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었던 시인을 찾아서

by 이승하 posted Jul 10, 2005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아래의 글은 윤동주 시인의 발자취를 찾아 중국 여행을 한 뒤, 계간 시전문지 <시안>에 실었던 것입니다. 이 여행에서는 윤동주의 묘소를 찾아보지 못했습니다만 작년에 다시금 중국 여행을 하면서, 묘소를 찾아보았습니다.

1. 시인의 집

  1999년 7월 20∼24일의 중국 땅은 10 몇 년 만의 혹서였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후끈 달아오른, 그나마도 없는 듯이 부는 대륙의 바람. 비가 오래 내리지 않아 습도가 낮은 것이 오히려 이국의 기후를 견디게 해주었다. 사람의 체온을 이미 넘어선 더위 속에서 백두산 가는 길이건 북경이건, 시골이건 도회지이건 웃옷을 몽땅 벗어버린 채 거리를 활보하는 성인 남자는 수시로 눈에 띄었다. 패션 감각이 없는 것은 사람들의 옷차림에서도, 거리의 간판에서도, 가옥의 모양에서도 알 수 있었다. 오랜 공산주의 체제의 영향 때문이겠지만 기후마저 이 나라 사람들의 모습에서 활력을 빼앗아갔는지 대부분의 사람이 맥이 풀려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건축공사장에서 일하는 인부들을 보며 나는 중국인을 통칭하는 '만만디'라는 말을 곧바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놀고 한편으로는 쉬어가면서 일을 하는 것 같았고, 그렇기 때문에 중국은 졸속공사며 부실공사와는 거리가 먼 나라일 것이라는 역설적인 생각도 해보았다.

  백두산 장백폭포 부근에 자리잡은 여관 '장백대주점'에서 출발한 버스를 타고서 달리고 달려 도착한 길림성 화룡현의 명동촌. 스물아홉의 나이로 죽었기에 오직 청춘의 모습으로만 우리의 뇌리에 남아 있는 시인 윤동주가 고고의 울음을 터뜨린 곳에 도착한 것은 22일 한낮이었다. 날씨는 여전히 무더웠지만 도착 직전에 뿌린 한 줄기 비가 풀잎과 나무에 생기를 불어넣었는지 일대의 풍경은 이제까지 보아 왔던 풍경과는 달리 먼 산이 가깝게 느껴질 정도로 청명하였다. 반도의 남쪽에서 시를 쓰거나 연구하고 있는, 또 고급독자임을 자처하는 우리 일행 40명은 버스에서 내려 윤동주 시인이 태어난 생가 터를 둘러보았다.

  동구 초입에 서 있는 커다란 바위는 작년 9월에 거제시 장승포청년회의소에서 세운 '창의선열위령비'였다. 명동마을이나 윤동주 생가 터를 알리는 표지판은 너무 작기 때문에 길 쪽에서는 이 큰 위령비를 보고 찾아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동주는 일본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죽었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일대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몸 바쳐 일하고 싸우다 죽었을 것인가.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간도대토벌, 경신대학살, 흑하사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아저씨가 한 분 나타나 안내를 했다. 휘 둘러보니 그 옛날 명동촌의 위세는 온데간데없고 유적지로 꾸며진 듯한 낡은 집 몇 채가 서 있을 뿐이었다. 기와 지붕이 보이는 한옥의 앞마당으로 들어섰을 때, 일행 앞에는 또 하나의 비석이 나타났다. '약연 목사 기념비' 앞에서 안내원은 일행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김'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을 비의 제일 상단 부분이 부서져 있었다.

  안내원은 윤동주 시인의 외삼촌인 김약연 선생이 여섯 가구를 이끌고 간도로 망명하여 명동촌과 명동학교를 세웠다는 것, 문화혁명 때 홍위병들이 몰려와 비석의 부수고 내팽개쳤다는 것, 그의 증손자가 새로이 비석을 만들어 세우는 것을 반대하여 파손된 것을 그대로 이곳에 세워놓았다는 것, 이 옆에 있는 건물은 1916년도에 이 일대에서는 최초로 세워진 비슬나무로 만든 교회건물이라는 것 등의 설명을 해주었으나 몇 가지 의문이 들었다. 내가 알고 있던 것과 조금 다른 내용이었지만 묻고 확인해보기에는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또 한낱 관광객인 주제에 이곳 토박이가 알고 있는 내용을 부정하고 따지는 것도 무례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송우혜가 쓴 <윤동주 평전>에 따르면 두만강변의 도시인 회령과 종성 등에 거주하던 김약연·김하규·남도천·문병규 네 학자(훈장)의 대소가 스물두 집의 식솔들 141명의 대규모 이민단이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 명동촌에 정착한 것은 1899년 2월 18일이었다. 이곳에서 지도자급인 네 학자는 세 군데에 서당을 열었다. 제법 번성한 읍을 이루고 있던 용정에는 이미 그 이전에 북간도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관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이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에 의해 세워졌는데(1906년), 그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 황제의 밀사로 파견되자 그만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러자 명동에도 신학문을 가르칠 교육기관을 세우자는 운동이 일어나 명동서숙이 1908년 4월 27일에 세워졌고, 초대 숙장 박무림과 2대 숙장 김약연이 학교의 발전을 위해 많은 일을 하였다. 김약연은 1929년 평양 장로교 신학교에 입학해 1년간 수학한 뒤 명동교회에 부임하였다.

