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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피아노의 고백

2011.09.16 01:09

윤석훈 조회 수:628 추천:55

해구海丘의 고정석에
십수년 앉아있는
늙은 고래입니다
오랜 동안 노래할 기회 없어
이제는 목청을 쓸 수가 없군요
뿐만 아니라
헤엄쳐 다닐 수도 없는
노쇠한 고래입니다
움직일 수 없으니
딱딱한 뭍에 있는 것처럼
몸을 이어주는 모든 관절에
바닷물이 가득합니다
처음엔 나만 그런 줄 알았습니만
해일이 몹시 치던 날
동네의 물들이 다 육지로 나가고 없던 날
비슷한 처지의 바다 동물들만
늙은 몸들 이끌고 건너와
뿌리내리고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 중 내 젊은 시절 잃어버린 줄 알았던
그를 발견한 건ㅡ아주 운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의 지느러미에는 다른 바다에서 묻어온
해초들이 자라고 있었지요
지느러미에는 해초들이 모아온
수평선 너머의 세상 이야기들로 가득찼습니다
윤기 잃은 살갗에
오래된 간지럼도 태우고
찌든 파도의 숨결을 뿜어보았습니다만
그의 입술은 너무나 조용하였습니다
오늘 나는 꿈틀거리며
입술을 움직여 보았습니다
말을 할 수 없어 답답하지만
잃었던 언어가 조금씩 생각이 나면서
그에게로 다가갔습니다
오랜 여행에 지친 진중한 그의 지느러미에서
쇳피리 소리가 날때
나의 숨통은 음표로 가득하였습니다
바다의 표면으로 뛰어올라
한번씩 숨을 쉴 수 있으니
이제는 관절에도 피부에도
윤기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살아갈 이유가 조금씩 생기는
늙은 고래가 되었습니다
그의 부드러운 지느러미와 가슴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는 생명이 되어가는 것이지요
그러던 그가 떠났습니다
담 결린 바다의 등뼈를 펴기 위해 말이지요
만났다가 헤어지는 것이
또 다시 기다릴 무언가가 새로 생긴다는 것도
시간을 죽이는 우리에게는 필요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잊을 만큼 잠을 자다가 깨었습니다
누군가가 소리쳤습니다 쉿!
모두들 조용히 하세요
나를 달구었던
낮 익은 손가락이었습니다
그가 포옹합니다 키스를 합니다
뭍에서 구해온
한모금의 위스키가 나의 등에 흐릅니다
그의 불콰한 손가락이 나를
달굽니다 오랜만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정물처럼 고요해야 했습니다
꼬집지 말아요
새벽 희끄므레 살아나는 늙은 피아노의
바다 기슭에 닿는 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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