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당선작/ 착한 갱 아가씨....신정순

by 관리자 posted Jul 24,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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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당선작/ 착한 갱 아가씨....신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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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 신춘문예



“헤이! 미쓰 민 갱 (치사한 갱 아가씨!)”

민이는 자기를 놀리는 소리에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새카만 눈썹에 낯빛이 유난히 가무잡잡한 인디언 남자 아이 캐밥이었다. 미국 학교에 온 후론 강민이의 이름을 한두 번 놀려먹지 않은 아이들이 거의 없었지만 캐밥은 그중, 단연 으뜸이었다.

“너, 바-방금 뭐-뭐라 그랬어?”

왜 이럴 때는 영어가 더 더욱 더듬거려지는지 모르겠다.

“왜? 떫어? ‘민 갱’을 ‘민 갱’이라고 부른 게 뭐 잘못 됐어? 자, 이거 필요하지?”

캐밥은 약이 오를 대로 오른 민이의 눈앞에다 총이 그려진 종이를 휙 던지고는 돌아섰다. 그리고는 단숨에 다른 남자아이들이 놀고 있는 농구대 쪽으로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나쁜 자식!”

민이는 총 그림이 그려진 종이를 손으로 잘게 잘게 찢으면서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강민이. 한글로는 얼마나 예쁜 이름인가? 그런데 미국에 와서는 그야말로 빼도 박도 못하게끔 ‘치사한 깡패’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으니...... 아무리 자기 이름이 ‘갱’이 아니고 ‘강’이라고 해도 미국 아이들 중에 아무도 ‘강’이라고 발음해 주는 아이는 없었다. 선생님들조차 ‘갱’이라고 발음하였다. 영어 단어에는 그런 발음이 없기 때문이었다.

민이는 미국 아이들이 무리지어 운동장에서 뛰어 노는 시간에 혼자 붉디 붉은 단풍 나무 쪽으로 다가갔다. 단풍 나무 아래에는 푸른 색 페인트가 칠해진 벤치가 놓여 있었지만 아무도 그 자리에 앉지 않았다. 남자아이들은 남자아이들대로 축구나 야구를 하느라 바빴고 여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대로 구름다리나 미끄럼틀

주위에서 뛰어 노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민이는 혼자서 긴 나무 벤치에 앉았다.

엄마는 언제쯤 다시 건강하게 되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실바람이 한 줄기 불어 왔다. 단풍 이파리 하나가 휘릭, 하고 민이의 치마 위로 떨어졌다. 붉은 색깔이 참 고왔다. 한국에 있을 때 친구들과 단풍잎을 모아다 책갈피에 끼어 두던 생각이 났다. 하지만 민이는 한국에서처럼 나뭇잎을 줍거나 하진 않았다. 미국 학교로 온 후, 민이는 아주 많이 슬펐던 것이다.

민이가 미국으로 이사온 것은 순전히 엄마가 아프셨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심장이 무척 약하셨기 때문에 함부로 수술을 하실 수도 없었다. 그래서 심장학이 가장 많이 발달된 미국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엄마가 치료를 받는데 왜 초등학교 삼 학년밖에 안되는 민이가 따라 왔냐고? 엄마의 병은 마음 상태가 아주 평안해야 빨리 치료가 된다는 의사의 말에 민이의 아빠는 온 가족이 함께 미국에 가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민이는 이따금 자기 혼자서라도 한국에 돌아가 할머니 댁에서 살면 어떤가, 궁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자기가 무척 나쁜 아이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민이의 엄마는 민이가 곁에 없으면 한 시도 마음 편해 하시지 않을 분이라는 걸 그 누구보다도 민이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따르르릉......

운동장에서 노는 시간이 끝나고 오후 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아이들이 와와, 소리를 지르며 실내로 들어가기 위해 유리 문 앞에 줄을 섰다. 쉬는 시간이 끝난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영어로 떠들어야 하는 수업 시간보다도 더 곤욕스러운 건, 운동장에서 외롭게 혼자, 나무 의자에 앉아 있어야 하는 쉬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오후 수업 첫째 시간은 영어 시간이었다. 라쓰젠베론스키 선생님은 어제 가르치시던 각운 학습을 계속하셨다.