  송우혜는 명동에 교회가 처음 세워진 것이 1909년이라 했으나 용정중학교 내 역사전시관 벽보에는 김약연을 '명동교회 설립자, 북간도 한인 대통령'으로 소개하고 있어 혼란이 왔다. 명동교회에 부임했다고 했는데 설립자라? 대통령으로 불린 것인가 정말 한인 대통령이란 것이 있었나? 송우혜의 조사와 현지에서의 설명과는 이처럼 차이나는 것이 몇 가지 있어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90년 전의 일이라 기록이 뚜렷이 남아 있지 않는 한 사실을 확인하기란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약연 기념비에서 조금 내려가니 제재소 터가 있었고, '윤동주 고향집'이라는 표지판이 서 있었다. 마침내 서울→북경→연길→백두산→용정→두만강 삼합대교를 거쳐 우리는 윤동주의 생가에 다다른 것이었다.

  집 안쪽에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는데, 비문의 표제는 '윤동주 생가 옛터'였다. 거기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1932년 4월 윤동주가 은진중학교로 진학하게 되자 그의 조부는 솔가하여 룡정으로 이사하고 이 집은 매도되어 다른 사람이 살다가 1981년 허물어졌다. 1994년 룡정촌은 그 력사적 의의와 유래를 고려하여 룡정시 정부에서 관광점으로 지정하였다. 이에 지신향 정부와 룡정시 문련은 연변대학 조선연구중심의 주선으로 사단법인 해외한민족연구소의 지원을 받고 국내외 여러 인사들의 정성에 힘입어 1994년 8월 력사적 유물로서 윤동주 생가를 복원하였다." 여기서는 유적지를 '관광점'으로, 문학연맹을 줄여 '문련'으로 쓰는 것 같았다. 연구소를 '연구중심'으로 쓰는 것도 우리와는 다른 표기법이었다. 안내원은 이 집이 윤동주의 생가와 흡사하게 생긴 집을 여기다 옮겨놓은 것이라 했으므로 시인의 체취가 배어 있는 생가는 아닌 셈이었다.  

생가 터에서 볼 만한 것은 시인의 약력을 적어놓은 비석이 아니라 낡은 우물이었다. 내 어린 날 외갓집에 있던 우물은 돌과 시멘트로 쌓아올린 것이었는데 여기 것은 우물 정자 모양의 나무로 되어 있는 데다 깊이가 상당하여 시인의 <자화상>에서 본 그 우물과는 거리가 있었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의 우물은 물이 거울처럼 보이는 우물이어야 하는데 윤동주 생가 터의 우물은 달과 구름이 비치기에는 너무 깊었다. 아무튼 시인은 이 집에서 1917년 12월 30일에 태어나 1931년 늦가을, 용정가 제2구 1동 36호로 이사할 때까지 살았다. 어린이잡지 <아이생활>과 <어린이>를 구독하면서 시인에의 꿈을 막연히 키워가던 윤동주에게 있어 이 집은 그야말로 '지상의 낙원'이었을 것이다. 윤동주는 명동소학교 5학년 시절에 송몽규·김정우 등과 함께 등사판 문집 <새 명동>을 발간하였고, 이 문집에는 그 무렵에 썼던 동요·동시가 수록되어 있다지만 직접 볼 수는 없었다. 그 옛날의 흥성했던 모습은 남아 있지 않고 이웃 용정촌의 발달로 한촌(寒村)이 되고 만 명동마을. 우리는 빠듯한 일정 때문에 마을을 좀더 자세히 둘러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회령시 전망대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 하는 <별 헤는 밤>의 몇 구절을 떠올리면서.

