸에 대해서 알고 있니?”
    “응, 뉴욕에서 의사에게 같이 갔었어.”
    “집 전화번호를 줘. 전화해서 네가 여기 와 있다는 것을 알려 주겠어.”  
    철훈은 준영에게 전화번호를 말해주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몰라. 이런 상황 속에서 내가 찾을 사람은 너 밖에 없으니까.”
    준영은 전화번호를 적어들고 철훈의 손을 한 번 쥐어준 후 응급실을 나왔다. 자기 사무실로 가서 의자에 앉아 손목시계를 보았다. 밤 10시 20분. 뉴욕 시각은 11시 20분이리라. 잠시 어쩔까 망설이다가 준영은 전화기를 들고 철훈의 집 전화번호를 눌렀다.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째 벨이 울리자 마침내 딸깍, 저쪽에서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거의 십오 년 만에 듣는 목소리였지만 그것이 수연이라는 것을 준영은 대번에 알아낼 수 있었다. 그는 갑자기 맥박이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면서 바보가 된 것처럼 당황스럽게 할 말을 찾으려고 애썼다.
    “나, 준영입니다.”
    전화기의 저쪽에서는 갑자기 침묵이 흘렀다.
    “철훈이가 저를 찾아왔군요. 위독한 상황입니다. 아무래도 여기에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침묵의 끝에 수연의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말했다.
    “가겠어요.”
    준영은 수연에게 자기의 집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아침에 출근한 재클린은 준영이 사무실의 의자에 앉아서 가운을 입은 채로 웅크리고 잠들어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야간 근무를 한 간호사 한명이 지나가다가 그녀를 보고 어젯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재클린은 측은한 표정으로 준영을 보다가 그의 사무실 문을 소리 안 나게 닫아주었다. 그리고는 간호사가 알려준 대로 입원실로 옮겨진 철훈의 병실로 들어가서 준영 대신에 환자의 병세를 확인했다. 환자는 혼수상태 속에서 아직은 기계의 도움 없이 혼자서 숨을 쉬고 있었다. 그러나 심장 박동은 위험할 정도로 약했다. 이대로 간다면 불과 며칠 가지 않아서 인공호흡기를 부착해야 생명이 연장될지도 모른다.
    재클린은 담당 병실들을 한 바퀴 순회하고 내려와서 다시 준영의 사무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보았다. 준영은 아까처럼 의자에 앉은 상태로 잠에서 깨어서 멍한 얼굴로 허공을 보고 있었다.
    “들어가도 될까요?”
    재클린이 물었다. 준영이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재클린이 들어와서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누구죠?  이 환자는?”
    준영은 잠에서 미처 깨어나지 않은 눈으로 허공을 한참이나 응시하다가 대답했다.
    “친구입니다. 가장 친한 친구.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같이 다닌 친구입니다.”
    재클린이 깊은 눈으로 준영을 보았다. 그리고 주저하다가 물었다.
    “준영씨의 걸후렌드와 결혼한 친구 인가요?”
    언제인가 준영은 재클린과 같이 앉아서 서로가 가지고 있는 과거의 사랑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재클린은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준영이 고개를 끄덕여서 긍정했다. 재클린은 잠시 생각하다가 걸터앉았던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준영씨, 그 환자는 내가 수시로 점검하고 있을 테니까 집에 가서 한숨 자고 오세요. 아주 지쳐 보이는군요.”
    준영이 피곤한 몸을 의자에서 힘들여 일으켰다. 온몸이 나무토막 같이 느껴졌다.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아서 준영은 책상 모서리를 잡고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괜찮아요?”
    재클린이 얼른 와서 준영의 팔을 잡아 부축했다. 준영을 보는 재클린의 눈에는 깊은 연민이 어려 있었다.
    “네, 괜찮습니다. 재클린 말처럼 저는 지금 집에 가고 싶습니다. 집에 가서 좀 쉬고 싶습니다.”
    “그래요. 그 환자는 제가 잘 돌보겠어요. 걱정 말고 집에 가세요.”
    “재클린. 고맙습니다.”
    준영의 팔을 잡아주는 재클린의 손에 힘이 주어졌다. 그 재클린의 손에서는 따뜻한 체온이 전해져 왔다. 헝클어진 뒷머리를 보이며 방을 힘없이 나서는 준영을 재클린의 정어린 눈이 지켜보고 있었다.


    철훈은 한사코 마다하는 준영을 거의 팔을 끌다시피 하며 그의 집 근처 허술한 다방으로 데리고 나와서 같이 앉았다. 준영이 볼티모어의 죤스 홉킨스 의과 대학에 편입학이 확정되어 떠나기 며칠 전이었다.
    “변명을 하자는 것이 아니야. 그러나 분명히 네게 알려두어야 할 필요가 있는 일이기에 변명이 아닌 설명을 하기로 결심했어.”