선생님이

“캐애트! (Cat!)”

하면,

아이들이

“매애트!(Mat!)”

하고,

선생님이

“레인! (Rain!)”

하면,

아이들이

“브레인! (Brain!)”

하고 대답하는 시간이었다.

“잘 했어요. 자, 그럼 이번엔, 다들 자유롭게 자기가 좋아하는 각운을 만들어 발표하기로 하죠.”

선생님은 차례로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나갔다. 엘리, 배?, 밥, 제니, 죠우.....

드디어 캐밥의 차례가 되었다.

“자, 캐밥. 어떤 운자를 만들었나요?”

“민 갱, 진 갱 (mean gang, gene gang: 치사한 갱, 유전적인 갱)!”

아이들이 왁,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선생님이 탕탕 책으로 교탁을 내리치는 바람에 왁자하던 웃음소리는 잔잔해졌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목구멍으로 삐적 삐적 기어 나오는 웃음소리만은 어쩌지 못하겠다는 듯 여기저기서 간간이 쥐 우는 소리가 들렸다.

민이는 참으려 했다. 만약 여기서 내가 운다면 캐밥 녀석에게 지는 거야.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자기에게 집중되는 것을 느끼며 민이는 울음을 참으려고 가쁘게 숨을 몰아 쉬었다. 갑자기 민이는 자기가 아주 먼 나라, 고국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낯선 나라에 와 있다는 사실이 더없이 불행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엄마가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모습이 언뜻 눈 앞에 보이는 듯도 했다. 민이는 그만 와왕, 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담임 선생님은 캐밥과 민이를 교실 구석 칸막이 뒤로 데리고 가셨다.

선생님은 캐밥에겐 반성문을 쓰도록 하고 민이에게는 반 아이들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내미셨다. 그리고는 아이들의 영어 이름이 한국말로는 무슨 뜻이 되는가를 종이에 적어 보라고 하셨다. 캐밥 녀석은 힐끔 힐끔 민이의 종이를 훔쳐 보았다. 자기가 써야 할 반성문보다 선생님이 민이에게 내 준 과제에 더 관심이 많다는 듯이.

캐밥은 반성문을 선생님께 제출하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민이도 발표 준비가 다 되었다는 것을 알리려고 칸막이 뒤에서 나와 교단 쪽으로 걸어 나왔다. 아이들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민이를 쳐다보았다.

“자, 그럼 지금부터 민이가 여러분의 이름이 한국말로는 어떤 뜻이 있는지 알려주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어요. 자, 그럼, 에이(A)부터 시작하죠.”

민이는 반 아이들의 영어 이름을 한글로 풀이한 종이를 두 손에 펼쳐 들었다. 민이는 웃음부터 쿡, 나왔다.

“엘리 콜리 (Alli Coli). 아주 똑같진 않지만 한국말에 ‘얼라리 꼴라리’ 라고 남을 놀리는 말이 있는데......”

아이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툭하면 캐밥과 어울려 민이를 놀리던 빨간 머리 엘리의 얼굴이 삽시간에 홍당무가 되었다. 민이는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선생님은 한 쪽 눈을 찡긋해 보이시더니 미소를 지으셨다. 계속 진행하라는 뜻이었다.

“배? 티이 (Balkoff T.)......”

민이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머리에 하늘색 리본을 단 배?을 쳐다보았다. 배?은 민이와 눈이 마주치자 불안한 듯 얼른 고개를 숙였다.

배? 티이는 두말 할 것도 없이 한국말로는 ‘배꼽 티’다. 민이는 종이에 적어 놓은 대로 읽을까 하다가 두 눈을 깜박거렸다. 배꼽 티 말고 다른 뜻은 없을까? 배?은 그챦아도 늘 수줍고 말이 없는 아이이기도 하고 처음부터 민이를 놀리지 않은 몇 안 되는 아이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민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손가락을 깨물었다. 그러다가 입가에 웃음을 머금으며 입술을 열었다.

“백합 차! ‘백합으로 만든 향기로운 차’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배?은 기쁘다는 듯이 가뜩이나 커다란 눈동자를 상하 좌우로 돌리더니 활짝 핀 백합처럼 입을 크게 벌리며 민이를 쳐다 보았다. 민이도 배콥에게 미소를 보냈다.