  2. 시인의 학교

  시인의 생가 방문에 앞서 우리는 길림성 용정시 용문가에 있는 용정중학교를 방문하였다. 윤동주는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명동에서 20리 동남쪽에 자리잡은 중국 도시 대납자에 있는 화룡 현립 제1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간 수학한 뒤 용정으로 이사를 갔다. 이사를 가서는 미션계 교육기관인 은진중학교에 고종사촌 송몽규와 또 한 명의 죽마고우인 문익환과 함께 입학했는데 그때가 1932년 4월이었다.

  명동에서 용정으로 이사를 간 것은 그 당시 북간도 일대에 팽배한 공산주의·사회사상의 거친 파고를 피해 만주 전역에 걸쳐 산재해 살던 중류층 이상의 한인들이 모두 용정으로 옮겨갔기 때문이었다. 1930년경에 명동에 공산 테러가 성행하자 기독교인이 주축을 이루고 있던 명동 사람들로서는 도회지에 모여 사는 것보다 안전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여기서 4학년 1학기까지 다닌 윤동주는 1935년 평양 숭실중학교로 전학하려고 편입시험을 치는데, 시험을 잘 못 쳐 한 학년 낮춘 3학년으로 들어갔다. 얼마 다니지도 못한 상태에서 숭실중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를 당하자 윤동주는 용정으로 되돌아왔고,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하여 1938년 2월에 졸업하였다. 용정중학교 역사전시관 벽에 도표로 그려진 학교 연혁사를 보면 은진중학교와 광명학원 중학부가 다 용정중학교의 전신(前身)에 들어가는 것이므로 시인은 이 학교에서 5년 반을 다닌 것이다.

  교정에 윤동주의 시비가 세워진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시비가 세워진 것은 1992년 9월 10일, 서울해외한민족연구소와 동아일보사가 후원한 덕분이었다.

  윤동주 시비 바로 뒤에 자리잡은 역사전시관에 올라가기 전에 학교를 둘러보다 운동장 가 게시판(칠판)에 분필로 적혀 있는 '윤동주―별'이라는 글씨에 눈길이 갔다. 내용을 읽어보니 윤동주가 이 학교가 배출한 민족문학의 큰 별이라니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절창을 남긴 시인이라느니 <별 헤는 밤>이란 명시를 쓴 시인이라느니 하는 이야기는 한 줄도 적혀 있지 않았다. 시인이 은진중학교 시절에 '별'이라는 이름으로 교내 문예지를 냈는데 그것이 탄생 75돌을 맞이한 1993년에 같은 이름으로 복간되었다는 것이다.
  
  복간 여섯 돌을 맞이하는 올해에는 "사생들로 하여금 모교와 고향, 민족과 조국의 력사를 터득하고 모교가 키운 저항시인 윤동주를 더 깊이 알게 함으로써 학교를 사랑하고 고향을 사랑하며 조국을 사랑하는 애국주의 씨앗을 더더욱 영글게 하려는" 취지에서 작품을 공모한다고 분필로 적혀 있었다. 구체적인 공모 내용이 재미있었다. 1) 모교와 시인을 노래한 작품. 2) 고향·민족·조국을 노래한 작품. 3) 인정세태·풍속·자연을 반영한 작품. 장르를 '문체'라고 하고는 시·산문(수필)·기서문·단평 네 가지에 걸쳐 모집한다고 했는데 기서문이란 아마도 한자로는 '奇書文', 즉 편지글을 뜻하는 듯했다. 상금은 1등 1명 200원, 2등 1명 150원, 3등 3명 매인당 100원, 장려상 5명 매인당 50원이니 상금 총액이 900원, 중학교 대상의 교내 문예작품 공모치고는 상금이 제법 풍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중국돈 1元은 한국돈 140원 정도.)

  윤동주 생시에는 '별'이 교내 문예지였으나 지금은 윤동주문학사상연구회에서 연간으로 발행하는 잡지로 탈바꿈했다는 사실을 용정중학교 소개 책자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이 책에는 은진중학편이 있는데 뜻밖의 내용이 들어 있었다. 교내 웅변대회에서 윤동주가 <땀 한 방울>이라는 자작 원고로 1등상을 받았다는 것. 명동소학교 4학년 때 담임선생이었던 한준명 목사가 윤동주를 성품이 아주 순하고 어질고 잘 울었던 소년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대목이었다. 윤동주의 문학정신을 기리는 문학상은 국내에도 2개가 있지만 이곳 연변에서도 1992년 윤동주 탄생 74돌을 맞아 제정되었다. 미중한인우호협회 회장으로 있는 재미교포 현봉학 박사가 2천 달러를 기탁하여 제정되었는데, 현 박사는 '별' 잡지사의 명예주필까지 맡고 있다.