    한참을 준영의 눈길을 피해서 탁자만 내려다보며 앉아있던 철훈이 마침내 용기를 내어 준영을 보며 입을 열었다.
    “물론 당사자인 나에게 모든 최종 책임이 있다. 말할 것도 없어. 그러나 수연과의 결혼에는 나의 의사보다는 아버지의 완강한 고집이 더 작용했다는 것을 나는 너에게 말해두고 싶다. 아버지는 그 결혼이 성사되지 않으면 재산 상속도 보류해 놓겠다고 압박을 했어. 지나놓고 보니까 아버지는 또 아버지 나름대로 당신 스스로의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어.”
    적의를 감추기 위해서 애쓰던 준영의 눈이 괴로움으로 파문을 일으켰다.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뭐지?  이제 모든 것을 잊고 떠나려고 하는 나를 마지막 순간까지 괴롭히겠다는 뜻인가?”
    철훈의 얼굴이 번민으로 이지러졌다.
    “준영아. 나를 용서해줘. 내가 비겁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어.”
    괴로운 얼굴로 철훈은 담배를 빼어 물고 불을 붙였다. 긴 한 모금의 연기가 폐 속으로 들어갔다가 한숨처럼 철훈의 입을 통해서 빠져 나왔다. 철훈은 무엇인가 더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 것 같아 보였지만 입을 열지 못하고 몹시 주저했다. 준영은 그런 철훈을 뒤에 남겨두고 싸늘한 뒷모습을 보이며 자리를 떠버리고 말았다.
    준영이 출국하는 날 철훈은 차를 몰고 와서 집 앞에서 기다렸다.  어머니와 작별하고 준영이 대문을 나서자 철훈은 머뭇거리다가 다가갔다.
    “준영아, 마다하지 말아 줘. 널 내가 언제 또 보게 되겠니?  지금은 어찌 되었건 우리는 가장 친한 친구였지 않아?”
    철훈은 준영의 트렁크를 빼앗아 차에 싣고 문을 열어주었다. 준영은 잠시 주저하다가 떨어진 곳에서 근심스런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어머니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아무 말 없이 차에 올랐다.
    차가 공항에 도착할 때 까지 준영은 한사코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철훈은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어 했지만 준영의 차가운 침묵의 벽에 막혀서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공항 터미널 앞에 도착했을 때 준영은 짤막하게 작별 인사를 남긴 후 트렁크를 꺼내 들고 총총히 안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 뒷모습을 안타깝게 눈으로 쫓으면서 철훈은 아버지를 원망하고 못난 스스로를 저주했다.
    준영아. 네가 내 마음을 알면 너는 나를 미워하지 않을 거야. 아니, 아마 너는 나를 동정하면서 나의 어깨를 끌어안고 같이 울어줄 수 있을지도 몰라. 일이 이렇게 될 줄을 나는 모르고 있었어. 정말이야.
    철훈은 준영이 밀고 들어간 유리문을 한참이나 초점 잃은 눈으로 보고 있다가 얼굴을 떨어뜨리고 돌아섰다.


    찜통같이 뜨거운 도장 안에서 무릎 꿇고 앉아 준영과 재클린은 참선하는 자세로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있었다. 준영은 온몸으로 더운 물처럼 쏟아져 내리는 땀을 흐르는 대로 놓아두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반대쪽에 마주보며 앉은 재클린도 땀투성이가 된 얼굴을 씻을 생각도 없이 몰아의 경지 속으로 침잠해 있었다.
    역시 눈을 감고 정신을 한 가닥으로 집중시킨 독고 관장이 북을 앞에 놓고 한참 만에 한 번씩 조용히 그리고 부드럽게 두드렸다.
    둥.
    둥.
    둥.
    풀잎 스치는 소리도 귀에 거슬릴 것 같은 적막 속에서 이따금 울려오는 북소리가 현실을 떠난 신비한 다른 세계를 만들었다.
    철훈의 병세는 마치 빠져나오지 못할 수렁 속으로 천천히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처럼 돌이킬 수 없이 나빠지고 있었다. 정맥 주사로 몸에 투여하고 있는 키모테라피 액의 부작용도 철훈의 몸에 마지막 남아 있는 가냘픈 생명력을 빼앗아 더 힘없이 만들고 있었다. 모든 검사의 결과를 종합해 보았을 때 이미 수술의 시기는 놓쳤다. 내일부터는 방사능 치료를 처방해볼 생각이다. 그것이 질병의 치료에 도움이 안 된다 하더라도 그냥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지 않은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철훈은 길게 예정해도 수 개 월 안에 그 가공할 속도로 자라서 퍼져 나가고 있는 기형 세포의 공격에 무너져야 한다.
    둥.
    둥.
    둥.