드디어 캐밥의 차례가 되었다. 민이는 종이를 한 번 내려다 보고는 크게 숨을 몰아 쉬었다. 드디어 복수의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민이는 종이에 적힌 한글을 뚫어지게 바라 보았다. 아이들은 캐밥이 한국말로는 보나마나 나쁜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나 있다는 듯이, 곧 다가올 폭소 터뜨릴 시간에 맞추기 위해 준비라도 하고 있기라도 한다는 듯이 진작부터 손으로 입술을 가리며 터지려는 웃음을 참고 있었다. 딸꾹, 여기 저기서 목젖으로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였다.

드디어 민이가 입을 열었다.

“캐밥 와타 (Kaebob Whata). 한국말로는......”

아! 그때 마침,

따르릉......

종이 울렸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었다.

캐밥은 여느 때처럼 아이들과 떠들지도 않고 비실비실 민이에게 다가오더니 머리를 긁적였다.

“...... 저어..... 내 이름...... 무슨 뜻이야? 지금 말해 주면 안돼.....?”

“좀 있으면 알게 될텐데 왜 지금 알려고 그래?”

민이는 승리의 패를 걸머진 전사처럼 또록또록한 목소리로 말했다. 평소와는 달리 영어가 술술술, 실수도 없이 잘도 나왔다.

“좋은 뜻...... 아니지?”

캐밥은 겁먹은 자라처럼 아래턱을 목 쪽으로 잔뜩 끌어당긴 채 물었다.

“글쎄에...... 좋은 뜻인지 나쁜 뜻인지 잠시 후면 알게 될 거야.”

민이는 평소와는 다르게 거만하게 대답했다. 캐밥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자기 책상 쪽으로 몇 발자국을 옮겼다. 그러더니 다시 돌아서서 민이에게 다가오더니 풀이 잔뜩 죽은 목소리로 이런 말을 했다.

“내 이름이 한국말로 무슨 뜻인지 알고 있어....."

“......?”

민이는 깜짝 놀라 입술을 벌린 채 잠시 다물질 못 했다.

캐밥이 무슨 수로 자기 이름의 한국말 뜻을 알고 있을까?

캐밥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동안 네 이름 가지고 놀렸던 거 미안해...... 그때 그 한국 녀석이 우리 엄마만 울리지 않았어도 내가 너한테 그렇게 심하겐 안 했을텐데...... 나, 지금...... 거짓말하는 거 아냐......”

이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그때 그 한국 녀석? 우리 엄마만 울리지 않았어도? 민이는 캐밥이 무슨 소릴 하는 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캐밥은 정말 잘못한 것을 뉘우친다는 듯이 고개를 푹 수그리는데 교실 바닥으로 눈물이 몇 방울 투둑, 하고 떨어졌다.

어림도 없지! 네가 암만 반성하는 척 해 봐라. 이번이 너에게 복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횐데 왜 내가 그런 기회를 놓치겠어?

민이는 캐밥에게서 단호하게 고개를 돌렸다.

따르릉......

수업을 시작하는 종이 다시 울렸다. 민이는 선생님 옆에 서서 종이를 펼쳤다.

“캐밥!”

아이들은 모두 긴장한 눈빛으로 민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민이는 종이에 적힌 캐밥에 대한 설명을 눈으로 읽어보았다. 캐밥은 ‘개밥’이란 뜻이 있다고 설명을 할 참이었다.

“한국말로 캐밥은......”

민이는 가슴을 뿌듯하게 앞으로 내밀고 승자의 웃음을 띄었다. 그리고 캐밥을 쳐다보았다.

“캐밥은......”

그런데 그 다음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핏기가 가신 캐밥의 얼굴에서 어딘가 낯익은 표정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엄마 따라 병원에 갈 때마다 수술실 앞, 대기실에 서성거리고 있던 환자 가족들의 표정. 수술실 문을 열고 나오는 의사에게 결과가 어떻습니까, 묻고는 그 대답을 기다릴 때의 가족들의 표정. 바로 그 표정이 캐밥의 얼굴에 어려있었던 것이다. 만약, 수술이 잘못 되었어요, 라고 의사가 말한다면 낙심천만하여 곧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을 것 같은 그런 불안하기 짝이 없던 표정들......