  중국 도착 다음날인 21일 아침, 길림성 연길시 대우호텔 세미나 룸에서는 <시안>과 <연변문학>(연길), <장백산>(장춘) 공동 주최로 '백두산의 원형심상과 시적 상상력 문학 세미나'가 있었다. 한국에서 간 사람 중 이기철·허형만 교수가 주제발표를, 연변 쪽에서는 남영전·리금복 두 분이 주제발표를 했다. 이밖에도 여러 시인이 백두산 소재의 시를 낭독했으며, 자신이 펴낸 시집이나 글이 실린 문예지를 교환하는 화기애애한 시간도 가졌다. 내가 받은 연변작가협회 기관지인 <연변문학> 1999년 6월호에는 작년도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수상 작품명과 수상소감, 심사평이 실려 있었다. 시인은 가고 없지만, 그는 이렇게 중국과 한국 두 나라에서 '윤동주'라는 이름으로 영원의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윤동주의 학업은 익히 알려진 대로 용정에서의 수학 이후 서울 연희전문 문과→도쿄 입교대학 문학부 영문과→교토 동지사대학 영문학과로 이어졌다. 즉, 1924년 4월 4일 명동소학교에 입학한 이래 1945년 2월 16일 숨을 거두는 그날까지 20년 넘게 윤동주는 학생이었다.

  시인이 4년 동안 수학한 연희전문(현 연세대학교)의 교정에는 시비가 서 있다. 작고 50년 뒤인 1995년 2월 16일에 이 시비 앞에서 윤동주 시인 50주기 추도식이 거행된 바 있다. 놀라운 것은 같은 날 일본 동지사대학에서도 시비 제막식과 아울러 윤동주를 기리는 모임이 거행되었다는 것이다. 꽃다운 나이의 한국 유학생을 사지로 보낸 후쿠오카에서도 그날 윤동주 50주기를 맞아 위령제가 거행되었다. 그의 시 [序詩]는 몇 년 전부터 일본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림으로써 양국의 청소년들이 다 즐겨 암송하는 유일한 시가 되었다. 일본에서도 윤동주의 죽음을 애석해 하고 애도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던 시인의 순정한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3. 시인의 죽음과 묘지

  시인이 죽은 것은 광복 6개월 전이었다. 교토에 와서 맞은 첫 여름방학 때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은 것이 잘못이었을까. 그해 7월 14일 윤동주는 나흘 전에 잡혀간 송몽규의 뒤를 이어 특고경찰(特高警察)에 의해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되었다. 특고경찰이란 특별고등경찰을 줄인 말로 사상 감시를 주임무로 하는 특별한 경찰 조직이었다. 송우혜는 윤동주의 검거 이유를 이렇게 추리하고 있다.

  그 동안 송몽규와 더불어 '조선의 독립'이니 '조선민족의 민족의식을 각성시키기 위한 문화운동'이니 하는 문제들을 놓고 의견을 나누면서, 자신은 앞으로 연극 분야에 투신해서 연극을 통한 민족문화운동을 해보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던 것이다.
  일경의 취조에 대해 그는 처음에는 묵비권을 행사하려고 했다. 그러자 취조관은 일련의 서류를 내보였다. 그것은 놀랍게도 거의 1년 가까이 미행하고 엿들어서 작성해놓은 기록이었다. 어느 달 어느 날은 몇 시에 하숙방 불이 꺼지고, 어느 날 어느 식당에서 송몽규와 윤동주와 고희욱 세 사람이 만나서 함께 회식을 했다든가, 어느 날은 몇 시까지 송몽규의 방에서 어떤 내용의 이야기를 그와 나누었다든가, 하는 식으로 소상히 적힌 것이었다.

  윤동주는 이처럼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고 독립에 대한 희망을 가졌을 뿐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체포 구금되었다. 교토 경찰서 유치장에서 검사국 감옥의 독방으로 이감되었고, 검사국에서 취조를 받은 후에 교토 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았다. 큐슈(九州)에 있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도 그는 독방에 갇혔고, 매끼의 식사는 깡보리밥 한 덩어리에 단무지 몇 쪽과 묽은 된장국 한 그릇이 전부였다. 윤동주의 때 이른 죽음은 추위와 허기가 초래한 병 때문이 아니라 생체실험용 주사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옥사 통지를 받고 윤동주의 부친과 함께 형무소에 가서 유해를 가져왔던 당숙 윤영춘의 증언('명동촌에서 후쿠오카까지', <나라사랑> 23집, 외솔회)을 들어보자.