    우리 모두가 이렇게 힘없이 가고 말 허망한 미물일진대 어찌 그렇게 욕심을 부리고 살았더라는 말인가.
    검 끝을 마주 대고 상대방의 공격과 방어의 길을 마음으로 읽어 터득하며 오랫동안 같이 훈련해온 재클린이 이번에도 마치 준영의 생각을 읽은 듯 머리터럭도 움직이지 않는 자세로 앉아서 눈을 감고 마음으로 화답하고 있었다.
    우리 모두 자기 몫의 짐을 지고 홀로 가고 있는 외로운 길손들입니다. 벗어버리고 싶지만 뒤집어쓰고 숨어 있는 딱딱한 껍질 속에서 나오기가 무섭습니다. 나의 가장 사랑하던 남편이 내 친구와 내 침대에서 정사를 벌리고 있는 장면을 보았을 때 세상이 모두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마치 못 본 것처럼 문을 닫고 나와서 텅 빈 마음으로 밤길을 걸으면서 나는 문득 내가 갈 곳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요. 우리들은 자기 몫의 짐을 지고 모두 홀로 가고 있습니다. 모두가 모두에게서 소외되어 혼자서 가면서 자기 속으로, 속으로만 들어가서 숨어 살고 있는 것입니다. 껍질을 뒤집어쓰고 살면서 남이 건드리면 또 다칠까봐 겁나서 죽은척하는 딱정벌레입니다.
    둥.
    둥.
    둥.
    독고 관장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뚝! 하고 마룻바닥에 떨어졌다.
    둥, 둥, 둥.
    북소리가 빨라지다가 다시 잦아들더니 언제인지 모르게 멈추고 정적이 시작되었다. 독고 관장이 조용히 일어나고 준영과 재클린도 따라 일어나서 셋은 옷깃을 여미고 서로에게 예를 표했다.


    재클린의 도움과 준영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철훈의 병세는 시시각각으로 위태로워져갔다. 재클린은 앤더슨 캔서 센터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며 항상 조용하면서도 자신만만하던 닥터 김준영이 자기 페이스를 잃고 그렇게 초조한 모습으로 병실을 오가는 것을 처음 보았다. 더구나 그렇게 사랑하던 걸후렌드를 앗아간 사람이라면서 어찌 그렇게 애써줄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이 검도 도장에서 배우고 있는 동양인의 용서와 사랑의 철학과 같은 것인가?  재클린은 자기 몸의 반쪽에 흐르고 있는 동양인의 피에 대해서 이해하려고 무척 애썼다.
    검도장의 독고 관장이 말했었다. 증오심과 미움을 가지고 힘으로 내려치는 검은 목표를 맞출 수 없다. 항상 경외심을 품고 마지막 순간에도 상대방에 대해서 존경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검은 최후의 순간까지 아꼈다가 도무지 피할 수 없는 최종의 수일 때에야 비로소 쓰는 것이다. 어떠한 방법이건 검을 안 쓰고 해결하는 길이 보이면 주저 없이 그 길을 택하라. 검을 안 쓰는 해결책은 검을 써서 얻는 결과보다는 항상 우위에 있는 것이다. 관대하게 용서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은 나를 더 높은 경지로 끌어 올릴 수 있는 첩경이다.
    준영은 그래서 정면 파괴보다는 우회의 길을 택했던 것은 아닐까?  재클린은 궁금했다.
    오후 근무에 출근하여 마악 가운으로 갈아입고 나오던 재클린이 복도 저쪽에 등을 보이고 서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준영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준영씨.”
    지친 모습으로 등을 보이며 창밖을 내다보던 준영이 돌아보았다. 항상 단정하고 빈틈없던 그의 머리가 어지럽게 헝클어져 있었다. 창밖 정원에는 잘 손질된 나무와 화초들이 찬란한 햇빛 아래 싱그럽게 생명을 노래하고 있었다. 돌아보며 억지로 미소 짓는 준영에게서 재클린은 한없는 인간미를 느꼈다. 작은 아기처럼 보듬고 다독거리면서 사랑하고 위로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준영이 다시 창밖으로 눈을 주고 패배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일생을 바쳐 공부한 것이 암세포인데 죽음을 앞에 둔 친구에게 아무 것도 해줄 것이 없습니다.”
    재클린의 손이 위로하듯 준영의 어깨에 가 닿았다.
    “우리는 의사일 뿐이에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학 지식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 나머지는 하느님이 하실 일입니다.”
    “아집과 욕심을 가지고 산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우스운 노릇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어제까지 건강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이던 사람이 마치 러시안 룰렛을 하듯 갑자기 죽어 없어지는 것을 저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미처 죽음을 준비할 사이도 없이 말입니다.”