“캐밥은......”

민이는 고개를 몇 번 좌우로 흔들었다. 안 돼. 그런 얄팍한 동정심 때문에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순 없어. 민이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다시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입술을 열었다.

“캐밥은...... 한국말로는......”

민이는 다시 한 번 캐밥을 쳐다 보았다. 민이의 눈과 똑바로 마주치자, 캐밥은 모든 것을 포기했다는 듯이 아예 고개를 아래로 푹 수그렸다.

“한국말로는...... 아-아무 뜻도 없어......”

자기 생각과는 전혀 다른 말이 입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잔뜩 웃음을 기대했던 아이들이 아아......., 실망에 젖은 한숨을 포옥 내리쉬고 있었다. 민이 역시 허탈감에 다리가 휘청거렸다.

아이들의 이름을 다 말하고 나자 선생님이 다가와 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민이는 천천히 자기 자리로 되돌아 갔다. 캐밥이 민이를 쳐다보며 뭐라고 눈짓하는 것 같았으나 민이는 그냥 얼굴을 굳힌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자기가 너무 마음 약하게 군 것에 스스로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

“자, 오늘 아주 특별한 시간을 가졌는데...... 여러분들 어떤 느낌이 들었어요? 선생님은 여러분들이 민이를 놀릴 때마다 가슴이 무척 아팠어요. 물론 내가 민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기 때문에도 그렇지만 선생님 역시 어렸을 때 그 비슷한 경우를 당했기 때문이예요.”

민이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선생님은 민이의 눈을 유심히 쳐다보시며 말을 이으셨다.

“선생님의 고향은 러시아예요. 정치 망명을 떠나 온 아빠를 따라 처음 미국으로 이민 왔을 때 이름 때문에 얼마나 놀림을 많이 당했는지 몰라요. 여기, 민이가 겪은 것보다는 덜 했는지 모르지만. 자, 선생님 이름이 뭐죠? 다같이 말해 보세요.”

“미스 라쓰젠베론스키.”

아이들은 다같이 입을 맞추어 대답했다.

“맞아요. 라쓰젠베론스키. 선생님의 이름은 결코 쉬운 이름이 아니에요. 지금, 여러분은 내 이름을 모두 똑바로 발음해 주었지만 옛날 선생님이 어렸을 때 내 친구들은 그렇게 불러주지 않았어요. 발음이 어렵다고 ‘라젠스키’나 ‘로젠스키’로 부르는 건 예사고 ‘라스베가스’로 부르는 애도 있었고...... 심지어 ‘슬로우 스키 (느리게 달리는 스키)’라고도 불렀어요.”

“슬로우 스키요?”

아이들이 일제히 웃음을 와악하고 터뜨렸다. 선생님도 따라 웃으셨다.

“그래요. 지금은 나도 웃을 수 있지만 그 당시 나로선 내 이름이 놀림감이 될 때마다 바보가 된 것 같아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인지 여러분이 민이를 놀릴 때마다 선생님은 가슴이 아주 많이 아팠어요. 자, 이번에는, 여러분의 이름도 한국식으로 발음하면 아주 웃기는 이름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았죠? 그러니까 앞으론 민이의 이름을 가지고 놀리는 일이 없도록 하세요. 알겠죠?”

“네!”

아이들의 목소리는 우렁차게 교실을 울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캐밥은 비어 있던 민이의 옆자리로 건너 왔다.

“내 이름, 한국말로 ‘개밥’이란 뜻인지?.”

민이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캐밥을 쳐다 보았다.

“어떻게 알았어?”

“옛날부터 알았어. 너 알기 전부터.”

캐밥은 회상에 잠긴다는 듯, 창 밖을 내다보았다. 가을 요정들이 나뭇잎에서 초록색을 덜어내고 빨강, 노랑 물감을 한껏 쏟아 붓고 있는 중이었다.