  몽규가 반쯤 깨어진 안경을 눈에 걸친 채 내게로 달려온다. 피골이 상접이라 처음에는 얼른 알아보지 못하였다. 어떻게 용케도 이렇게 찾아왔느냐고 여쭙는 인사의 말소리조차 저 세상에서 들려오는 꿈 같은 소리였다. 입으로 무어라 중얼거리나 잘 들리지 않아서 "왜 그 모양이냐"고 물었더니, "저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고 동주도 이 모양으로……" 하고 말소리는 흐려졌다.

  윤동주와 같은 시기에 같은 감옥에서 옥살이를 한 독립유공자 김헌술 씨도 5∼10㏄의 주사를 일주일 이상 맞으며 암산 능력을 테스트 받았다는 생체실험. 일제의 모르모트가 된 시인은 자신의 수인번호를 "모기소리 같은 가냘픈 소리"로 복창해 김헌술 씨는 시인의 수인번호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이국의 추운 독방에서 외마디소리를 높게 지르고는 운명하였다. 27년 2개월의 짧고도 짧은 생애였다. 비록 냉전체제였다는 핑계를 댈 수는 있겠지만 우리는 윤동주의 묘소와 비석이 있는 것도 몰랐다. 1985년 일본의 윤동주 연구가인 조도전대학의 오오무라 마수오(大村益夫) 교수가 용정에 있는 묘와 비석의 존재를 한국의 학계와 언론에 소개하면서 비로소 알려진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비문을 쓴 이는 1910년대 동주의 부친이 북경 유학을 갔을 때 같이 떠났던 5인의 유학생 중 하나로, 북경에서 돌아온 후에는 동주의 부친과 함께 명동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한 김석관 선생이었다. 한자로 쓴 비문이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에 번역되어 있다. 다음은 그 일부.

  그 재질 가히 당세에 쓰일 만하여 시로써 장차 사회에 울려퍼질 만했는데, 춘풍 무정하여 꽃이 피고도 열매를 맺지 못하니, 아아 아깝도다.

  비록 그의 나이는 꽃조차도 피우지 못한 스물아홉 살이었지만 시로써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실한 열매를 맺었다. 우리 현대문학사 100년 동안 이 땅에서 씌어진 수많은 시 가운데 국민 애송시 1위는 그 어떤 단체와 기관의 조사로도 윤동주의 <序詩>가 아닌 다른 시가 선정된 적이 없으므로.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는 국민적 애송시집이 되었으며, 수많은 논문과 평문이 그가 간 지 반세기가 넘은 지금까지도 거듭해서 다시 씌어지고 있다.

  묘소를 새롭게 단장한 것도 현봉학 박사였다. 1988년 6월에 새로이 봉분이 단장되었고, '龍井中學校修繕'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지석이 비석 앞에 놓여졌다. 바로 그해 윤동주장학회도 설립되었다. 우리 일행은 빠듯한 일정 때문에 용정의 동산(東山)에 위치한 중앙교회 교회 묘지 터에 있는 윤동주의 묘소에는 가보지를 못했다. '詩人尹東柱之墓' 앞에서 웃는 얼굴로 기념사진 촬영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더욱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을까.

  4. 시인의 길

  윤동주는 생전에 <카톨릭소년>에 몇 편의 동시를, 조선일보 학생란에 몇 편의 시를 발표한 적이 있다. 하지만 시인으로서의 활동은 전무하였고, 그저 시가 좋아 시를 썼을 뿐이다. 꼼꼼하게 시를 공책에 써놓으며 즐거워한 아마추어 문학애호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친구 정병욱이 유고 31편을 모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시인 정지용의 서문과 연희전문 동기 강처중의 발문을 붙여 정음사에서 출간한 것이 1948년 1월, 사후 3년 정도가 지나서였다. 일제치하라는 상황과 이른 죽음이 그에게 그런 이미지를 부여한 것이겠지만 우리는 참으로 깨끗한 시인의 초상을 학사모를 단정히 쓴 윤동주를 통해서 보게 된다. 북경의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서, 또 출국 수속을 밟으면서 나는 이런 생각에 잠겼다.

  ……문단에 나온 이래 내 지금껏 순수한 시심으로만 시를 썼던가. 세평과 명리에 연연하지는 않았는가. 허명에 눈이 어두워 내 내면의 목소리는 들은 체 만 체 하지 않았는가.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떳떳이 다짐한 적이 있었던가. 한없는 부끄러움이 몰려들었지만 이제부터는 그 누구보다 성실하고 순정한 시인의 길을, 나한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겠다는 결심이 가슴을 데우며 몰려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42도를 넘어선 중국의 더위는 이미 내게 아무것도 아니었다.