    “그것은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일일 거예요. 그리고 모든 준비는 다 할 수 있어도 죽음을 채비할 수 있는 혜안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창밖에는 살짝 스쳐 지나가며 불어온 바람에 나뭇잎들이 흔들리며 거기 부딪쳐 오는 햇살이 보석처럼 찬란하게 부서져 쏟아졌다. 재클린의 따뜻한 체온이 준영의 어깨에 닿아 있는 손을 통하여 전해져왔다. 갑자기 죽음과 함께 나타난 철훈과 그로 인해 되살아나고 있는 과거의 아픈 추억 속에서 준영은 당황스럽게 길을 잃고 있었다. 재클린의 손길은 그런 준영의 마음속에 어릴 때 어머니 손길이 그랬던 것처럼 아늑한 안도감을 심어주고 있었다.


    준영은 해가 지고 사위가 완전히 어두워진 후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 집은 마치 오랜만에 돌아온 것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차를 회전하여 드라이브웨이로 들어서면서 습관적으로 차 천정에 붙어있는 버튼을 눌러서 차고 문을 열었다. 휘익 돌아가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에 언뜻 들어왔다가 다시 어두워진 현관 계단에는 누군가가 앉아 있는 것 같았다. 흠칫하며 준영은 차를 차고에 넣고 급히 나와서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트렁크를 옆에 놓고 계단에 여자가 앉아 있다가 준영을 올려다보았다. 다가가던 준영의 발이 우뚝 멎었다.
    “수연!”
    여자는 앉은 자세에서 움직이지 않으며 준영을 올려다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저예요.”
    “아니, 언제 ......”
    말하다말고 준영은 급히 열쇠를 찾아서 현관문을 열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몹시 어색한 순간이었다. 한 때는 그렇게 사랑했고 그렇게 가깝게 모든 것을 나누었지만 이제는 남의 아내가 된 여자.
    “어서 들어오십시오. 이렇게 더운데 밖에 앉아 있다니.”
    수연의 트렁크를 들어서 현관 안으로 옮겨 놓으며 준영은 수연을 위해서 문을 잡아 주었다. 수연이 주저하면서 집안으로 들어갔다. 찌는 듯이 더운 바깥 날씨에 비하면 냉방이 잘된 넓은 집안은 더할 수 없이 쾌적했다. 시간제로 와서 일하는 하우스 메이드가 청소하고 정돈해 놓은 집안은 구석구석 까지 깔끔했다. 준영은 현관문을 닫고 수연을 안내해서 거실의 소파에 앉게 했다. 냉장고 문을 열고 쉽게 손닿는 곳에 있는 딸기 주스의 병을 들어 한 컵 따랐다.
    조용히 허공을 보며 앉아 있는 수연의 볼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준영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앞에 주스 컵을 밀어놓았다. 무겁게 짓눌러오는 침묵을 견딜 수 없어서 준영은 일어나 차고로 가서 버튼을 눌러 차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잠시 서서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다가 다시 거실로 돌아와 수연과는 거리가 떨어진 곳의 소파에 앉았다. 또 무겁게 가라앉은 침묵이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
    이윽고 수연이 조용한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
    “이렇게 초라한 몰골로 찾아와서 준영씨하고 같이 앉아 있기가 무척 부담스럽습니다. 죄스러운 생각뿐입니다.”
    준영은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연이 다시 말했다.
    “그렇게 많은 세월이 흘러버린 후에도 모든 것이 다 잊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살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긴 세월이 흘렀지만 수연의 그 빼어난 용모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한 때 그렇게 생명력이 넘치고 물고기처럼 싱싱했던 그녀에게서는 더 이상 활기와 발랄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세월의 흐름에서 오는 변화와는 또 다른 변화였다. 항상 웃고 있던 얼굴에는 오랫동안 겹쌓인 근심과 슬픔이 어둡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준영은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외롭게 가고 있는 또 하나의 사람을 보고 있었다. 무한히 행복하고자 했고, 또 행복할 수 있었던 사이였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되어 있죠?”
    허공에서 눈을 돌려 수연은 젖은 눈으로 준영을 보았다.
    “제가 일하는 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상태가 몹시 안 좋습니다.”        
    “얼마나 안 좋은가요?”
    준영은 수연의 시선을 느끼고 눈을 내리깐 채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준영을 보던 수연의 눈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렇군요. 뉴욕의 의사가 한 말이 맞는 모양이군요. 저에게 몇 개월 가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수연이 눈물이 마르지 않은 얼굴로 참담하게 말했다.
     “이렇게 될 때 까지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고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단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먼데서 앰뷸런스인지 경찰차인지가 경적을 울리면서 달려서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졌다.
    “그 사람은 결혼 한지 얼마 후 시아버님에게서 재산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리고 준영씨가 미국으로 떠나신 후부터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방탕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도박과 타고난 바람기로 집에서 자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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