버스는 공사 중인 마을 언덕을 올라가느라고 몹시 덜컹거리기 시작하였다. 캐밥이 사는 집, 지붕 꼭대기가 저 만치서 조금씩 내려다보이기 시작할 즈음, 캐밥은 흠흠, 개구쟁이답지 않게 목소리를 잔뜩 가라앉히더니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나, 인디언인 거 알지? 우리 인디언들은 무척 가난하게 살아. 특히 우리 집은 매우 가난했었어.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거든. 엄마 혼자 벌어서 온 식구가 다 먹고살아야 하니까. 우린 씨리얼 사 먹을 돈조차 풍족하지 않았어. 생각다 못 해 엄마는 개밥을 사다가 내 동생과 나를 먹였어. 개밥은 양도 많은데다 영양소를 골고루 갖추고 있거든. 우린 아주 어려서부터 개밥이 씨리얼인 줄 알고 먹고 살아 와서 그게 개밥인 줄도 몰랐어. 엄마는 개밥을 사와서 보통 사람들이 먹는 씨리얼 통에 옮겨 놨었거든. 근데 하루는 옆집에 살고 있던 아이가 우리 엄마가 개밥을 사는 걸 보고 추리를 한 거지. 개도 키우지 않는 집에 개밥을 자꾸 사가니까 이상했던가 봐. 녀석이 연락도 없이 우리 집에 놀러 오더니 그 다음날 학교에 소문이 좌악 퍼졌더라구. 우리 집이 개밥을 먹고 사는 집이라고. 그 녀석이 바로 한국 아이였어. 그리고 그 녀석은 내 이름이 한국말로는 ‘개밥’이란 뜻을 갖고 있다고도 말했어. 내 별명은 자연 ‘도그 푸드(dog food)’가 되었지. 나는 부끄러워서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도 없었어. 우리 엄마도 나중에 이 사실을 아시고는 한참을 우셨어. 당신이 못나셔서 자식들이 학교에서 놀림을 당하게 되었다면서...... 그때 결심을 했어. 앞으로 한국 아이들만 보면 그냥 두지 않겠다고. 그후 우리는 이 동네로 이살 왔어. 그리고 널 만난 거야. 네가 한국 애라는 걸 알고 그만 그때 걔 생각이 나서 널 처음부터 그렇게 놀렸던 거야...... 미안해. 정말 미안해. 진짜 잘못은 네가 한 게 아닌데......”

얘기를 다 듣고 나자 코가 시큰거렸다. 만약, 아까 참지 못하고 캐밥의 뜻을 곧이 곧대로 ‘개밥’이라고 말했더라면 어떡할 뻔 했나, 상상만 해도 아찔하였다.

캐밥이 내릴 차례가 되었다.

“아깐 정말 고마웠어! 내일 보자. 강, 민, 이.”

캐밥은 버스에서 내려서도 한참동안 민이 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마지막 정거장에 버스가 멈추었다. 민이는 천천히 땅만 보고 걸었다. 캐밥이 했던 말이 귓 속에서 계속 쟁쟁거렸다. 어떻게 사람이 개에게 주는 음식을 먹을 수가 있었을까...... 그걸 자식에게 먹여야 하는 엄마의 심정은 얼마나 아팠을까...... 도대체 그 못된 한국 아이는 누구였을까.....

민이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푸욱, 하고 내쉬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민이의 앞을 우뚝 가로막으며 다가섰다.

어!

놀라서 쳐다보니 아빠였다.

“아빠! 아빠가 어쩐 일......”

엄마의 병실에 계셔야 할 시간인데......

민이는 긴장된 얼굴로 아빠를 쳐다보았다.

“놀랬지? 엄마, 조금 전에 수술 마치셨다. 오늘 수술을 한다고 미리 알려주면 네가 너무 걱정할까봐 안 알려줬다. 수술은 대성공이야! 이젠 요양만 하면 아주 건강하게 될 수 있대. 내일이면 너도 면회가 허락될 거다. 그 동안 잘 견뎌 줘서 고맙다!”

“아빠.......!”

민이를 번쩍 들어 올려주는 아빠의 눈에선 눈물이 주루룩 흘러 내렸다. 하지만 민이는 아빠의 눈물을 닦아 드릴 생각을 할 수조차 없었다. 민이의 눈에서도 쉴새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